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240화.
정시우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루타가 굉장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짧게 한 마디 해 주었다.
“굉장히 유치한 프로젝트명이네.”
“요정상인들의 네이밍 센스를 무시하시는군요? 듣다 보면 철석같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걸요, 용사님.”
“그거 하지 마라.”
“넵, 영주님.”
정시우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하늘성의 목표는 잘 알겠지만 그것이 자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 잘 알 수가 없었다. 차원용병이 뭘 위한 것인지도 정확히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정시우는 그것을 입에 내려다 말고 그만 스스로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루타에게서 답을 얻어 봤자 그것은 진정한 답이 되지 못할 터니까.
‘내가 태어날 적부터 기적적으로 강했던 것은 모두 그 때문인가? 용사가 될 운명이라서? 용이 점지한 것인가, 스스로 환생한 것인가. 어느 쪽이든…….’
웃기지도 않는다. 그렇게 멋대로 결정되는 운명이라니 이제와 소설에 나와도 욕먹을 이야기다. 정시우는 기가 차 그렇게 웃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 앞에서 루타가 설명을 이어 갔다.
“하늘성은 세상을 수호하고, 그 세상 사람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으는 것을 1차 목표로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모인 힘을 어떻게 할까요? 바로 모든 세상을 걸쳐 단 한 명의 용사에게 집중시키는 것이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저희 요정상인들은 무수한 세상들을 돌아다니며 하늘성의 원조 작업을 이어 온 것이랍니다.”
“…….”
“차원용병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이 단절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야 해요.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해요. 모든 이가, 한마음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하늘성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루타는 그동안 감춰 왔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으며 개운해하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마치 신의 뜻을 용사에게 전달하는 성녀라도 된 것처럼 엄숙하고도 장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모든 세상의 힘을 오직 단 한 분, 영주님께 집중시켜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는 신들을 쳐부수는 것…… 그것이 하늘성의 건설 목적이랍니다.”
“지배라…… 과연. 하늘성의 힘을 통제하고, 모든 이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에 실로 적합한 고유능력이지.”
고유능력은 존재의 가능성, 잠재력. 일부러 그런 가능성을 지닌 이를 골라 용사가 되도록 만들었다면 납득이 간다. 정시우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 외에 용사라는 칭호에 적합한 이가 없을 정도였다.
“혼자서는 무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타인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되는 것…… 그래, 과거 나는 나라는 개인의 특별함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내가 해 온 일들은 결국 타인이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어.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에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지.”
“영주님……!”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듯이 루타가 눈을 반짝였다. 그것은 과거 광룡이 최후의 순간에나 깨달았던 진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모두 내바쳐 하늘성을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말씀이 맞아요. 혼자서 신을 상대하실 필요는 없어요, 영주님. 지금 이대로 모든 세상을 하나로 모으면, 힘은 자연히 영주님을 따라올 거예요. 신들은 하늘성의 진짜 힘을 모르고 있고, 그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땐…… 모든 것이 끝나 있겠죠.”
“모르고 있다, 라.”
정시우는 문득 걸리는 것이 있어 중얼거렸다. 과연 신들은 하늘성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성을 성가신 장애물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 그들의 심장을 찌를 무엇보다도 예리한 칼날이 되리라는 사실은 차마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그럴 터였다.
‘하지만 헥토는 어떨까.’
정시우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광룡의 최후, 꿈속에서 정시우가 보았던 광경의 너머를 알고 있을 유일한 한 명. 광룡의 흔적을 역으로 추적한 결과 열린 세상, 그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최악의 용, 힘의 신. 그는 뭔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를 향한 그의 태도도 설명이 되지.’
외부에서 하늘성의 힘을 건드릴 수단은 없다. 그렇다면 그 힘이 하나로…… 정시우에게로 모이길 기다려, 그를 확보한다면 어떻게 될까. 힘의 신이자 뭔가를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드는 데에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있기도 한 그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왜 그러시나요, 영주님. 제 설명에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나요?”
“……아니.”
그러나 정시우는 헥토에 관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았다. 요정상인들은 광룡의 의지를 받들어 움직이고 있을 뿐인 단순한 종. 헥토를 어찌 막아 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그것은 자신의 몫이 될 터였다. 실로 용사답게, 주인공답게, 마지막 한 수를 감추고 있던 라스트 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거꾸러트리는 것. 그게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확신했다.
“그러면 이제 모두 완벽하군요. 영주님, 그럼 받아 주세요.”
루타가 그렇게 말한 순간, 정시우의 망막 위로 깜박이며 드러나는 문구가 있었다. 정시우는 상념을 거두고 문구를 읽었다.
