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상점 오픈
“죄송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류준혁이 가장 먼저 한 이야기는 그것이었다.
음향팀이 서둘러 마이크를 채우는 동안 류준혁은 방수정 PD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침 광고 촬영 끝난 직후에 내일로 출연이 미뤄졌다고 들었습니다. 대신 다른 미팅이 생겨서 그 자리에 나갔던 건데, 그게 지금 거짓말이라는 건가요?”
“저희는 촬영 일정을 바꾼 적이 없어요. 황 매니저님이 뭔가 잘못 아신 거 같은데, 연락이 아예 되지 않으셔서……. 같이 계셨던 것 아니었나요?”
“그 형은 다른 미팅이 있어서 갔거든요. 그런데 이럴 줄이야…….”
제작진에서야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정말 아무 사정도 알지 못하는 듯한 류준혁에게 이야기할 순 없었다.
방수정 PD도 같은 판단을 내린 듯 표정을 바꾸었다.
“우선은 촬영부터 하시죠. 광고 촬영이 예상보다 길어졌다고들 알고 계시니까,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류준혁은 보는 앞에서 표정이 바뀌었다. 다소 굳어 있던 얼굴에 금방 미소가 그려지더니, 그대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모셔 놓고 제가 너무 늦었죠?”
“형님, 그래도 오셔서 다행입니다. 형님 드릴 커피가 벌써 식긴 했지만요.”
“효명아, 나도 미안하니까 너무 뭐라 그러지 말자?”
파리 촬영 중에 확실히 친해진 듯 최효명이 먼저 핀잔을 주자 금세 자리는 화기애애해졌다.
류준혁이 능숙하게 자리에 끼는 모습을 모니터로 확인하고, 방수정 PD가 서브 PD에게 지시했다.
“그쪽 매니저랑 회사에 메시지 남겨놔. 류준혁 촬영 합류했다고.”
“예.”
“추가 연락 오면 무시해. 촬영 끝나고 대응할 테니까.”
그렇게 냉랭하게 말을 남긴 방수정 PD도 카페로 복귀하자, 제작진 전체에 흘렀던 긴장이 그제야 수그러들었다.
“휴우…… 큰일 날 뻔했네, 정말.”
“그러게요. 류준혁 없이 촬영 쫑내야 하나 했어요.”
어찌어찌 마지막 촬영이 성립되었다.
모니터 앞에 자리 잡고 있던 박주영 선배와 내가 겨우 선배들과 자리를 바꿔 주고 나자, 겨우 대화할 타이밍이 생겼다.
“야, 대체 어떻게 류준혁을 찾아낸 거야?”
“얼마 전에 효명이가 데려가 준 일식집, 거기 기억나세요?”
“수, 뭐였더라? 암튼 거기? 거기가 뭐?”
“그때 효명이가 류준혁 씨가 알려 준 가게라고 했거든요. 그게 생각나서, 손해 보는 셈치고 전화를 걸어봤더니…….”
“그런데 거기 진짜 류준혁 씨가 있었다고요?”
이민희가 옆에서 듣고 끼어들었다.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다고요? 로또 맞을 확률보다 더 낮을 것 같은데?”
“로또가 뭐야. 길 가다가 벼락 맞을 확률이지, 그게!”
“선배, 벼락 맞을 확률이 로또보다 높대요.”
“뭐라고? 근데 난 왜 둘 다 안 맞은 거야?”
선배가 흥분하여 소리치는 것을 보고, 이민희가 깔깔 웃어 댔다.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요. 그럴 확률을 뚫고, 대한 씨가 류준혁 씨를 찾아냈다는 게 대단한 거죠.”
다른 PD 선배들도 굉장하다는 말을 던져 주었다. 나는 그저 머쓱할 뿐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아, 코가 석 자나 자라는 건 아니겠지.
거짓말도 해 본 놈이 하는 것인 모양이다.
사실은 운이 아닌 확신이었다.
그 전화번호로 걸 경우 류준혁과 연결될 가능성은 무려 ‘97%’였으니까.
“저, 잠깐 화장실 좀.”
“그래그래. 큰일 했는데 얼마든지 다녀와.”
박주영 선배가 놀리듯 이야기하자 선배들도 웃으면서 손짓했다. 나도 따라 웃으면서 카페가 있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화장실에 온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혼자 있을 곳이 필요했을 뿐.
화장실 문을 잠그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읽지 않은 푸시가 있었다. 좀 전 수해랑과 통화하면서 받은 푸시였다.
[‘배우 류준혁과 통화가 가능한 번호 찾기 확률’의 100%를 달성하였습니다.]
[필요 포인트를 충족하였습니다.]
[‘상점’이 오픈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상점’에서 확인해 주세요.]
‘100%’를 달성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속된 푸시는 새로운 사실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상점’ 카테고리를 터치했다.
[‘상점’에 처음으로 방문하셨습니다.]
[‘상점’에서는 적립한 포인트를 이용하여 ‘확률 보기’에 필요한 아이템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2,109P/2,109P]
[편리한 ‘상점’ 이용으로 보다 정확한 ‘확률’을 기록해 보세요.]
