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251화.
정시우는 즐거운 식사를 하던 중 움직임을 멈추었다. 뇌리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가 잘 알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으으으으음, 요즘 자주 이러네.”
“한순간 한순간이 끔찍한 전투의 연속인데 어디 한 군데 이상해지는 것도 당연하죠, 오빠. 그래도 전 오빠 곁에 평생 있을 테니까요?”
“아니거든, 진짜 들렸거든.”
정시우는 자신에게 몸을 슬쩍 기대며 대놓고 심한 소리를 하는 수아린의 말에 정색하며 대꾸하고는 먹던 것…… 세례의 신 레이레의 사체를 깔끔하게 입에 구겨 넣었다. 이로써 어떤 세상에도 세례의 신의 흔적은 남지 않게 되었다.
지배 능력이 7레벨이 되고부터는 지배 능력을 어떤 식으로든 발동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는 신의 육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가장 적합한 방법…… 즉 식사로 섭취하는 방식을 주로 택하고 있었다.
“강탈 같은 걸 쓰느라 여태까지 지배가 별로 발전을 못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약이 오르네.”
“네네, 그래서 다음 타자는 누구죠? 레이레가 우리의 침입을 알고 대비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제 기습 작전은 거의 의미가 없을 텐데요.”
“그렇지. 그래서 다음 타자는 통 크게 헤데아로 정했어.”
정시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수아린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애석하게도 다른 이들은 한창 레이레의 권속들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듣지 못했다. 수아린과 함께 태클을 걸어 줄 사람이 절실한 상황이었거늘!
“헤데아면 수장급이잖아요!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오빠 진짜 미쳤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주로 헤데아 파를 공략해 왔잖아. 이 상황에 헤데아만 혼자 남겨 놓으면 자칫 뒤세느가 먼저 헤데아를 먹어 치울지도 몰라. 그전에 내가 헤데아를 먹어야지.”
어쩌면 이미 헤데아의 세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정시우가 어느 정도 노리고 있던 바이기도 하다.
헤데아는 본신의 힘만 따지면 뒤세느를 압살할 만큼 강력한 신이니만큼, 헤데아 파와 뒤세느 파 중 굳이 어느 쪽을 먼저 공략해야 할지 놓고 보자면 단연코 헤데아 파였기 때문이다.
“그러게 뒤세느 파도 균형 있게 공략하자니까요…….”
“그건 안 돼. 헥토나 세트나크 같은 단일 신들을 견제할 녀석들이 필요하거든. 그게 뒤세느 파야.”
이젠 정시우의 머릿속에서 어떤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수아린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정시우는 누군가와 싸우는 일에 대해서만은 머리가 아주 잘 굴러 간다는 것.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할 땐, 대체로 그것이 옳았다.
“그리고 뒤세느도 그걸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더더욱 빨리 헤데아를 집어삼키려 하겠지. 나한테 이 이상 놀아나기 싫으면 말이야.”
“그래서 굳이 그 난장에 끼어들어 헤데아를 먹자고요. 엄청나게 많은 신들이 모여들어 벌이는 난장을 뿌리치고 말이죠…….”
“내가 절반, 우리 뿌이가 절반.”
“뿌우이이이이.”
자신을 부르는 줄은 어떻게 알았는지, 세이락시아가 주위 떨거지들을 잽싸게 정리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정시우는 녀석을 쓰다듬어 주며 헤데아의 힘을 완벽히 다루는 세이락시아의 모습을 상상했다.
‘좋아, 제법 멋질 것 같아.’
그는 딱히 최후의 절대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신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싶은 것도 아니었기에 힘을 자신의 수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따라서 이미 유고의 파편을 먹어 치운 신들을 해치우고 그 녀석들에게서 뽑아낸 유고의 힘은 대부분 에리우에게 양도한 터였다. 아, 금속의 신의 힘은 통째로 서비스해 주었다.
“우우, 서슴없이 라이아한테 덤벼들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우리 스케일 엄청 커져 버렸네요.”
“새삼스럽게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나흘 전이요, 나흘 전!”
그렇다. 정시우는 신들 몰래 움직일 수 있는 시기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지난 나흘 동안 숨 쉴 틈도 없이 달려왔다.
라이아를 시작으로 싸움이 하나 정리되기만 하면 곧장 다른 신의 세상으로 넘어가 그놈을 깔끔하게 처리했으니, 그야 물론 시간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많이 소모되지 않지만 매 순간순간 죽음을 엿보아야 하는 일행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 ……. …………!?]
