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255화.
“우리는 엄청나게 고생하면서 성장했는데 이 사람들만 너무 편한 것 아닌가?”
에리우가 투덜거렸다. 지금 그녀는 실시간으로 마리나 일행의 키가 쑥쑥 자라 100미터, 1킬로미터, 10킬로미터를 돌파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른 일행의 덩치를 따라잡는 것도 금방이리라. 그러나 정시우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너희랑 동일한 수준으로 강해지지는 못하지. 그나마 다행한 건 이 녀석들이 전부 마력을 다루는 능력을 중점적으로 성장시켰다는 거야. 그런 만큼 직접 육탄전을 벌이는 너희보다는 내가 격을 보태어 줄 수 있는 부분이 크지.”
“그렇게 말해도 잘 못 알아듣는다.”
“상성이 좋다는 거야.”
“그 설명은 괜히 열 받는군. 나와 슈의 상성이 좋지 않다는 것 같지 않은가.”
마리나 일행의 난입에 수아린만 불편해하는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에리우도 그리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태까지 수아린과 세이락시아만 견제하다가 갑자기 다른 여자가 셋이나 늘어났으니!
“뿌이이이.”
“으아아아, 멀미가 너무 심해.”
“우, 우웨에에엑.”
정시우의 지배 능력이 성장하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쉽게 그녀들을 급성장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동은 마리나와 세리아, 이서희 본인이 견뎌 내야만 했다. 정시우는 자신의 마나로 녀석들을 보듬어 주며 달랬다.
“조금만 더 참아.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으응, 으우우…….”
“그런데 슈, 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에리우가 다시 물었다. 마리나 일행의 성장을 위해 이 세상에 체류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정시우는 한 손으로 수아린의 날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그녀가 아직까지 모르는 인간들만의 애정표현인 것인가?
“이건 하늘성 탐색.”
“이런 걸로 탐색이 되나요……?”
“너희와 하늘성을 잇는 기관이잖아. 당연히 되지.”
정시우는 자신은 하늘성으로부터 벗어나도, 굳이 일행을 하늘성에서 완전히 떼어 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늘성의 시스템으로 얻는 혜택을 모두 뿌리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수아린이 달고 있는 날개가 예쁘기도 했으니까. 설혹 자신은 부정하더라도, 하늘성을 뿌리 끝까지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무척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닫게 되었다.
“왜요? 헥토가 정말로 요정상인들을 통해 하늘성에 간섭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 우리가 플레이어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나게 위험한 것 아닐까요?”
“그 정도로 헥토의 영향력이 크지는 않아.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할 수 있었으면 이미 진즉 헥토가 모든 것을 차지했겠지. 다만…… 그래, 우리에 대한 정보가 조금쯤은 빠져나갔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지금 오빠는 그걸 차단하려고 하시는 거군요?”
“아니.”
정시우는 수아린의 말에 왜 그럴 필요가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하늘성의 지배권을 빼앗아 오려고.”
“아하!”
수아린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납득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귀신같이 얼굴을 굳히며 날개를 마구 퍼덕여 정시우를 때렸다.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아무한테도 설명 안 하고 진행하고 있었단 말이에욧!”
“미안, 아린이가 화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만.”
“그런다고 그냥 안 넘어가거든욧!”
언제나와 같은 커플염장이었으나 그것을 처음 본 마리나 일행은 멘탈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정시우는 수아린의 날개를 다시 부드럽게 붙잡으며 일행 모두에게 설명했다.
“이전 같았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지배가 성장하고 능력범위가 확장되면서…… 또, 지배라는 특성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던 힘을 포기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뭐 그냥 가능할 것 같아.”
“중요한 부분을 얼버무리시네요.”
“꼬우면 너도 고유능력을 각성하렴.”
“뿌이!”
정시우의 작업은 그로부터 한참 계속되었다. 사실 일행은 하늘성의 지배권을 빼앗아 온다는 말을 아직까지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내 그들의 날개에 반응이 왔다.
“어?”
“음?”
“어으으으……?”
아직까지 플레이어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 전원이 동시에 비슷한 반응을 보이니 무척 재미있었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방금, 날개에 전기가 흐른 듯한 느낌이…… 뭔가가 바뀐 듯한, 바뀌지 않은 듯한…….”
“한순간이지만 확실히 느꼈습니다. 전원 코드를 바꿔 끼운 듯한 느낌을…….”
“아, 그거다!”
