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250화.
“손님, 이게 바로 차원용병증이랍니다.”
“겉으로 보기엔 별 힘이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차원을 넘나드는 힘이 있답니다. 아, 물론 현재 시점에서는 의뢰를 받은 세상으로 넘어가는 기능, 본래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오는 기능만 첨부되어 있을 뿐이지만요.”
마리나 비셋은 요정상인에게서 받아 든 정육각형 모양의 금속패를 휘휘 살펴보며 흐음, 고개를 까딱였다.
“이게 있으면 언젠가 슈를 만나러 갈 수 있다 그거지.”
“그건 조금 어려울지도 몰라요.”
최근 정시우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그 소문을 약간이나마 전해 들은 요정상인은 그녀의 말에 난색을 표했으나 마리나는 지극히 자신 넘치는 말투로 외쳤다.
“어떤 장벽이 있든 뚫고 지나갈 뿐이야!”
“마리나, 점점 말투가 시우를 닮아가는 것 같아.”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역시 그렇구나!”
“서희, 이 녀석에게 맞춰 줄 필요 없어. 마리나는 원래 이랬을 뿐이야.”
최근 요정상인들은 지구에서도 최상위권의 플레이어들에게 차원용병이 될 생각은 없느냐고 권유하고 다녔다. 단순히 지구에 묶인 신세를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고, 그 대가로 해당 차원의 몬스터 토벌을 돕는 것.
물론 차원을 넘나드는 일인 만큼 보상 또한 확실하다. 요정상인들이 계획한 일이 아니라 하늘성의 보상 시스템에도 확실히 연결되어 있는 일이었으니, 외부의 몬스터를 사냥해도 놀랍게도 레벨 업이 가능한 것이다!
즉 능력만 확실하다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법한 일이라는 얘기였다.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차원용병 초대멤버예요. 지금이라면 온갖 매력적인 의뢰도 전부 독차지할 수 있답니다!”
“그만큼 위험하겠지.”
“예리하셔라.”
그 요정상인은 애교스럽게 혀를 내밀었으나 마리나는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마리나는 차원용병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지구에 새로운 상위 던전이 오픈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평화를 되찾은 건 좋은 일이지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어련하시겠어.”
“가자, 서희, 세리아. 강해져서 슈를 되찾아오는 거야.”
“나는 이제 그냥 놓아줄 생각이었는데…….”
“미련 많은 여자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이서희와 세리아는 자신들은 아닌 척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연스레 요정상인에게서 차원용병증을 받아 들었다. 마리나는 일행의 그런 모습에 익숙한 듯 코웃음을 치며 요정상인에게 확인했다.
“그래서 첫 번째 의뢰는 뭔데? 어디로 가야 해?”
당장 지구에서만 마리나 일행을 제외하고도 제법 많은…… 그러니까 간을 배 밖에 내놓고 다니는 플레이어들이 차원용병으로의 전직을 완료했다.
그것은 지구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들이 이끄는 몬스터 군단에 전멸 위기에 몰린 세상이 있으면, 반대로 우연이든 필연이든 몬스터들을 제법 잘 막아 내고 있는 세상도 있었으니까.
혹자는 힘에 대한 욕망으로, 혹자는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혹자는 미지에 대한 욕망으로 차원의 벽을 넘었다. 그렇게 무려 수만이나 되는 플레이어가 한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와, 이게 다 첫 번째 의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야? 우리만큼 강해 보이는 이들도 제법 있는데.”
“우린 그래 봐야 크레센트 에이지에서 온 거잖아. 우리보다 강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거야.”
그들은 이차원의 다 허물어져 가는 하늘성 위, 로비에서 다른 세상에서 온 이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차원용병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첫 번째 발생 의뢰. 어지간한 세상은 그대로 쓸어버릴 수 있을 만한 전력이 그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음, 네가 그 인간의 지인이라고?”
“슈를 알아!?”
마리나는 방금 자신이 몬스터로 착각하고 공격할 뻔했던 무척 덩치가 크고 피부가 두꺼운 여성이 정시우를 알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끔벅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그에게 무기를 강탈당했어. 신의 파편이라면서 아주 매정하게도 거두어 가더군.”
“슈가 무사하구나!”
“이 여자 기분 나쁜데…….”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전한 마이페이스로 초대면의 여성을 언짢게 만드는 마리나를 밀쳐 내고 세리아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 역시 만만치 않은 마이페이스였다.
“그분께 눈에 띄는 특이사항은 없었습니까? 혹시 어디로 가신다고 말씀을 남겨 주신 것은……?”
