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257화.
세트나크는 죽음과 언데드의 신으로서의 체통을 내려놓고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다녔기에 이런 괴물이 완성된 것이지……!?]
“우오랴아아아아아아아!”
정시우가 근본을 알 수 없는 기합과 함께 망치를 내지를 때마다 그 앞에 놓인 모든 것이 박살 났다.
성의 계단, 떨어져 내리는 샹들리에, 그 위에 숨어 있던 유령 부대, 갑옷인 것 마냥 위장하고 있던 리빙 아머, 그 안에 숨어 있던 데스 나이트, 마룻바닥, 그 밑에 잔뜩 묻혀 있던 구울, 놈들 사이에 독을 품고 숨어 있던 포이즌 고스트.
그 모두가 망치 한 방이면 깨끗하게 소멸되었다. 정시우의 손에 들린 것이 지우개가 아니라 망치라는 것을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였다.
[물리적인 공격인 것처럼 행세하며 내지른 단순한 공격에 혼과 마나까지 모두 소멸하니, 너는 이미 신에 이른 것이 아니냐? 그도 아니라면 용이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냐. 지금 중요한 건…….”
정시우는 재차 해머를 내던져 1층 로비 벽에 걸려 있던 거대한 그림을 통째로 깨부수며 외쳤다.
“네가 나를 화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거 써먹을 부분이 어긋난 것 같은데요!”
정시우가 폭주기관차처럼 빠르게 성을 나아가니, 숨 막히게 질주하는 정시우를 따라잡아야 하는 일행만 죽어나고 있었다. 정시우가 대다수의 몹을 처리한다 해도 그 자리에 남는 것만으로도 일행에게는 딱 좋은 지옥의 현장이 되었으니까!
분명 헤데아, 뒤세느와의 일전을 치를 때만 해도 저 정도로 강해지지는 않았는데 대체 뭔 짓을 어떻게 했단 말인가! 분노인가, 분노가 그를 강하게 하고 있단 말인가!
“역시…… 큭, 형님은 사이어인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말할 시간에 창을 한 번 더 내질러라!]
지금은 세트나크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츠러들 시간도 없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사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를 한 마리라도 더 눕혀야 했다. 아직 실전이 부족했던 마리나 일행에게는 딱 좋은 성장의 기회였지만, 이러다가는 너무 빠르게 성장해서 몸이 터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시우, 시우 2층 올라간다!”
“전담 힐러는 대동하고 가야죠, 오빠아아아!”
“쫓습니다! 형님의 틈이 언제 드러날지 모르니까!”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케이나가 대검과 한 몸을 이루며 바이크를 발진시켰다. 그녀의 마나를 절반 이상 담아낸 돌진기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세트나크의 권속들이 깔끔하게 소멸했다. 일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를 따라잡으려 마주 돌진했다.
[본인뿐만이 아냐. 다스리는 대상 모두가 신을 넘볼 수 있게끔 권능을 발현하다니, 과연 헥토가 탐을 낼 만했군.]
세트나크는 그저 기가 막혀 웃었다. 그는 정시우의 능력의 본질은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했으나, 정시우의 집념과 의기만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실로 재미있어. 나도 그에 응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바로 그 순간 본성에 가해지는 압력이 대번에 늘어났다. 악령이나 구울 따위의 적들이 품은 힘 또한 상승했다. 군단의 신 뒤세느도 명함을 못 내밀 법한 집단강화! 물론 정시우는 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든 별 관심이 없었다.
“흠, 흐으으음……?”
단지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놈이 능력을 발현한 방식이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압박도 그렇고 언데드들이 대번에 강화된 것도 그렇고, 한 가지 세트나크의 정체에 대한 가설이 떠오른 것이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선…….”
정시우는 맨 처음 세트나크의 성에 침입할 때, 자신이 힘껏 휘두른 망치에도 정문만이 무너지고 나머지 부분은 버텨 냈던 것을 생각하며 망치를 굳세게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일행에게 고했다.
“성을 다 때려 부숴!”
“맡겨다오!”
