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256화.
정시우는 애초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위존재니 상위존재니, 하위세계니 상위세계니, 신이니 용이니 하는 것들. 이놈들 전부 너무 형태에만 구애되지 않느냐 이거다.
‘물론 외관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첫 번째 수단인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 해서 본인이 타고난 것을 부정해 가며 나아갈 필요는 없잖아.’
자가수호 스킬을 얻고, 최소한 광룡이 만들어 낸 시스템 상으로는 상위존재라는 것이 되었다고 임명을 땅땅 받은 상황이 되었지만 정시우는 여전히 겉으로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 수백 번의 레벨 업을 거치고, 어지간한 신은 쌈 싸 먹을 만큼 강대한 마나를 본신에 쌓으며 그의 체형이나 얼굴도 상당히 미형으로 거듭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본판 불변의 법칙이 어디로 갈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잘 생겼었다는 얘기다.
“음!? 갑자기 어디선가 재수 없는 기척이……!”
“더 자렴.”
특히 정시우와 다른 상위존재…… 신과 용, 사이에 있어 구분할 만한 점이 있다면 정시우의 본신은 여전히 조그마한 인간 사이즈 그대로라는 것이다.
자그마한 본신 안에 다른 존재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막대한 마나를 쌓고, 그 외에 그의 지배에 따르는 마나로 마신을 구축한다. 그것이 지금 정시우의 상태였다. 마신과 본신의 싱크로율은 이미 100%에 근접하는 상태이니, 그 어떤 신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언제든 마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면, 본신마저 애써 부풀릴 필요는 없지.’
그렇다면, 언제든 마나를 되찾을 수 있다면 굳이 마나를 항상 몸에 쌓고 다닐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지금 이 많은 마나를 품은 상태로 하위세계로 돌아갈 수가 없다면, 어차피 자신의 것이며 도망갈 필요도 없는 마나를 잠시 다른 데에 넣어 놓고 움직이면 되는 것이 아닐까…….
“오빠아아…… 야압. 합.”
정시우는 퍼뜩 떠오른 그 생각에 골몰했으나, 이미 완전히 잠이 깨 버린 수아린이 어린애마냥 그에게 달라붙으며 장난을 쳤기에 곧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내가 아빠냐? 아빠야?”
“그럼요, 언젠가 태어날 우리 아이의 아…….”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수아린이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다. 이래서 여자는 무섭다. 정시우는 수아린에게 정식으로 사과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나에 대해서는 어차피 지금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 모든 적을 쳐부순 다음에 해결해도 충분했다.
“애들은 다들 돌아왔어?”
“저기서 자고 있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일행 전원이 여기저기 뻗어 자고 있었다. 아마도 밖에 나가 다른 신을 상대하고 왔을 마리나와 세리아, 이서희까지도. 모르긴 몰라도 전원,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레벨 업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피로가 제법 쌓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애들 일어나는 대로 신 잡으러 가자.”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오빠 같으니…… 그러면 우리 그동안 엄한 짓 해요.”
“미안하다고 했잖아.”
본인 입으로 엄한 짓이라고 말하는 시점에서 끝장난 것이 아닐까, 정시우는 조심스레 생각했지만 무서웠기 때문에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내 수아린의 볼이 볼록하니 부풀어 오른 것이 보였다.
“오빠 바보.”
“대체 뭐가 불안해서 그래?”
“오빠랑 용세하 씨랑만 떠나올 때는 완전히 이겼다! 신랑 쟁탈전 끝! 같은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다시 여럿이서 막 붙으니까.”
대충 그런 이유에서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정시우도 대체 저 여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곤란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수아린 앞에서 보일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 헥토의 무덤 위에서 너와의 결혼식을 올릴 테니까.”
“지금 그거 프로포즈라고 한 거 아니죠? 그런 말뿐인 약속은 됐으니까 지금 당장 도장, 도장 찍어 둘래요오.”
정시우가 필사적으로 수아린을 말리는 사이 가장 먼저 용세하가 일어났다. 그러나 용세하는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는 쳇, 작게 혀를 차며 다시 돌아누웠다.
