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13화 (13/200)

13화 휴가를 즐기지 못하는 자들

류준혁에 대한 기사가 폭탄처럼 한국 방송계를 휩쓰는 사이.

우리 <당잠사> 제작진에게도 폭탄이 하나 떨어졌다.

바로 <당잠사> 시즌3의 방영 일정.

원래는 반년 정도 뒤에 방영하기로 계획을 잡고 있었기에 빨라도 내년 1분기가 목표였다.

출연진들과 그런 협의도 대략 끝내 놓았고, 외주 업체에도 그러한 일정을 공유해 놓은 상태.

하지만 윗선에선 반년도 늦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시즌3 방영을 올해 4분기로 맞추라는 지시가 떨어졌던 것이다.

“방 PD님이 가만히 있으셨어요?”

“그럴 리가 없지…….”

요즘 방수정 PD는 거의 방다르크다.

“아직도 싸우는 중이야. 그 와중에 출연진이나 제작진은 그대로 유지해서 가라고 하니 더 골치 아픈 거거든.”

제작진은 방송사에 소속되어 있는 몸이니 그렇다고 치고.

<당잠사> 출연진은 배우, 개그맨, 아이돌까지 망라하고 있다.

그들 전체의 일정을 기존 구두 협의보다 3개월 더 당겨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전 괜찮아요.”

효명이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올해든 내년이든, 언제든 불러만 주시면 꼭 가겠습니다.”

“회사랑도 이야기해야지.”

“매니저 형도 같이 싸워 줄 거예요. 어차피 타이밍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엑시트의 새 싱글은 대략 다음 달 정도 발매라고 들었다.

아이돌 업계를 잘 모르긴 하지만, 싱글이 발매되면 대략 한 달 정도의 활동을 한다는 건 안다.

그렇게만 보면 4분기 방영으로 잡혀도 효명이가 합류하는 것에는 크게 무리는 없긴 했다.

“너도 당연히 교섭 1순위이긴 한데…… 사실 더 큰 일은 류준혁 배우지. 갑자기 그런 일이 터져서는.”

사실 원래 방영 계획대로면 무리가 없었을 수도 있다.

소속사와 결별이 큰일이긴 해도, 류준혁 정도의 커리어면 금방 다른 회사에서 모셔 갈 테고, 그 기간이 반년 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4분기면 말이 달랐다. 어느 회사가 미친 듯한 조건으로 류준혁을 데려가 달라고 기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류준혁 배우가 다시 회사를 차리면…….”

“같이 차린 회사가 그런 일을 벌였으니…… 과연 그러실까요.”

그렇겠지.

효명이와 눈을 마주치다가 함께 한숨을 지었다.

“너는 왜 한숨이야.”

“그냥. 형이 고민하는 거 보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서요.”

“나도 뭐…… 헛고민 하는 거지. 막내 주제에 무슨.”

그랬다. 말단 막내 PD인 나로서는, 보라카이 휴가나 먼저 신경 쓰는 게 맞았다.

* * *

포상 휴가로 제작진 출연진 전원의 보라카이행이 결정된 후, 본의 아니게 일이 늘었다.

일정이나 예약 등은 전부 우리가 알아서 잡아야 했는데, 아무리 선배 PD가 리스트를 마련했다고 해도, 항공권이든 숙박이든 예약을 잡는 건 막내 라인의 몫이었다.

덕분에 나는 작가실 막내 구은경 작가와 함께 약 50명 단위의 예약을 치러야 했다.

그나마 다행한 건 여행 프로그램 팀이라는 점이었다. 여행사와 연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려했던 것보다는 손쉽게 휴가 예약이 가능했다.

그렇게 도착한 보라카이.

총 4박 5일의 일정 동안 우리 제작진은 말 그대로 시즌3 같은 건 잊고 쉬는 것에만 온 힘을 다했다.

[엑시트최효명: 나도 나도 가고 싶었다고요 형 (통곡)(좌절)]

[오지 그랬어. 레코딩이고 뭐고 때려치고.]

[엑시트최효명: 그랬다간 매니저형한테 멱살 잡히고 대표님한테 머리채 잡힘......]

[아이돌 트렌드 1위 먹으신 분의 멱살을 잡는다고? 뭐 머리채는 내드려야지.]

[엑시트최효명: (폭소)(눈물)(폭소)]

효명이는 스케줄이 안 맞아서 결국 못 왔다.

현지에서 푸른 바다와 하늘 사진을 보여 줬더니 엉엉 우는 이모티콘만 날아왔다.

“너희 사귀냐.”

옆에서 훔쳐보던 박주영 선배가 푹 찌르고 들어왔다.

“전 찬성.”

이민희도 깔깔대면서 동조해서, 나는 머쓱하게 폰을 숨겼다.

“왜 훔쳐보고 그래요.”