간단한 설명 아래로 현재 구입 가능한 아이템들이 떠 있었다.
[객관식: 확률 보기 개수를 일시적으로 늘린다.]
[변수 보기: 확률 변동에 필요한 변수를 보여 준다.]
[너 자신을 알라: 부족 확률에 대한 원인 변수를 알려 준다.]
.
.
.
[적립 포인트 부족으로 정보를 열람할 수 없는 아이템입니다.]
줄줄 적혀 있었지만, 개중에는 현재 포인트가 부족하다고 오픈되지 않은 아이템이 대다수였다.
적립 포인트랑 사용 가능 포인트가 나뉜다는 건, 적립 포인트는 계속 누적되는 기록인 모양이다.
그 적립 포인트가 일정량 쌓일 때마다 아이템들이 해금되는 방식인 듯했다.
소싯적에 게임 좀 해 본 게 이런 이해도에서 도움이 되다니.
어쨌든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사는 막내PD에게는 현질 없이 서비스가 이용 가능하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몇 번 더 상점을 훑어보면서 정보를 파악했다.
좀 전처럼 류준혁에게 닿을 번호가 필요한 경우에는 ‘객관식’ 아이템을 써서 동시에 몇 개의 전화번호의 확률을 볼 수 있을 듯했고,
편집한 영상이 마음에 안 들 때는 ‘변수 보기’를 통해서 어떤 점을 수정해야 영상이 좋아질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을 듯했다.
“기회가 되면 써 봐야겠다.”
10화와 최종화의 클립 편집이 아직 남아 있다. AGD 앱을 활용할 기회는 아직 많았다.
똑똑똑.
한참 AGD 앱을 살피고 있는데, 화장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야, 강대한! 안에 있냐?”
박주영 선배였다.
“어, 네!”
“뭐야, 변비냐? 빨리 나와! 메이킹 찍어야 해!”
생각보다 오래 화장실에 있었나 보다.
“나갑니다!”
괜히 물 내리는 소리를 내주고, 화장실을 나왔다.
촬영은 거의 막바지에 들어가고 있었다.
류준혁이 늦게 합류하긴 해서 그의 촬영 분량은 사실상 별로 나오지 못할 듯했다.
하지만 카페 대여 시간도 있고, 또 다른 출연진들의 스케줄도 있어서 정해진 시간에 촬영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와 함께, 카페 앞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단체 사진 촬영까지 마쳤다.
메이킹 촬영을 맡은 사진사가 사진을 확인하고 오케이 표시를 해 준 것과 동시에,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
“수고했어요!”
방수정 PD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공식적인 <당잠사> 시즌2의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출연진들이 인사를 나누고, 바쁜 분들은 금세 차를 타고 현장을 떠났다.
“형, 저도 가 볼게요!”
“그래, 수고했어. 아니지, 오늘 더 수고해야 하지?”
“하하하하! 그러게요!”
듣자 하니 최효명은 곧바로 신곡 미팅이 잡혀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나오는, 또 기대의 새 싱글이다 보니 기합이 팍팍 들어가 있었다.
‘연락 드릴게요!’라며 인사를 남겨 놓고 떠나는 최효명의 차를 배웅하고 돌아서자, 출연진 중 마지막까지 남은 류준혁이 보였다.
그는 방수정 PD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촬영 기재를 정리하면서 대충 들어 보니, 연락 미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훈이 형이 그런 걸 속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속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뭔가 착오가 있던 거겠죠.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안 되니 단단히 회사에 주의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방수정 PD의 표정이 냉랭한 걸 봐서는, 저건 진심이 아니다.
이따금 봤던 표정이다. 내키지 않는 이야기를 억지로 할 때의 표정.
류준혁도 모르진 않는 걸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심각하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때였다.
카페가 있는 골목으로, 검은 세단 하나가 난폭하게 들어섰다.
“준혁아!”
거기서 내린 것은 황대훈 매니저였다. 예의 건달 같은 인상 그대로였는데, 지금은 그 얼굴에 망했다는 감정이 그림으로 그린 듯 떠올라 있었다.
방수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류준혁이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방수정을 보았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들어가 보세요.”
제작진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류준혁. 황대훈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 제작진을 쳐다보다, 다시 안절부절못했다.
“주, 준혁아, 그게…….”
“일단 가. 이야기는 가서 들을 테니.”
차갑게 내뱉고서 류준혁은 먼저 조수석에 올랐다.
황대훈은 결국 마지막까지 허둥지둥하다가, 방수정 PD가 가 보시라는 듯 손짓을 하고 나서야 욕을 하면서 운전석에 올랐다.
세단은 금방 골목을 돌아 나가 사라졌다.
“후우. 허둥대는 걸 보니 좀 속이 시원하네.”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치사하게 나왔으니 류준혁 씨가 이번에 제대로 한 소리 해 줬으면 좋겠다.”
방수정 PD와 유수현 작가는 그 광경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방수정 PD가 나를 발견했다.