“야!”
“쿨쿨…….”
“야……!”
용세하에 이어 일어난 케이나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다만 그녀는 노골적으로 눈꼴 시리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째선지 자는 척 하는 용세하 바로 옆에 눕는 것이 아닌가. 용세하가 움찔거리는 것이 제법 웃겼다.
“……!?”
[쿨쿨…….]
“너 원래 잘 때 그런 소리 안 내잖아!”
정시우와 수아린의 실랑이는 에리우가 일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진압되었다. 그로부터 몇 분이 흘러 다들 타이밍 좋게 일어난 덕분에, 정시우는 이제부터 그들이 행할 일들에 대한 대략적인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신과 싸우는 경험은 어땠어? 제법 적응은 됐어?”
“짜릿했어!”
“시우 님께선 그 끔찍한 현장을 몇 번이고 겪어 오신 겁니까? 물론 시우 님께서 주신 힘 덕분에 어찌어찌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는 있었지만, 그들과 저희의 격의 차이만은 어쩔 수가 없어 심적 부담감이 터무니없이 크더군요…….”
“하지만 옆에 시우가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음, 이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셋 다 순조로이 성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녀석들이 최전선에 설 필요는 없을 테니까.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 자잘한 신들이 몇 남았지만 이것들은 나중에 정리하면 돼. 굳이 다 죽일 필요도 없고. 자, 그러면 지금 남는 가장 중대한 적은 둘이다.”
“둘?”
[아…….]
다른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과는 달리 케이나만은 알겠다는 듯 미약한 신음을 냈다. 정시우가 고개를 끄덕여 주자 케이나가 조심스레 태클을 걸었다.
[그는…… 아마 현상의 유지를 원할 것이다, 주인님. 굳이 그와 싸워 우리 전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을까?]
“우리 전력이 약화가 될 리가 없잖아. 쳐 죽이고 강해질 건데.”
[주인님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누군데? 누구 잡으러 가는 건데? 혹시 내가 아는 놈이야?”
마리나가 끈덕지게 추궁했다. 정시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랑 나뿐만 아니라, 세리아도.”
“……아.”
그것으로 상황파악이 끝났다. 세리아가 제법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트나크로군요.”
“맞아. 참고로 루이오스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다른 놈한테 당했더라. 세트나크 입장에선 지금이 딱 좋겠지.”
“루이오스…… 놈을 직접 만나지 못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만이라고 해야 할지…….”
세트나크. 죽음과 언데드의 신으로, 무려 세상 진리의 절반을 담당하는 만큼 헤데아만큼이나, 혹은 헤데아보다도 강대한 신 중 하나로 신들 사이에서도 경외를 사던 신이다.
오직 놈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루이오스만이 그를 공공연히 대적하고 있었으나 지난 신들의 전쟁에서 재수 없게 죽어 버리는 바람에 세트나크의 지위는 무소불위의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놈은 전쟁에 발을 들이밀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조용히 침잠하고 있었지. 어부지리를 노리고 싶은 건지, 그저 죽음이 많이 일어나기만 하면 좋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터무니없이 불안한 요소지. 따라서 헥토와 싸우기 전에 이놈을 먼저 치워 놔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래서 본심은?”
“이 새끼 마음에 안 드니까 죽이러 가자.”
“그럴 것 같더라니…….”
세트나크는 예전에도 정시우에게 툭툭 시비를 걸었었던 놈이다. 73마성에서의 굴욕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했다. 정시우도 군자답게 원한을 언제까지고 잊지 않는 구질구질한 성격이었다.
결국 엣 주인에 대한 공포를 품고 있던 케이나마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만약 내가 죽기라도 하면 밤마다 주인님 꿈속에 처녀귀신으로 나타나 괴롭혀 주마.]
“어?”
“호오…….”
[……앗!]
그렇게 수아린을 놀리더니 꼴좋다. 정시우는 용세하와 수아린의 시선을 동시에 받고 침몰한 케이나의 명복을 빌어 주며 만상만화경을 발동했다.