“훔쳐본 거 아냐. 보인 거지.”

“그게 그거죠.”

푸른 바다 아래의 하얀 해변, 파라솔로 뙤약볕이 가려진 선베드에 나란히 누워서 낄낄대는 우리 옆을 지나가던 선배들이 바다 안 들어가냐고 손짓했다.

“전 됐습니다.”

“맥주가 맛있네요.”

박주영 선배와 내가 손을 젓는 사이,

“저 갈래요!”

이민희가 몸을 덮고 있던 로브를 벗어서 선베드에 올려놓고 해변을 뛰어갔다.

그녀의 푸른색 비키니가 하얀 백사장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대한아.”

“예.”

“민희 씨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참…… 대단하시구나.”

“아, 녹음해 둘걸.”

“뭐야, 나만 그렇게 생각해? 나만 쓰레기야?”

하긴, 나도 이민희가 새삼스러웠다.

매일 사무실에서 퀭한 눈에 화장도 안 한 다크서클 낀 얼굴만 내내 보다가, 이렇게 대자연에서 잔뜩 꾸미고 뽐내는 그녀를 보니 달리 보였다.

보통 저 나이 때는 그래, 바다도 좀 뛰어다니고 그래야지.

아, 동갑이었지…….

“좋네.”

“좋네요…….”

박주영 선배와 난 늙은이들처럼 선베드에 누워 그렇게 휴가를 보냈다.

하지만 그런 휴가를 전혀 즐기지 못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보라카이의 저녁.

비교적 젊은 스태프들은 여전히 해변에서 꺅꺅대고 있는 사이, 다소 나이가 있는 제작진을 축으로 펍에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박주영 선배와 나도 거기에 합류해서 동남아의 요리와 함께 맥주를 즐겼다.

“……진짜 4분기 방영해?”

그러던 중 옆에 있던 출연진들이 앉은 테이블에서 그런 대화가 들려왔다.

“자기도 알겠지만, 만약 그러면 내 스케줄이 좀 꼬여. 연극 연습도 해야 하는데.”

“저도요. 콘서트가 그즈음이라서 연습이랑 겹치면…….”

“지금 대본 몇 개 들어온 게 있는데 죄다 일정이 빡빡해…….”

“준혁이 문제도 있으니 그것도…….”

제작진만이 아니라 출연진들의 고민도 비슷한가 보다.

다들 <당잠사>에 애착이 있는데, 애착과 스케줄은 또 다른 문제니까.

“아직 확정은 아니에요. 윗선이랑 이야기해 보고 있어요.”

거기에 대답하고 있는 것은 유수현 작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니, 방수정 PD는 또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보라카이에 도착한 이후 그녀는 거의 핸드폰을 끼고 살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도 계속해서 위로 불려 가기 일쑤였는데, 휴가를 와서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자유일정이라 모두 바다로 나가 놀고 있는데, 그늘에 앉아 핸드폰만 붙들고 있었다.

“방 PD님 또 전화하러 가셨어요?”

옆자리에 누가 앉는 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민희였다.

그녀는 어느새 비키니 대신 동남아 휴양지에 어울리는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와…….

“나도 맥주 좀.”

“아, 예.”

무심결에 그녀를 멍하니 보다가 흠칫 놀라서 눈을 돌렸다.

병맥주를 하나 건네자, 그녀는 가볍게 뚜껑을 따 한 모금 하더니 재차 저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유 작가님 혼자서 고생하시네요. 저 불만들을 다 들어줘야 할 텐데.”

“그게 할 일이신데 뭐.”

“그래도요.”

선배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면서 그녀가 재차 말했다.

“4분기 방영이라니. 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있길래 그런 무리한 일정을 강요하는 걸까요? 뭐 들은 거 없어요?”

이민희가 나를 보길래, 나는 선배를 쳐다봤다.

박주영 선배는 맞은편의 선배 PD를 보았고, 그가 슬그머니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우리 이사 중 하나가 4분기에 밀고 있던 기획 있잖아.”

“아, 그거요? 시즌제 말고 고정 예능 하나 만들자던 거?”

“그래, 그거. 근데 그 이사가 얼마 전에 나간 건 알지? 그러면서 그 기획이 붕 뜬 거지.”

“아하……. 그래서요?”

“당장 구멍이 났으니 일단 거기는 메꿔야겠고, 아예 지금 분위기 좋은 <당잠사> 시즌3을 땡기자는 말이 오가나 봐.”

방수정 PD나 몇 명을 제외하고는 NBS 짬밥이 가장 긴 선배 PD였다. 그의 말에 절로 신뢰가 생겼다.

“윗선 문제였네요?”

“어차피 다 그런 거 아니겠어?”

현재 우리 방송사 최고의 스타 PD는 역시 방수정이다.