정시우는 비로소 수아린의 날개에서 손을 떼어 놓았다. 수아린이 살짝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했다. 그는 하늘성의 지배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얻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으으으으, 이거 만만히 볼 일이 아니었어. 당장 나한테 필요 없는 정보는 전부 보류……!”
“정말 완료하신 겁니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나요!?”
“헥토인지 벡터맨인지 하는 놈이 방해하지 않았어!?”
작업을 마친 정시우에게 일행이 달려들었으나 그는 머릿속을 보다 깔끔하게 정리한 후에야 그들의 질문에 답해 줄 수 있었다. 답은 간단했다.
“하늘성은 누구의 것도 아냐. 굳이 따지자면 하늘성을 만든 광룡의 것이었지만, 그는 시스템을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고 죽었지. 그러니까 나는 무주공산에 깃발 하나 꽂은 셈이야.”
아마 헥토와 요정상인들이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더는 지들 멋대로 시스템에 간섭하지도 못할 테고, 세상의 힘을 하나로 모으니 마니 중2병 같은 소리도 더는 지껄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나한테 엄청 짜증을 내겠지.”
“그렇겠죠……?”
자신에게 세상의 힘을 모두 모아 안겨 줄 것이라 기대했던 정시우가, 외려 하늘성의 힘을 봉인해 버린다면 그 분노는 심상치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때의 헥토의 표정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지금 시우의 표정만 놓고 보면 완벽히 악역인걸…….”
“뭘 새삼스레.”
정시우는 그로부터 잠시간 하늘성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헥토나 요정상인 따위가 간섭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눈앞에 있지도 않은 하늘성의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을 보며 수아린은 그것이야말로 광룡과 닮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용과 닮았다는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정시우가 질색을 하는 것을 떠올리며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자, 그러면 이제…….”
“이제 헥토랑 싸우러 가는 것인가?”
“잠깐만, 실전 한 번 안 치러 보고 바로 보스전 투입은 너무하잖아!”
“그래, 그러니까 좀 쉬자.”
“음?”
정시우의 뜻밖의 말에 전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아니, 여태까지 분위기는 팍팍 내놓고 갑자기 쉬다니요, 형님.”
[난 지금 우리 눈앞에 헥토가 나타나 싸움을 건다고 해도 믿을 자신이 있다만.]
“시우야……?”
그러나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들의 착각을 수정해 주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어. 헥토와 요정상인이 하늘성의 이변에 대해 깨닫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지?”
“그랬죠?”
“그렇다고 신들한테 생긴 이변을 금방 깨달을까? 하늘성과 세상의 힘에만 관심 있는 헥토가?”
“그건…….”
“다, 다른 신들은요!”
“그놈들이 이 세상으로 침범해 준다면 우리야 고맙지.”
지금 그들은 헤데아의 세상에 머무르고 있다. 온 사방이 물로 가득한, 정시우와 세이락시아의 전력을 두 배 이상으로 키워 주는 거대한 세상!
여태까지 그들이 다녀온 신들의 세상은 그 주인을 잃고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지만(그렇게 사라진 세상의 에너지가 다른 모든 세상으로 나뉘어 흡수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곳은 정시우와 세이락시아가 지배권을 확립하고 있어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정시우가 원한다면 이곳을 그들의 세상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역시 슈는 현명하군.”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정시우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보기엔 간단해도 제법 지치는 일이라, 자고 싶네.”
“왜 안 지치겠어요. 조금이라도 쉬고, 완전히 몸 상태 회복하고 움직여요.”
수아린은 힘없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이제 완전히 사람은 벗어난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제법 인간다운 면모가 남아 있어 내심 안도하게 되었다.
“너희는 실전 필요하다며. 만상만화경 빌려줄 테니까 아직 남은 찌꺼기 신들 하고 한판 붙고 와.”
“호랑이 어미다!”
“너희한테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바로 알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정시우는 피식 웃으며 마리나에게 만상만화경을 건네고는, 에리우에게 눈짓을 했다. 세이락시아를 제외하고는 일행 중 가장 강한 그녀에게 보디가드를 부탁하는 것이다. 에리우는 맡겨 두라며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 순간의 출렁임은 인식하지 않기로 했다.
“좋아, 무사히 발동한 것 같네…… 하아아암. 그러면 나는 좀 잔다.”
“저도 좀 잘게요.”
“……너무 붙지 마라?”
“고려해볼게요.”