“어라, 또 들린 것 같은데.”
“환청일까요.”
“글쎄.”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정시우는 이미 인간의 인지를 아득히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그의 육신은 더 이상 평범한 육신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마력과 혼과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용을 추구하며 얻고자 했던 진리를 지금은 무수한 신을 포식하고 스스로의 격을 키워 가며 자연스럽게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설령 환청이 들려온다 한들, 그 환청에는 필시 깊은 의미가 있을 터였다.
“좋아, 이 환청의 정체는 일단 헤데아를 먹고 나서 진지하게 탐구해 볼까.”
“어지간히도 선수를 빼앗길까 봐 걱정되시는 거로군요.”
“아린아, 세하 많이 다친 것 같다. 치료해 줘.”
“아유 정말, 또 그렇게 모른 척 하고 나빴어.”
이제 그의 수하들도 어지간한 신의 권속들과의 전투로는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는 성장했으나, 문제는 레이레가 숨겨 두고 있던 지원군이었다.
제아무리 정시우가 은밀하게 움직였어도 그가 처음 신을 사냥하러 나선 이후 사흘이 흘렀을 땐 모든 신들이 정시우의 움직임을 깨닫게 되었고, 레이레 역시 동맹 내의 다른 신들과 얘기를 맞춰 두고 정시우를 협공하려 했던 것이다.
결과 문제없이 레이레를 포함한 신들을 해치울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일행이 상처를 입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유독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수아린의 신성력이 아니었더라면 이미 누군가 죽어도 죽었을 것이다.
“형님, 헤데아를 사냥하신다는 게 정말입니까!?”
“응, 모두 여기로 모여. 바로 넘어갈 거야.”
“아니 잠깐만 형님, 헤데아를 따르는 신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구악.”
“슈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겠다!”
“뿌이이이이!”
[포기하는 것이 늦구나, 세하. 지금 대체 누굴 설득하려 드는 거냐. 몸에서 힘 빠지기 전에 그냥 빨리 가자.]
수아린에게 사주를 받은 용세하가 어떻게든 정시우를 설득해 보려던 그때 모든 상처 치료를 마친 일행이 그를 깔아뭉개며 달려왔다. 정시우는 용세하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곧장 만상만화경을 발동했다.
[헤데아, 지금 네 모습이 실로 초라하구나! 너를 엄마처럼 따르던 그 많은 신들은 어디에 갔느냐, 더 이상 젖이 나오지 않아 입양이라도 보낸 거야?]
[뒤에 숨어 짖느라 목에 핏대를 세운 꼴이 가련하구나, 뒤세느.]
[뭣……!]
역시나, 만상만화경을 통해 넘어온 헤데아의 세상에서는 이미 전쟁이 시작되어 있었다. 헤데아와 그를 따르는 몇 남지 않은 신들, 그리고 군단의 신 뒤세느와 그녀를 주축으로 세력을 구성한 신들 사이의 전쟁!
“좋아, 우리 아직 안 들켰네.”
“그러게요. 이상하게 쟤네는 우릴 눈치채는 게 늦다니까요.”
정시우가 얼마 전 은신 스킬의 마스터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비단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아마도 그가 아직 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그들의 경계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높은 격과 많은 마나를 품고 있어도, 아무리 많은 신의 힘을 흡수해도, 여전히 신들과 정시우 사이엔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과연 정시우가 그것을 넘지 못하는 것인지 넘지 않는 것인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그래도 여유가 얼마 없어. 뿌이, 여기선 네 역할이 중요해.”
“뿌이.”
세이락시아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발휘했다. 이 세상은 과연 헤데아의 본신이 머무르는 세상답게 하늘과 땅도 알 수 없는 물투성이의 세상이었다.
물론 신들은 막대한 마나를 지니고 있으니 그것이 물속이든 용암 속이든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전력이 저하되고 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정시우 일행에게는 헤데아와 같이 물의 힘을 다루는 세이락시아가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지?”
“뿌이이이이.”
그 둘의 권능을 옆에 나란히 놓고 보면 세이락시아 쪽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지금 세이락시아에게는 능력을 보조해주는 정시우의 존재가 있다! 이 세상에 들어온 직후부터도 계속 세상의 마나를 지배해 나가고 있는 정시우와 함께라면 헤데아든 헤데아 할머니든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뿌, 뿌이뿌이이.”
