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249화.
모든 신들에게 있어 정시우의 존재는 마치 목 안에 박힌 가시와 같았다. 지닌바 마력으로 보아도 격으로 보아도 그들의 본신에 비할 바가 못 되는데, 그냥 무시하자니 따끔거리고 실수라도 하면 그대로 목에 구멍이 나 버린다.
그렇다고 그게 무서워 화신의 전장에서 빠져나가자니 그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 그들 입장에선 이미 하위세계인 지구에서 전력을 뺀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하물며 화신의 몸으로나마 본인들이 직접 활동하는 상위세계에서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레벨이 1 올랐습니다.]
[마력이 11 영구적으로 올랐습니다.]
[마신 스킬이 Lv93이 되었습니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Lv94가 되었습니다.]
[언브레이커블 스킬이 Lv78이 되었습니다.]
“후, 도합 화신 10명을 썰었는데 겨우 1레벨이 올랐어. 슬슬 한계가 가까워져 오는 기분이 드네.”
“그런데 얘네 바보예요? 승부가 안 되는 걸 알면서 왜 이렇게 미련하게 덤벼드는 걸까요…….”
수아린의 의문은 지당했다. 그러나 정시우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냐면 그들의 사고방식, 행동방식에서 자신과 비슷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떠벌리고 다닐 일은 아니지만, 아마도 저놈들은…….
“저것들이 신이 아니라 나라고 생각해 봐.”
“네? 신이 아니라 오빠라면…… 아, 과연. 세상 지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 후퇴나 전력 차 같은 걸 생각할 리가 없네요.”
“너 일로 와라.”
“꺄악.”
정시우와 수아린이 1년 이상 지나도 익숙해지질 않는 염장질 퍼포먼스로 동료들의 멘탈을 공격했다. 용세하는 가만히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형님과 맞붙어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들에게도 전투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 같기는 합니다. 이전 같았으면 우릴 따로 유인한다든가, 신의 힘을 이용한 마력 함정이라든가, 세상의 지형을 바꾸는 식으로 공격을 가해 온다든가…… 그런 복합적인 수단은 쓰지 않았을 텐데요.”
“그 정도 발전도 없으면 맞아야지.”
정시우가 수아린의 말랑말랑한 볼을 놔주고는 용세하에게 대꾸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신들에게는 드디어 전략전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방금 전투에서도 일부러 그의 수하들이 만만하게 상대할 만한 화신들을 내보내 그들을 유인하나 싶더니 놀랍게도 대지를 하늘로 치환하는 함정을 설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 같았으면 정시우의 수하들을 따로 노리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텐데!
물론 그사이 정시우는 따로 다섯의 화신에게 급습을 받고 있었다. 이번 전투로 다섯과 동시에 붙어도 여유롭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것만은 좋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얘네 서로 다른 그룹의 신이었지?”
“그랬죠. 그렇다는 건 이제 곧…….”
“모든 신이 손에 손잡고 우리를 잡으러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얘기지.”
잔뜩 성이 난 모습인 에리우가 신경질적으로 양 주먹을 맞부딪히며 말했다. 그것이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의 전투로 낭패를 당해서였는지 지금 정시우와 수아린이 찰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우리가 그간 벌인 전투 때문에 신들의 힘이 전체적으로 약해졌어. 하지만 더 약해진 그룹이 있으면 덜 약해진 그룹도 있을 테고.”
“뿌우이이.”
그룹 간의 힘의 격차가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뜻한다. 비록 저번 전쟁으로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는 하나 더욱 미루었다가는 정시우가 그들을 모두 갉아먹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단순히 필멸자라며 깔보기에는 지금까지 정시우가 해 온 일이 너무나 컸다. 그는 화신의 전장의 무력 밸런스를 완전히 망가트렸고, 거의 모든 신의 화신들을 족히 한 번 이상씩은 잡아먹었다.
신들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최소한 화신의 전장에서는 어지간한 수로는 정시우를 몰아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러니…….
“힘을 합쳐 나를 몰아내고, 마지막 전쟁을 시작한다. 멋진 시나리오 아냐?”
“퍽이나 멋지네요. 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고민 중이야.”
굉장히 매력적인 선택지가 두 가지, 지금 정시우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어느 것을 고르든 후회가 없을 것만 같은 선택지가.
“첫 번째는 이대로 화신 사냥을 계속하는 거지. 모든 신들의 화신과 일대다 전투라니 정말 엄청나게 재밌을 거야.”
“퍽이나 재밌겠네요!”
수아린은 사나운 눈빛으로 두 번째 선택지를 요구했다.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두 번째는 라이아의 본신이 있는 세상에 쳐들어가는 거야.”
“어째서 하필이면 또 라이아…… 음?”
아무래도 정시우의 뇌 내에서 라이아는 제일 만만한 신 취급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아린이 그것이 참 가엽다고 생각하다가는…… 이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요, 본신? 진짜 신과 싸우시겠다고요?”
“응.”
정시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수아린이 입을 뻐끔거리다가는 반박했다.
“화신과 본신에는 족히 10배의 힘 차이가 있다면서요!? 그 10배가 산술적인 수치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오빠잖아요? 화신 열 마리 잡아먹는다고 오빠 자신이 신과 같은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렇지.”
“신이 다스리는 세상 자체가 신에게 복속되어 있다고 하셨잖아요!? 신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상대하는 일이라고……!”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뭘 신과 싸우겠다고 태평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욧!”