하지만 스타 PD도 결국엔 월급쟁이. 어디나 월급 주는 사람은 무서운 법이다.

“그럼…… 또 결국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옆 테이블에 들리지 않게 더욱 목소리를 낮춰서 우리가 수군대는 사이, 방수정 PD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앉아 있지도 못했는데 다시 또 일어섰다.

귀에 스마트폰을 가져가는 걸 보니 또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방수정 PD의 상황은 휴가 마지막까지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제작진들도 눈치를 보며 한마디씩 했는데, 상황을 봐서는 걸려오는 전화가 서인하 부장, 그보다 더 윗선, 다른 부서장, 심지어는 출연진의 소속사들도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한 프로그램을 이끄는 위치의 PD는 저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건가.

우리 팀 대장이 그렇게 고생하고 있으니, 솔직히 좀 마음이 무거웠다.

다들 똑같은지 휴가 기분을 내려고 해도 사실 어느 정도 처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마지막 날.

새벽 비행기를 타기 전의 마지막 밤을 맞아 열심히 해변의 술파티를 나누고 있던 중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3개월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직 배울 게 많은데 이렇게 저를 가르쳐 주시고…….”

마지막 자리이니만큼 돌아가면서 소감을 이야기하자는 분위기가 되어, 제작진과 출연진 가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던 중 박주영 선배에 이어서 내 차례도 되었다.

“이번 <당잠사> 시즌2가 저로서는 제대로 참여해 본 첫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제가 함께 노력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이 좋은 평을 받아서 정말로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생했어, 강PD.”

그렇게 화답해 주는 방수정 PD에게, 괜히 울컥하는 마음을 지우면서 고개를 꾸벅일 때였다.

지잉―

테이블 위에 있던 그녀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내가 뭐라고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녀가 스마트폰을 들고 일어섰다.

“자자, 앉으시고. 다음!”

결국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나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다시 몇 사람의 인사가 지나갈 즈음, 나는 마시던 맥주를 하나 비우고 일어섰다.

“어, 안 마시고 어디 가요? 도망치는 거?”

“화장실요.”

이민희가 눈을 부라리는 것을 슬쩍 웃어 주고 펍을 나왔다.

사실은 방수정 PD에게 제대로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처음에는 그녀의 태도에 혼자서 화가 나 호승심을 불태우긴 했지만, 프로그램 막바지로 갈수록 그녀는 나를 인정해 주었다.

위치, 직분을 다 뛰어넘어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도 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거기에 대해 제대로 된 인사를 한번 건네지도 못했다.

물론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시즌3를 촬영할 테고, 언제고 감사 인사를 할 기회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즌2 중에 반드시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해변으로 난 길을 걸어갔다.

분명 이쪽으로 갔을 텐데…… 아, 저기 계시네.

해변 쪽으로 난 길.

야자수가 이룬 어두운 그늘 아래 방수정이 서 있었다.

뒤돌아 있어서 내가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아직 통화 중인 것으로 보였기에 난 걸음을 멈추었다.

적당한 거리에서 대기할까 싶어 스마트폰을 꺼내는 와중에.

“부장님도 아시잖아요.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건지.”

그녀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알죠, 저도 알아요. 회사 입장이라는 게 있는 거. 하지만 이 일정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니까요? 저만 문제가 아니고, 제 밑의 애들도 그렇고, 출연진들도 그렇고. 대체 몇 번 이야기를 드려야…… 아, 그럼요. 알아요. 부장님도 그런 거 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제가 그 이사한테 따지겠다는 거잖아요.”

상대는 서인하 부장인 모양이다.

그간 제작부장으로서 우리 팀의 입장도 잘 이해해 줬다지만, 이 일에 있어서는 그도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뭐, 이사진이 나섰다면 어쩔 수 없겠지.

오히려 그런 이사에게 직접 따지겠다는 방수정 PD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통화는 더욱 격해졌다.

급기야.

“아니요, 됐습니다. 저는 계속 말씀드렸어요. 저는 못합니다.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일갈하더니, 그녀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딱 뭐랄까…… 최후통첩이랄까.

그 발언에 내가 놀라 굳어 있자니, 방수정이 몸을 돌렸다가 나를 발견했다.

“강대한? 왜 여기 있어?”

“어, 그게……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뭐라고 해야 하지? 원래 하려던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까이 온 방수정의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그나마 보였다. 언제나처럼 단단한 얼굴이었다.

“방금 이야기 들었어?”

“……네.”

“그래, 들었다면 어쩔 수 없지. 걱정 마, 너희들한테는 별일 없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딴 애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너만 알고 있어.”

“……네.”

“들어가자.”

방수정이 먼저 성큼 걸어갔다.

다 해결됐다는 듯 단호하게.

결국, 하려던 인사는 말조차 꺼내 보지 못했다.

그렇게 휴가는 끝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