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241화.
“후, 개운하다. 이제야 몸이 좀 가볍네.”
“개운, 하다니…….”
루타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시우가 어째서 저렇게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방금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서 있을 힘도 없는데, 시야가 컴컴하게 물들어 버렸는데 유독 그의 미소만이 눈부셔 견딜 수가 없었다.
“루타, 너무 내 행동에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마. 난 언제까지고 어린애라서 발전이 없거든. 역시 우리 어머니는 모든 걸 알고 계신다니까?”
“오빠 바보, 바보!”
정시우가 태연히 말을 늘어놓는 가운데, 옆에 선 수아린은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그에게 치유 마법을 걸고 있었다. 그녀의 막대한 마력 덕에 상처는 금방 아물었지만, 더 이상 용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어딘가 모르게 막연히 바라보며 용세하가 물었다.
“형님, 혹시 저희도…… 버리시는 겁니까?”
“뭔 개소리야.”
완벽하게 아문 피부를 보며 아직도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수아린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정시우가 용세하의 생뚱맞은 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내가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그런데 이제와 빠지려고? 내가 좀 약해졌다고 지금 깔보냐?”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형님이 아무리 약해지셔도 제가 형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단지, 형님과 우리를 이어 주던 유일한 끈이…….”
지하 플레이어로서의 힘. 그것을 스스로 포기한 이상 그와 자신들의 연결도 그대로 끊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용세하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위화감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미 그들 사이의 연결은 끊어지고, 서포터였던 그들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닥쳐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어라?”
“일 다 끝났으니까 나가자. 이제 여기 우리 집 아니다.”
정시우는 스스로 집 열쇠를 내팽개친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곤,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루타를 놔두고 돌아섰다. 그때 그의 망막 위로 담담하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고유 능력 지배가 Lv4가 되었습니다.]
정시우는 그것을 보며 놀랐다. 물론 지배 능력은 순수하게 그가 타고난 잠재력이었다. 과거 광룡에게는 없었던 것이고, 아마도 정시우가 선택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배 능력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시우가 놀란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미 지하 플레이어의 자격은 상실했을 텐데 어째서 스테이터스를 확인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던 정시우는 마나의 길 스킬로 마나를 역추적한 끝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하늘성과 관련된 모두를 버렸지만 그와 지배 능력으로 연결되어 있는 서포터들은 아직 아닌 것이다. 그들의 능력으로 그의 [열람]이 가능했던 것.
“과연, 이 정도는 놔둘까.”
편하기도 하고. 정시우는 대충 납득하기로 했다. 인벤토리 능력도 마찬가지 이유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나의 길 스킬이 없었더라면 이 원인을 죽어도 몰랐을 텐데, 용의 감각을 잃고 나니 새삼스레 이 스킬이 굉장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주님, 한 가지만 묻게 해 주세요.”
루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시우는 돌아서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그의 의향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제발 그것이 아니길 바라며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화신의 전장.”
정시우의 대답은 실로 담백했다. 루타가 입술을 깨물며 반박했다.
“본래 능력을 모두 지니시고도 힘든 곳인데, 그 힘을 모두 내려놓고 가시겠다니요. 그 몸으로는 마신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실 테고, 용의 방어막조차 없어요. 휴식처로 도망칠 수도 없다구요! 금방 죽어 버리고 말 거예요.”
“음, 뭐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네?”
아연해져 되묻는 루타. 그러나 정시우는 여전히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래서 하려고. 여태까지 너무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몸을 사렸던 걸 생각하면, 인생 절반은 손해 보고 있었던 셈이지.”
“무슨, 그런, 단순한…….”
“오, 나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네.”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난다는 것은 무척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자신이 더 이상 자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이 과거 정시우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앞길이 가로막힌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가고 싶은 길을 놔두고 방향을 틀어야 한다면 더더욱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도 아린이랑 세하는 나랑 같이 죽어 줄 수 있지?”
“그렇게 무거운 질문을 가볍게 던지지 말아 주실래요? 제가 이 자리에서 20년은 고민한다고 해도 누구나가 납득해 줄 거거든요?”
“널 사랑해, 그러니까 같이 죽어 줘.”
“으아아아아아,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프로포즈!”
하지만 수아린은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정시우가 처음부터 맛이 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은 자신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한편 용세하는 처음부터 망설임이 없었다.
“형님과 만난 순간부터, 제 목숨은 형님의 것이었습니다. 물어보실 것도 없죠.”
“좋아, 역시 이래서 단순한 녀석은 쉽다니까.”
“보통 그걸 사람 눈앞에서 말합니까, 형님?”
누구 못지않게 단순한 정시우와 함께하며 옮았을 뿐이라고 용세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입 밖에 내면 맞을지도 모르니까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루타, 안녕.”
“영주님, 잠깐만, 잠깐만요!”
그러나 정시우는 더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만상만화경을 발동하여, 가장 적은 마나로 이동할 수 있는 화신의 전장을 골라 이동했다. 물론 실패할 리가 없었다. 만상만화경은 스스로 기억하는 모든 세상을 비출 수 있었으니까.
여태까지 몸을 사리며 파편을 모아 왔던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과감한 행동이었다.
“와아.”