엘이 씩씩하게 대꾸하며 바닥에 자신의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일대에서 치솟는 끔찍한 양의 돌가시! 복도 하나가 그대로 폭삭 무너져 내렸다. 언데드들도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었다.
“너희들도 그냥 전부 다 부숴 버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성을 주저앉힌다고 생각해!”
“역시 파괴자의 이름에 걸맞은 명령이네요…….”
수아린이 어이없어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일행은 실로 화끈하게 정시우의 지시를 이행했다.
물론 세트나크의 성은 그들이 여태까지 겪어 온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굳건했으나 한 명 한 명 신의 경지를 넘어선 일행 앞에서 언제까지고 단단하게 버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정시우 본인이 가장 거세게 날뛰며 세트나크의 기운을 대폭 꺾어 버리고 있었다!
정시우는 생각한 것이다. 세트나크의 힘이 이 성을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혹시 세트나크의 본체는 이 성 그 자체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마 진실에 제법 근접한 생각일 터였다.
[그대로는 곤란하다.]
그들이 지하를 완전히 매장해 버리고 1층과 2층도 비슷한 꼴로 만들었을 즈음 비로소 세트나크의 반응이 돌아왔다. 3층 너머의 영역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수백 규모의 죽음의 기사! 한 명 한 명이 수만 년 세월 속에 강화된 세트나크의 진정한 정예부대였다.
[세트나크 님의 명을 받든다.]
[그대들을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겠다.]
[우리는 그분의 검이며 방패.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너희를 잠들게 하신다.]
“으랏차!”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정시우는 머리 위에서 떨어져 오는 데스나이트들을 발견하고는 일단 망치를 가장 거대하게 만들어 한 방 크게 후려쳤다. 무수한 스킬을 순간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우리만치 짧은 시간에 조합하여 완성시킨, 필살의 일격이었다.
[카학!?]
거신의 분노와 함께 발현된 마스터 레벨의 타격전이로 인해 망치에 얻어맞은 데스나이트들을 중심으로 끔찍한 파괴의 파동이 불처럼 번져 나가며 끝내 전원을 타격했다. 마치 죽은 박쥐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데스나이트들의 모습에 일행이 질겁했다.
[강력하다. 실로 강력해! 헥토를 보는 것만 같다!]
“그 새끼 얘긴…… 하지 말랬지!”
정시우는 그대로 해머를 회전시켜 바닥을 내려쳤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구멍이 움푹 파이며, 바닥에 뻗어 쥐새끼처럼 꿈틀거리던 데스나이트들이 일제히 지하로 떨어졌다. 거대한 마나의 폭발에 실로 눈이 부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어째서 죽음의 신인지, 그러고 보면 너는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세트나크가 준비한 술식이 발동했다. 그 자체로 죽음을 상징하는 죽음의 기사들을 수백이나 동원해 한자리에 모아, 비로소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대한 죽음의 덫이 성을 뒤덮었다!
“큭!?”
“꺄아악!?”
세리아와 용세하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그들의 시야를 더러운 암흑이 뒤덮고, 그들의 순백의 정신을 범하고자 했다!
이서희가 결계를, 수아린이 신성력을 발해 어떻게든 그것을 몰아내고자 했으나 죽음의 신 본인이 작정하고 펼쳐 낸 능력을 쉬이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이 자식이…….”
비록 정시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는 세트나크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대번에 파악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품은 자가수호의 힘은 실체 따위 없는 죽음의 공포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행은 얘기가 다른 것이다!
[너를 수호하고 있는 그 힘, 어디까지나 필멸자에 불과한 네 수하들까지 모두 감쌀 수 있을까? 그들을 지키느라 너의 힘이 부족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을…….”
그런데 곧장 해머를 내던져 어떻게든 술식을 무마하려던 그때, 문득 정시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다른 누구의 조력도 없이 그것이 가능할까, 생각했으나 답은 제법 긍정적이었다.
정시우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채인 소울 포스를 향했다. 물론 이제 그가 다루는 유령들이 전투에 도움이 될 시기는 한참 지났으니, 스킬을 써먹은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그 안에 담긴 힘은 여전하다.