세이락시아는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한 채 앞으로 헤엄쳐 갔다. 녀석이 만들어 내는 물의 흐름이 정시우 일행을 더없이 자유롭게 했다. 마치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정시우는 씩 웃으며 바람의 질주를 발동했다. 이대로 그대로 현장에 들이닥친다!
[음……!?]
당연하게도,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헤데아였다. 그녀는…… 신들의 기준으로 보아도 무척이나 거대한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물을 조종하여 다른 신들을 공격하다 말고 일부 물의 흐름이 자신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깨달음에 이어 닥쳐오는 것은 경악이었다. 설마 자신의 세상에 신에 이르지도 못한 자가 감히 침범해 오다니! 물론 그럴 만한 이는 한 명뿐이다. 정시우! 과거 하위세계에서 미약하기 그지없는 육신으로 자신의 권속을 해치운 자!
[어딜 한눈을 파는 거야!]
[아하, 그가 왔구나?]
뒤세느와 한편을 맺고 있는 신들은 헤데아가 보인 동요를 놓치지 않고 공격했지만,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뒤세느만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했다. 아주 잘 된 일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헤데아와 함께 정시우까지도 사냥할 셈이었으니까.
[어린 용, 정말로 이곳에까지 이를 줄이야…….]
여태까지 그가 만들어 준 흐름을 그녀가 무척 유용하게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상은 곤란하다. 그는 필멸자 주제에 신들을 우습게 볼 만큼 강해졌고, 무엇보다도 그 시기가 너무나 빨랐다.
그녀에게 통제 불가능한 요소는 헥토와 세트나크만으로도 충분하다! 정시우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마음껏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약한 인간아!]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 용이여! 라스트 스테이지에 돌입한 기분은 어떻더냐!]
헤데아와 뒤세느가 동시에 정시우에게 반응했다. 그러나 정시우는 그 둘에게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헤데아를 구성하고 있는 무수한 신들의 모습을 파악하며 기막혀 하고 있었다.
‘여러 신들이 모여 이룬 집합체라더니, 과연. 저건 여성도 남성도 아냐. 컴퓨터가 지능을 얻는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쨌든 지금부터 저 녀석을 자신이 먹어 치워야 했다. 정시우는 세이락시아의 물살을 조종해 자신과 세이락시아를 제외한 일행을 따로 떼어 냈다.
“너희가 막아!”
“저희보고 죽으라고요!?”
“그 정도로 나약하게 키우지는 않았어!”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헤데아를 향하던 공격 중 일부와, 헤데아의 물살 중 일부가 정시우 일행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세이락시아의 한 손을 붙잡은 채인 정시우는 다른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그 정중앙을 과감하게 돌파했다.
“헤데아, 한판 뜨자!”
[언젠가, 네가 내 앞에 설 날을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정시우는 실로 교묘하게 돌진하여 헤데아와 대척하고 선 모든 신들을 가리는 형태로 헤데아와 마주했다. 반면 남은 일행은 죽상을 지으며 그 뒤에서 방어태세를 굳혔다. 정시우가 막으라고 한 대상, 그것은 바로 헤데아를 제외한 나머지 신들 모두였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헤데아를 무사히 먹어 치울 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하다니!
[저것들은……?]
[뭐야, 미처 감지도 못할 만큼 작은 기운이잖아.]
[……용 본인도 아니고 떨거지들? 설마 너희가 지금 내 앞에서 뭔가 해 보겠다는 거야?]
한편 뒤세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정시우가 이렇게 대담하게 뛰어든 이상 뭔가 있겠지, 하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수하들의 목숨을 내던지는 작전이었다니!
“후, 슈에게는 확실히 대가를 받아 내고 말 테다.”
그러나 에리우만은 그녀의 눈빛을 대담하게 맞받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정시우의 마신을 적용받게 되면서 지상 몬스터인 그녀가 물속에 들어올 수 있게 된 지도 오래, 이젠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증명할 차례였다.
“슈…… 내 사랑은 내가 지킨다!”
“네 사랑 아니거든요!”
수아린의 장렬한 태클이 작렬한 직후,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아주 거대한 철벽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음?]
[잠깐, 이건 리느에의…….]
[큭, 단단하잖아!]
[이걸, 저 여자가……?]
대지의 신 유고의 힘과 금속의 신 리느에의 힘을 흡수해 신도 몬스터도 아닌 존재로 거듭난 에리우의 전력이 신들 앞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