“눈에 띄는 특이사항…… 엄청 예쁜 여자랑 사이가 좋아 보였다는 것 정도.”
“……어디 다치시진 않은 모양이군요.”
“무,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인걸…….”
세리아와 이서희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 버렸다. 어딜 봐도 정시우를 이미 놔준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과거 정시우에게 라이아의 파편으로 빚어진 대검을 뺏긴 여자는 그런 마리나 일행의 표정을 재밌다는 듯 감상하다가는, 이내 자신과 친한 요정상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에 대해 한 가지 더 알고 있는 게 있어.”
“뭔데!?”
“그는 우리를 버렸다고 했어.”
“……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마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여자는 당시 요정상인이 지었던 씁쓸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당시 그녀 또한 요정상인에게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며 캐물었지만 요정상인은 더는 아무 말도 해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우리 힘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든가, 뭐라든가. 그렇게 됐으니 잘 부탁해, 언니들.”
“으으으으음?”
요정상인들이 정시우와 관련되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리나는 어째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시우가 자신과는 더욱 연관이 없는 곳으로 떠나간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를 쫓을 수도 없고, 그에 대해 파악할 수도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짜증이 났지만, 그럼에도 마리나는 이대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갈피는 잡은 셈이 아닌가.
“좋아, 그렇다면 내 힘으로 하는 수밖에.”
고작 첫 번째 의뢰일 뿐이다. 어쩌면 정시우의 소식을 알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조우하게 될지도 모르고, 잘하면 정시우가 이미 찾았던 세상에 들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만은 아직 무수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시우 본인과 직접 만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마리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쌍권총을 쥐었다. 정시우가 강화해 주었던 바로 그 쌍권총이었다.
“뭐가 됐든 후딱 쓸어버리고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자.”
“동의.”
“우연이네. 나도 시우를 보면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말이 생겼어.”
그 셋은 그로부터 쉴 새 없이 발생하는 의뢰들을 모두 받아 완벽에 가깝게 수행하며 이름을 날렸다. 셋의 궁합이 좋은 것이야 당연했지만 끊임없이 샘솟는 의욕과 차고 넘치는 재능은 그녀들을 무수히 많은 차원용병 중에서도 특별하게 만들었다.
막혀 있던 성장의 길이 뚫려 레벨이며 스킬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아티팩트들로 전력을 상승시킨다.
제법 의미가 깊은 재보도 얻고, 한 세상의 파멸을 담아낸 주문서 따위도 얻었다. 만약 정시우가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얻었을 모든 것을 그녀들이 대신해 얻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은각천뢰 스킬이 Lv92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1년이 흘렀다. 249번째 의뢰를 받아 지버스 에이지의 세상으로 넘어온 일행은 데미 리치 토벌을 무사히 마치고 세상의 저항군들에게 잉글랜드 군을 물리친 잔 다르크가 이런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추앙을 받으면서도 한창 투덜거리고 있었다.
“슈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이만큼 돌아다녔으면 비늘 하나라도 떨어질 때 안 됐어?”
“으우우…… 시우야, 보고 싶어…… 훌쩍.”
“야, 마리나! 너 때문에 또 서희가 울기 시작했잖아!”
“우리 시우,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걸까? 이렇게 위험한 곳들밖에 없는데…… 으으으.”
“꼭 엄마가 아들 걱정하는 것 같네…….”
더 이상 이서희가 우는 꼴을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 생중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마리나는 곧장 차원용병증을 발동하여 일행과 함께 지구로 귀환했다.
“서희, 참아. 그 분노는 나중에 슈를 만나서 푸는 거야.”
“우우, 하지만…….”
아직 체력은 남아 있으니 이서희가 울음을 그치는 대로 곧장 새로운 의뢰를 받아야겠다고 마리나가 피도 눈물도 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세리아가 문득 말했다.
“이 용병증, 다르게 써먹는 방법은 없을까.” “응?”
“장기전을 각오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도 요즘 좀 지쳤거든. 시우 님을 한 번 뵙고 안전하다는 것만이라도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이대로는 언제까지 돌아다녀야 할지도 알 수 없겠지, 그렇지?”
세리아의 눈이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리나는 일단 소극적으로 반문해 보았다.
“하지만 접때 요정상인이 이제 곧 끝날지도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건 믿지 마.”
“큭, 그건 확실히…….”
묘하게 들어맞는 듯한 말에 마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너흰 미국 고등학교 나왔는데 거기도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이 짜증 나냐고 태클을 걸어 줄 수 있는 이서희는 한창 울고 있느라 애석하게도 태클을 걸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가 이 차원용병증을 상당히 많이 이용했잖아? 실은 그러는 동안 어떤 세상으로 넘어가도 공통되게 유지되는 특유의 마나 패턴을 해석하는 데 성공했어.”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지. 이래 봬도 마법사인데.”