“바로 갈 거야. 아마 놈도 대충 방비는 하고 있을지도 몰라. 무서워할 건 없어. 놈 본인을 상대하기보단 쫄따구들을 상대한다고 생각해. 놈은 내가 막을 테니까.”
[주인님, 잠시만 내 멘탈을 수습하고 가면 안 되겠는가?]
“응, 안 돼.”
[큭!]
바로 그 순간 만상만화경이 발동되었다. 아주 조용히 그들을 집어삼킨 빛은 곧 그들을 우중충한 하늘 아래 거대한 고성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정시우는 잠시 기가 막혀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중얼거렸다.
“73마성이랑 비슷한 분위기잖아.”
[놈의 취향이 아니겠는가.]
악취미도 분수가 있다. 정시우는 대뜸 해머를 꺼내어 휘둘렀다. 마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 상태에서도 거대했던 해머가 더더욱 거대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성의 정문을 폭삭 주저앉혔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역시 세트나크, 마력이 터무니없네.”
“헥토와 싸우는 연습을 한다 생각하고 들어가죠.”
[후……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군.]
수아린은 전원에게 사기에 저항할 수 있는 축복을 걸고, 용세하는 랜스를 치켜들었으며, 케이나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고, 마리나는 쌍권총을 빼 들었다.
세리아의 양손에 마력이 집중되어 빛을 발하고, 이서희는 결계를 준비했으며, 에리우는 전신을 강철과 같이 단단하게 만드는가 하면 세이락시아만은 멀뚱멀뚱 눈을 깜박였다.
“잘 할 수 있지?”
“뿌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락시아. 정시우는 씩 웃으며 돌격했다.
“세트나크, 싸우자!”
[키히이이이이이이이이!]
[세트나크 님의 본성에 침입자다! 침입자!]
과연 언데드의 신답게, 세트나크는 다른 신들이 보고 기겁할 만큼 많은 숫자의 권속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다른 권속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 능력을 지닌 엘리트! 유령이나 해골, 그 모두가 73마성에 나타났던 것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는 있었으나 덩치도 그렇고 그 몸에 지닌 격은 정시우가 기겁할 정도였다.
“너 이 새끼…….”
[선물은 마음에 드는가? 너희가 신나게 벌인 축제의 뒷정리를 하고 얻은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세트나크의 목소리는 무척 얄미웠다. 지금 그는 정시우 일행이 신들과 쌈박질을 하고 다닐 때, 미처 수거하지 못한 다른 신들의 권속을 거두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시우는 대부분 깔끔하게 처리(식사)를 했으니, 아마도 칠칠맞지 못한 다른 신들이 흘린 것들을 주워 온 것이겠지.
[어서 와라, 정시우. 나는 네가 언젠가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나도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지만 말이야.]
“너는 헥토에 대해 알고 있었구나.”
[그것은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오면 얘기해 주지.]
어쩌면 이렇게 한 마디 한 마디 사람을 거슬리게 한단 말인가. 그래, 좋다. 정시우는 낮게 웃으며 해머를 다시 들었다. 독염이 위협적으로 타올라 해머 전체를 감쌌다.
“바로 가 주지.”
정시우가 해머를 내던졌다. 내성 안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던 유령과 해골들, 죽음의 기사, 목이 없는 기사, 반시 따위의 언데드들이 끔찍한 비명과 함께 망치로 빨려 들어가, 독염에 타 소멸했다. 물론 마스터 레벨의 드레인의 위용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 신의 권속에 준하는 능력을 지닌 언데드들 수천 마리가 순식간에 지워진 것이다!
“……우리 필요 없는 거 아냐?”
“전 언제나 그런 의문과 함께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
마리나가 어이없어 중얼거리는 말에 용세하가 씩씩하게 대꾸하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형님이 자만하고 계시는 한 반드시 틈은 생겨납니다. 우리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의 군단은 아닌 것 같아…….”
일행 중 누군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가운데, 단단히 열 받은 정시우가 되돌아온 해머를 굳세게 쥐며 앞으로 다시 한 발짝 내딛었다. 누가 용사이고 누가 마왕인지 모를 결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