바로 옆에서 카메라 감독을 도와 선을 정리하고 있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대한아. 훌륭했어, 오늘. 너 아니었으면 촬영이 많이 꼬였을 거야.”
“아…… 아뇨.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방수정은 그렇게 말하고서, 흔하지 않은 미소를 보였다.
나도 절로 마음이 가벼워져서 나도 모르게 말을 붙였다.
“류준혁 씨는 괜찮을까요? 그, 매니저분하고…….”
“류준혁이 한두 해 연예계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알아서 잘하겠지. 잠시 좀 시끄러울 수는 있어도 금방 나아질 거야. 우리한테만 피해만 안 오면 돼.”
그건 그렇다.
남 걱정하기에는 당장 남은 우리 일정이 더 급하니까.
“방송 만들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야. 그때마다 일희일비할 필욘 없어. 아무튼, 오늘 수고했어.”
“예.”
방수정은 곧장 현장 지휘에 나섰다.
촬영이 끝났다고 해서 제작진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당장 남은 뒷정리, 그리고 방영을 위한 편집, 편성 등등.
해야 할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우리는 최종화 방영까지 열심히 작업했다.
그리고 최종화가 방영되는 금요일 오전.
놀라운 기사가 떴다.
『배우 류준혁, 소속사와 결별 선언』
* * *
배우 류준혁.
20대 초반 모델로 활동하던 그는 피팅 모델 촬영장에서 우연히 감독의 눈에 띄어 CF를 찍게 된다.
그 CF가 인기를 끌면서 단숨에 이름을 알린 그는, 대형 소속사와의 계약으로 단숨에 A급 배우가 되었다.
드라마, 영화 할 것 없이 찍는 족족 히트. 그렇게 주연급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나서는 소속사를 나와 당시 매니저와 공동으로 회사를 차렸다.
그 회사를 크게 키우고, 배우로 자리를 잡은 후로는 이렇다 할 방송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그 이면에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그게 이번에 터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회사 사장이랑 매니저가, 준혁이 형님이 모르는 사이에 장난을 쳐 놓은 것들이 많았다네요? 방송 활동을 못한 것도 몸값 요구를 뒤에서 노골적으로 해서 무산됐던 거라고……. 그런 게 줄줄이 걸려서, 더 이상 연을 이어갈 수 없겠다 판단했다나 봐요.”
유하고 자상한 이미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칼 같을 때는 정말 칼 같은 사람인가 보다.
난 새삼 류준혁이라는 배우를 다시 보면서 남은 맥주를 비웠다.
“한 잔 더 할까요?”
나는 묵묵히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이곳은 상암의 한 소고깃집.
<당잠사2> 최종화가 최고 시청률 14.7%를 기록하면서 막을 내린 후, 그걸 기념하고자 효명이와 술자리를 약속했다.
이전 ‘인연’ 음원 발매 때 효명이가 한우를 사겠다고 약속한 것도 있어서였는데, 서로 축하한다는 말을 나누다 보니 필연적으로 류준혁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짠―
새로 나온 맥주 두 잔을 부딪치면서 물었다.
“넌 그 이야기를 다 어디서 들었냐.”
효명이가 나보다 더 정보가 빠를 순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무척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가령, 그 회사가 류준혁을 빛내기 위해 다른 배우나 연예인을 비방하는 찌라시를 돌린 적도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은.
“음…….”
효명이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개인실임에도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건 비밀인데요, 형.”
“그래.”
“저희 회사에서 준혁이 형님을 영입해 보려고 하고 있어요. 저도 <당잠사>하면서 좀 친해졌고 하니 한번 만나 보라고 해서, 그저께 얼굴 뵙고 왔거든요.”
“플래티넘이? 류준혁을?”
플래티넘이 배우 쪽에 주력하고 싶어 하는 건 익히 안다.
그 덕분에 엑시트가 다소 뒷전으로 밀려났었으니까.
지금이야 완전히 바뀌어서 엑시트에 대한 회사의 지원이 늘었지만, 플래티넘 사장의 욕심은 여전한 모양이다.
“하긴…… 류준혁 배우 정도면 어디든 난리치겠지. 효명이 네가 봤을 땐 어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상처받으신 것도 있는 모양이고. 담담해 보이긴 했는데 당분간은 머릿속을 정리하고만 싶다고 하셨거든요.”
하지만 플래티넘에서는 그렇게 보고해도 그래도 한 번 더 만나 보라며 보채는 중이라는 모양이다.
“거참. 그런 일은 회사에서 알아서 해야지, 새 싱글 준비하는 너한테 보챌 일이 아닌데 말이야.”
효명이도 사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거다.
그는 면목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고마워요. 뭐, 그래도 준혁이 형님이 우리 회사로 와 주면 저도 좋으니까, 한 번 더 말은 해 보려고요.”
“그래…… 뭐, 우리도 그분이 빨리 자리를 잡는 게 도움이 되지.”
소고기를 한 점 주워 먹던 효명이가 아차 하는 얼굴로 물어왔다.
“아, 진짜예요? 시즌3 바로 들어간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