끝내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한 수아린이 빽 소리를 질렀으나 정시우는 태연히 대꾸했다.
“하지만 내게는 지배가 있어. 여태까지 화신의 전장에서 내가 뭘 해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바로 내 것이 아닌 마나를 다스리기 위한 특훈이었잖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신의 세상에서는 차원이 다를 텐데…….”
“그러니까 더 재밌는 거지.”
“아아, 진짜.”
수아린은 언제나처럼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케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든 설득해 달라는 듯한 눈빛! 그러나 케이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에리우도 세이락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용세하가 나섰다.
“저희는 거기 들어가자마자 죽지 않을까요?”
“여기에서도 안 죽었잖아. 그러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그리고 세상 전체와 대적해야 한다고 아린이가 말했지? 아마 신들도 그 본인이 다스리는 세상에는 특급 졸개들을 잔뜩 데리고 있을 거야. 너희는 그놈들을 맡으면 돼.”
“맡으면 돼, 라고 쉽게 말씀은 하시지만…….”
기가 막힌 용세하가 뭔가 반문하려 했으나, 정시우는 말없이 방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싫으면 빠지라는 눈빛이다. 이 불합리함, 이 막무가내!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변함없는 마이페이스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끝내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는 대꾸했다.
“그럼 가야죠, 뭐.”
“용세하 씨!”
“뿌이이이.”
“우리는 슈의 결심을 바꿀 수 있었던 적이 없다. 팝콘이나 준비해라, 수아린.”
“뭘 당당하게 떠들고 있는 거예욧! 이제 다 같이 죽으러 간다는데!”
“안 죽는다니까, 안 죽어.”
정시우는 울상이 된 수아린의 모습을 보며 결심을 굳혔다. 처음부터 두 번째 선택지가 마음에 들었지만 수아린이 질색하는 걸 보니 더더욱 두 번째 선택지가 맞는 선택처럼 느껴졌다. 원래 자신의 결심에 대한 수아린의 리액션이 클수록 그 행동에 대한 결실도 달콤했으니까!
정시우는 속으로만 그것을 아린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라이아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러 가 볼까.”
“저 죽으면 처녀귀신 돼서 오빠한테 달라붙을 줄 알아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케이나가 경악하며 태클을 걸었다.
[그 나이 먹고 아직이란 말인가?]
“선배님 첫사랑이 형님이잖아.”
[저런, 첫사랑이 저거라니 그거 참 운이 없었군…….]
“저거? 수아린은 몰라도 감히 지금 슈를 ‘저거’라고 표현한 것인가?”
“뿌뿌이이.”
“당신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이제 곧 실컷 신이랑 싸우게 해 줄 테니까 너희끼리 싸우지 마라.”
정시우는 우선 일행의 상태를 만전으로 끌어 올렸다. 이럴 때만 되면 휴식처가 생각나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이제 와 없는 것을 그리워해 봤자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도 세상 어느 곳에든 넘쳐 나는 마나가 다른 모든 것을 대신해 줄 수 있었다.
“좋아, 그러면 바로 가 볼까.”
“……정말로 이곳에서 더 힘을 키우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오빠?”
“위험도는 그게 그거야. 그리고…….”
신들은 언제나 정시우를 상대로 멍청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시우가 하위세계에서 날뛸 때도 설마 이건 못 이기겠지, 설마 여기까진 못 오겠지 하다가 전부 털렸고, 그것은 그가 화신의 전장에 진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아마 또 당분간은 정시우가 신의 세상에 직접 쳐들어간다고 해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며 무시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얼 타고 있다가 정시우에게 본전까지 다 털리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것이 신들의 존재 의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 시기를 이용해서 최대한 신들을 잡아먹어야지.”
“그쯤 되면 이미 오빠가 최강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그건…… 글쎄다.”
그 말을 듣고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대상이 있었으나, 정시우는 이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어 버렸다. 놈과 대면하게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벌써부터 무척 기대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오빠가 또 불길하게 웃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가 볼까.”
라이아의 본신이 있는 세상 따위, 그녀의 화신과 몇 번이나 싸우면서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정시우의 지배하에 놓인 만상만화경은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이전보다도 기민하게 그가 원하는 세상을 비추었다.
[음……!? 설마……!]
역시나, 한때 헥토의 세상을 비추었던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단지 그 세상에 주파수를 맞추었을 뿐인데 라이아의 민감한 반응이 돌아온 것이다. 괜히 신이 아니군, 생각하면서도 정시우는 헥토와 비하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라이아의 기척에 웃음을 흘렸다.
“라이아, 오래 기다렸지?”
[아니 잠깐, 오지 마. 오지 마!]
화신의 상태로 너무 당한 나머지 공포가 본신에마저 각인된 것일까? 라이아가 기겁하며 저항했지만 정시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상쾌하게 웃으며 만상만화경을 그대로 작동시켰다. 저 너머에서 라이아가 필사적으로 마나를 발해 아티팩트의 작동을 멈추려는 것도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만상만화경의 랭크는 SSS! 제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확고하게 굳어진 마나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오지 마!]
만상만화경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정시우 일행 모두를 감쌌다. 직후 그들의 모습이 그곳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화신의 전장을 통째로 쥐고 뒤흔들던 악동의, 아직은 누구도 깨닫지 못한 은밀한 퇴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