어지간하면 수아린을 떼어 놓고 자겠지만 지금은 여태까지 쌓은 격이 무색하게도 무섭게 졸음이 쏟아져 그녀를 막기가 힘들다. 정시우는 대충 아까 에리우가 만들어 놓은 발판 위에 보드라운 것들을 깔고 엎어졌다. 곧 푹신하고 보드라운 뭔가가 더해졌지만 애써 의식하지 않았다.
“후…… 스으으…….”
그의 의식은 곧 수마에게 납치되어 헤데아의 세상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 나왔다. 여태까지 어떻게 참았나 싶을 만큼 깊은 의식 속으로 떨어져, 꿈의 세상으로 진입했다.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없는 암흑의 세상,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의 가능성. 그 안에서 한 마리 거대한 용이 정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네가 도달하지 말아야 할 꿈의 영역이다.]
“아, 어쩐지.”
갑자기 너무 졸리더라니, 이 녀석이 부른 것이었구나. 꿈속에서 또렷이 의식을 유지하고 있던 정시우는 꿈을 자연스럽게 납득했다. 하늘성의 지배권을 획득한 순간 잠이 쏟아진 것도 전부 설명이 되었다.
용…… 광룡은 실로 기묘한 표정으로 정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입이 재차 열렸다.
[너는 나의 안배와는 철저하게 다른 방향으로 성장했다. 당혹스러울 만큼 놀랍게.]
“그래서 꼽냐. 엉? 내 인생 뒤흔들어 놓고 마지막에 네 뜻대로 안 돼서 속이 막 뒤틀려?”
[아니? 과연 용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만.]
“글쎄 난 용이 아니라니까.”
[먼저 네 중대한 착각을 바로잡아 주도록 하지.]
당혹만이 가득했던 용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깃들었다. 어떻게 그것이 미소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용이란 타고나는 것도, 다른 누군가가 물려주는 것도, 물론 마력으로 만들어 냈을 뿐인 용의 꼬리와 날개를 달았다고 해서 불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호칭이 아니다.]
“그러면?”
[강인한. 흉포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제멋대로인. 모두를 무릎 꿇리는. 욕망하는. 나아가는. 그저, 끝없이 나아가는.]
어째 말 한 마디 한 마디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정시우랑 조금, 아주 조금 비슷한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그래서 용이라고?
[그런 너를 보고, 세상 모두가 용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 그때 비로소 너는 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파랑새가 처음부터 우리 집에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
[네가 인간의 모습으로 있든, 용의 것을 그 몸에 걸치든, 외견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너는 용이다. 내가 너를 용이라고 불러서도 아니고, 네가 너를 용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모두가, 세상이, 너를 용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 어쩌라고!”
[실로 훌륭히 자라난 후대의 용 정시우에게, 용의 위를 버리고 신 따위 하찮은 경지로 전락한 나의 동생을 제대로 조져 버리라는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이다.]
광룡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시우는 헥토가 광룡의 동생이었다는 실로 쓸모없는 정보를 획득했다.
“죽여 버릴 건데 괜찮지?”
[물론. 죽음과 삶은 결국 같은 궤도에 놓인 일시적인 정거장에 불과하니…… 놈 또한 그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래, 잘 들었다. 그럼 나 이제 간다?”
[그전에.]
광룡이 말했다.
[비겁하게 홀로 전쟁에서 빠진 놈이 있다. 헥토는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하늘성의 힘을 이용해 눈을 가려 둘 테니…… 그놈을 먼저 정리하자. 너에게도 그리 나쁜 얘기는 아니겠지?]
그 말에 비로소 정시우는 한 명의 신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헥토한테 얻어맞기 전에 그놈한테 먼저 얻어맞았었구나, 그런 지당한 사실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주억였다.
“오케이, 걔 먼저 조지러 간다.”
[굳.]
광룡이 엄숙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정시우는 잠에서 깨어났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Lv100이 되어 자가수호 스킬로 진화합니다. 스스로의 격을 세상에 새기며, 다른 무엇에도 묶이지 않고 홀로 거듭난 상위존재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킵니다. 타인과 자신의 구분이 분명한 만큼, 오직 진실만을 보며 진실만을 행합니다. 이 스킬에는 레벨이 없습니다.]
“헤.”
“으먀?”
정시우는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는 스킬 설명을 보며 무심코 웃고 말았다. 그에게 아주 찰싹 달라붙어 자고 있던 수아린이 귀여운 잠꼬대를 하며 고개를 들어, 정시우는 녀석을 쓰다듬어 주며 보기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이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