“좋아.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소울 포스의 문신이 반짝였다. 그와 함께 그의 고유능력 지배가 발동했다. 고유능력의 대상은…… 바로 정시우와 일행을 무저갱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죽음의 술식 그 자체였다.
[음?]
세트나크가 당황했다. 아마도 정시우가 이 성에 침입한 이래 가장 큰 당황이었다.
[너는 지금…… 무슨 시도를 하는 것이지?]
그가 능력을 발휘한다면, 당연히 일행을 감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시우는 딴판이었다. 그는 동료를 믿었다. 그의 자가수호는 지배를 통해 연결된 대상 모두를 충분히 지켜 줄 수 있을 터였다. 비록 조금 힘들고 괴로울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버텨 낼 수 있으리라!
“세트나크, 너는 신으로서의 격과 보다 강한 능력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타고난 형체를 버렸지.”
[그렇다. 나의 본질은 이 성조차 아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공포 그 자체. 물론 네가 나의 힘이 크게 깃든 이 성을 모두 부수는 데 성공한다면 제법 타격을 입기는 하겠지. 그러나 그것으로도 나를 소멸시킬 수는 없다. 다른 신 모두가 나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 까닭이다.]
“그렇기에 너를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것은 너뿐이다. 네가 지닌 죽음의 힘이 아니고서는, 죽음을 물리칠 수는 없는 거야.”
[설마…… 내 힘을 내 눈앞에서 뺏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어이가 없어 반문하는 세트나크를 무시하며 정시우는 소울 포스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과거 세트나크에게서 뽑아내 정시우가 단련한 힘. 영혼을 다루는 힘이다. 그는 그것을 힘껏 발동하며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스 포스 같은 걸로 할 걸 그랬어.”
하지만 지금도 그리 늦지 않다. 사후에 남는 영혼을 다루는 소울 포스는 동시에 죽음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으니까. 정시우는 후우, 심호흡과 함께 드레인을 발동했다.
수백의 죽음의 기사로부터 비롯되어 성을 가득 채우고 있던 죽음의 안개가 그것에 반응해 꿈틀거렸다.
[놈, 설마…….]
“죽어라, 세트나크.”
[고유능력 지배가 Lv9가 되었습니다.]
자가수호는 소유주가 하는 모든 일에 가호를 준다. 그것은 그 스스로의 신념에서 비롯된 가호. 스스로 생각한 것을 진실로 만드는 힘은, 실로 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힘이다.
소울 포스와 드레인, 지배가 동시에 발동해 세트나크와 죽음을 갈라놓았다. 죽음의 안개는 서서히 정시우에게 순응해, 그의 문신으로 몰려들었다. 세트나크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경악하고 말았다.
[이것은, 이 힘은, 이 권능은……! 신도, 용도 아니지 않은가……!]
“처음부터 아니라고 했잖아, 새꺄.”
정시우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세트나크가 위기의식을 갖고 성 내의 모든 존재의 적의를 정시우에게 집중시켰으나 그것은 죽음의 안개에서 해방된 나머지 일행이 막아섰다.
좋아, 역시 데려오길 잘했어. 정시우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이 없었으면 세트나크가 이렇게 죽음의 술식을 발동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방금 굉장히 미끼 취급을 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만!”
“환각이야. 그럼 간다, 세트나크! 뒈져라!”
비록 일순간에 불과하나 죽음이 정시우에게 복종했다. 정시우는 그것에게 본래의 주인을 참할 것을 명했다. 죽음은 그것을 무척 재미나겠다며 받아들였다.
[후. 죽음의 주인을 칭하는 주제에, 너무 오래 살았던가.]
세트나크는 죽음의 이면이다. 죽음의 선택을 부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끝내 웃고 말았다.
[너라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세상을 지켜 낼 수 있을 터. 걱정은 없다.]
“아, 빨리 죽어라 좀.”
정시우의 전신에서 빛이 터져 나온 다음 순간, 성이 깔끔하게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세트나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