“오오오오.”
그들이 도착한 화신의 전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세상의 모습이었다. 단지 모든 것이 거대하다는 점이 달랐다.
당장이라도 그들의 몸을 태워 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빛을 뿜어내는 항성이 하늘 위에 걸려 있었고, 거대한 빌딩이라도 둘둘 말아 감을 수 있을 거대한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가장 앙상한 나무조차 수십 킬로미터 이상 높이 뻗어 있었고, 이곳저곳 시끄럽게 날아다니고 있는 파리 떼는 한 마리 한 마리가 항공모함보다 거대했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Lv48이 되었습니다.]
거인들의 세상으로 굴러 떨어진 걸리버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정시우는 신기해하며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 와중에 요즘 좀 잠잠했던 무지는 용감 스킬의 성장이 가속화된 것이 어째 살짝 열 받았다.
“오빠, 오빠한테 따지고 싶은 건 아니지만요.”
그런 세상을 함께 둘러보던 수아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지배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은 오빠의 본성에서 기인했다는 거잖아요? 무수히 많은 이를 보듬고…… 그들의 힘을 하나로 만들어 내는. 광룡이라는 자가 오빠를 선택했다는 것도 물론 그 때문일 테고요.”
“응?”
“오빠, 그렇다면 오빠는 기껏 자각하고 키워 온 오빠의 본성을 방금 부정해 버린 것이 아닌가요? 그거야말로 오빠의 마음가짐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요? 타인이 만들어 준 무대가 싫다는 이유로, 진정한 자신까지 내던진 꼴이 아닐까요?”
웬일로 수아린이 제법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정시우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가 지배 능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했다.
“나는 내 능력을, 내 본성을 부정하고 싶은 게 아냐, 아린아. 그랬으면 당장 너희의 존재부터 부정해야 했겠지. 난 확실히 신들과 유사한, 오히려 더욱 강력할지도 모르는 능력이 있어. 나를 따르는 이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그들의 힘을…… 그래, 하나로 합칠 수 있지. 확실히 그건 지배 능력이 맞아. 내가 타고난 힘, 본성이지.”
“그렇다면……!”
수아린의 눈빛이 질책의 성질을 띠었다. 그가 너무 성급했다고 탓하려는 것이겠지. 눈빛만으로도 생각이 읽혀 우스웠다. 정시우는 이쯤에서 그녀의 착각을 깨 주기로 했다. 그것은 실은 그도 조금 전에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배 능력의 힘은 그게 전부가 아냐.”
“네……?”
“방금 아린이 네가 말했지? 타인이 만들어 준 무대가 싫어 내가 뛰어내렸다고. 그건 정말로 적확한 설명이야. 그들은 내 모든 것을 무대 위에서 그럴듯하게 꾸미고, 유도해 왔어. 지배 능력에 대해서…… 그래, 다른 모두를 거두어, 그 힘을 내게로 집중시키는 것이라 생각하도록.”
강탈 능력을 먼저 자각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강탈 능력을 익히면서 정시우는 다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뒤이어 자각한 지배 능력의 성장 방식도 자연히 강탈과 비슷한 성질을 띠었다. 그것이 정답이라 여겼다.
“그런데 용을 완전히 놓아 버린 지금, 오히려 지배 능력이 성장했어.”
“그, 건…….”
여태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오답이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것저것 불필요했던 상념과 능력들을 거두어 내고 나니 아직 그가 걸어 보지 못한 길이 드러났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의 정시우에게는, 그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이건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면서, 동시에.”
정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저 가볍게 주먹을 쥐었을 뿐인데 가공할 마나가 몰려들었다. 마나를 운용하는 마나의 길 스킬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드레인 스킬과, 고유 능력 지배를 동시에 발동한 결과였다.
“마음에 안 드는 모든 것들을 무릎 꿇리는 힘이지.”
“그건…… 너무나 오빠답기는 하네요. 그런데 사실 이전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거죠, 형님?”
“간단해.”
정시우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짧게 입에 담았다.
“지배 스킬의 대상을 바꾸면 돼.”
[호오.]
바로 그 순간, 실로 적절하게도 그들을 인식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조금 전 거대한 전투가 있었기에 대부분의 화신의 전장은 텅텅 비어 있었는데, 혹시나 더 남은 것이 있을까 봐 돌아다니던 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나 반가울 데가.]
“아, 이 약해 보이는 목소리는 혹시 라이아?”
[후후, 잘도 그렇게 건방진 말을 내뱉을 수가 있구나.]
고개를 치켜들어도 모습을 전부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전날 지구에서 마주했던 미레타의 화신보다도 거대하지 않을까, 정시우는 생각했다.
사실 라이아는 이번 전쟁에서 득을 본 몇 안 되는 신 중 하나. 과거에 비할 바 없이 강대해진 상태였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화신에 반영되었고, 지금 그녀는 화신의 전장에서 마주할 첫 번째 적으로는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 망했다.”
“죽었다.”
두 서포터는 실로 의지가 안 되는 말만 늘어놓으며 정시우를 붙잡았다. 그래도 함께 죽겠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지 울상을 지으면서도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는 않았다.
정말 귀여운 녀석들이라니까, 정시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신]을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