더욱이 세리아는 마나를 직접 가공해 다루는 마법사다. 마법에 따라 변화하는 마나 구조를 탐색하는 데에는 정통파 마법사보다 오히려 그녀가 더욱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걸로 가능해지는 게 뭔데?”
“샘플들에서 공통된 마나 패턴을 제거하고 연구를 한 결과, 요정상인들을 통하지 않고도 차원용병증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좌표를 입력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 거야. 그래서 이 차원용병증에 기록된 차원을 넘나드는 마법을 역이용해서 내가 기억하는 시우 님을 추적할 수 있게 되면…….”
중간부터 너무 어려워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정시우라는 단어는 캐치할 수 있었다. 즉 지금 세리아는 자신들의 힘으로 정시우를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진즉 말하지!”
“진즉부터 그런 게 가능했으면 당연히 말을 했겠지. 확신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그리고 이번 의뢰를 마치고 레벨이 올라서, 비로소 해 볼 마음이 들었어.”
“훌쩍…… 세리아, 해 봐.”
어느덧 울음을 그친 이서희가 세리아를 종용했다. 세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힘이 딸려. 너희 것도 내놔.”
“응.”
“세 개로는 충분해?”
“아니.”
세리아가 손을 펼치자 그 안에 열 개가 넘어가는 차원용병증이 들려 있었다.
“임무수행 중에 죽은 사람들 것을 마법으로 은닉 처리해서 탈취했어.”
“쩐다!”
“요정상인은 우리 생각보다 별거 아냐. 요정상인 뒤에 있을 누군가가 대단한 거지.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슈 아닐까?”
“시우 님은 필요 없는 머리를 굴리지 않으셔.”
“세리아 너도 시우를 제법 잘 파악하고 있구나…….”
이서희는 세리아의 말에 눈물 맺힌 눈으로 웃고 말았다. 세리아는 만면의 미소로 대답해 주고는 차원용병증들을 모두 한데 모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시우를 떠올리며 차원용병증들의 좌표를 통일해 나갔다.
지금에야 해 볼 마음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린 이래 계속해서 구상해 오고 연습하던 것이다. 실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됐다.”
“정말!?”
그녀의 재능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대단하여, 신의 힘을 직접 강탈하여 사용하던 정시우나 미레타의 힘을 간신히 아티팩트로 가공해 고정시킬 뿐이었던 요정상인들보다도 어떻게 보면 한 수 위였다. 신의 힘을 마도의 원리로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라이아가 먹혔다고?]
그러나 세리아의 확신과는 달리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그녀의 기억 속의 시우와 일치하는 존재가 없어 차원이동이 불발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 세상과 세리아를 잇는 미약한 끈에 불과했다. 언제든 끊어 낼 수 있는 미약한 끈.
“잠깐만, 이럴 리가…… 아니?”
곧장 그것을 끊어 내려던 세리아는, 그러나 자신의 의식 너머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끔찍한 기운에 멈칫하고 말았다. 어째설까, 확실히 익숙한 기운도 느껴지는데…….
[네, 헥토 님. 더구나 라이아는 시작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벌써 여럿을 집어삼켜, 신이 되지 못했다 뿐 신에 상당한 마력과 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 정말 난 놈은 난 놈이군. 예정된 길을 벗어나 그렇게까지 날뛸 수 있다니. 정말 그대로 모든 신을 집어삼킨다 해도 놀랍지 않겠어.]
대답하는 목소리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다. 세리아의 머릿속에는 점점 더 물음표가 늘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마음을 싸늘하게 얼려 버리는 말이 들려왔다.
[비록 영주님…… 정시우는 낌새를 채고 도망쳤지만, 세상의 힘을 어떻게든 하나로 모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다음부터는 헥토 님께서 손수 나서셔야 하겠지만…….]
[광룡……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래도 그것이면 되었다. 내 능력이 그 필멸자 따위의 것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주면 될 것이 아닌가.]
“…….”
거기까지 들은 세리아는 우선 침착하게 연결을 끊었다. 머릿속에서 방금 자신이 들은 정보들을 어떻게든 정리해 보았다. 그리곤 차원이동을 하자더니 혼자서 무슨 판토마임을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의 마리나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고했다.
“시우 님을 뵈어야 해. 당장.”
“그거 네가 해야 되잖아! 네가!”
끝내 참지 못한 마리나가 버럭 소리 질렀다.
지극히 정당한 분노의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