[2차 전직의 길이 열렸습니다. 당신은 지닌바 능력에 합당한 미래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전에 당신이 앉게 될 왕좌에 합당한 능력을 증명해야 합니다.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유능력 지배 Lv5 달성 0/1]
[스킬 마신 Lv50 달성 0/1]
[휴식처 Lv10 달성 0/1]
[서로 닫힌 세상의 통로를 열어 차원용병을 확보 656,482/1,000,000,000]
그곳에 적힌 것은 실로 정시우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반영하는 업적의 증명이었다. 두 고유능력의 성장과,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아 스스로를 강화하는 마신 스킬의 성장, 그의 터전이 되어 버린 휴식처의 완전한 성장…….
마지막 건인 차원용병의 확보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정시우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도 빠르게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충분한 숫자의 미레타의 파편이 모여 플레이어들이 세상을 넘나들 수 있게 되면서, 차원용병이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지원하는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
정시우는 2차 전직이라는 말과 그것을 위해 필요한 내역을 보며 새삼 감회를 느꼈다. 마치 지하 플레이어가 된 이후의 자신이 모두 이 안에 담겨 있는 느낌이 들었으니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시우는 문득 웃었다. 수아린이 버티지 못하고 기절할 정도로 멋진 미소였다. 그러나 용세하는 그 안에서 무언가 모를 한기를 느꼈다.
“형님?”
“재밌네.”
정시우가 말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성장을 향한 욕구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세상들을 차례로 순회했던 것. 그것은 단지 신의 파편을 긁어모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서 타고난 본성…… 힘을 향한 갈구와, 플레이어로서 활동하며 느낀 진리이며 이상…… 혼자만이 아닌 다른 무수히 많은 이들의 안전과 성장을 바라는 마음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퀘스트를 성공시켜 2차 전직을 하고…… 하늘성과 모든 플레이어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마신 스킬이라도 발동하면 정말 장관이겠어.”
“그럼요, 그 어떤 신도 감히 영주님을 넘보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어쩌면 세상보다도 그의 덩치가 더 커질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이미 그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고유능력 중 강탈은 용의 본성인가. 그렇구나, 내가 놈의 환생인지 뭔지는 몰라도, 광룡이 나를 자신의 대리자 삼고 싶어 했던 건 분명해 보이네.’
비록 광룡에 비하면 정시우의 인생은 짧기 그지없었지만, 그는 용이 안배한 대로 깨달음을 얻어 왔다. 그가 걸어온 길은 어쩌면 광룡의 생을 축약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필요한 것이 모두 그에게 모여 있었다. 부족함이 하나 없었다. 완벽했다.
“영주님……?”
그것이, 실로.
역겨워.
“자유를 얻기 위해 해 온 일들이 모두, 실은 스스로 새장 속으로 걸어가는 짓이었단 말이지. 절묘하게 구축된 환경, 언제고 한 번은 꺾이지 않을 수 없는 무식한 본성, 적절한 조언과 조력…… 그 모두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어.”
“여, 영주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정시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의 자신의 행동조차 다른 누군가 의도한 것이 아닐까, 그것에 대해 마지막으로 깊게 생각하고, 고민했다.
자신이 놓아 버리려는 것의 무게를 돌아보고, 절감했다.
그 끝에 자신에게 남을 것을 계산하고, 실소했다.
“이제, 필요 없어.”
“……네?”
그 불길한 울림에 가뜩이나 뱅글뱅글 돌아가는 루타의 눈동자가 실로 정신 사납게 데굴데굴 굴렀다. 혹시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짚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타이밍에 해야 할 말을 했는데…….
그때, 그녀의 상념을 끊어 버리듯 정시우의 말이 이어졌다.
“용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용의 힘을 탐했지. 강함을 증명하고 싶다면서 동료를 늘려나갔지. 태도는 레벨 1로 마왕성에 돌진하는 용사처럼 당당했지만 실제로는 레벨 99찍고 최강장비까지 맞추려고 하고 있지.”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틀리다는 것도 아니다. 다를 뿐이다.
그래, 다르다.
자신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필요 없어.”
“잠깐만…… 영주님! 주인님!”
정시우는 한 손을 내려 자신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그가 변태라서? 아니다. 그곳에 그의 꼬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하 플레이어가 되는 순간 얻은 꼬리. 그가 다른 세상과 엮였음을 상징하는 바로 그 꼬리. 그것이 그의 손에 붙잡혀,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마구 흔들거렸다. 마치 저항하는 것만 같아 우습다.
[당신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돌연 망막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정시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꼬리를 뽑아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만! 영주님, 그만!”
수아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루타가 기겁하며 정시우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정시우는 담담하게 나머지 일을 이어 나갔다. 과감하게 날개를 뽑아내고, 몸에 돋아난 비늘을 하나하나 긁어냈다. 당연히 마룡의 완갑과 광룡의 정강이받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혈이 튄다. 정시우가 혈인으로 물들어 간다. 그 처참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용세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정시우의 망막에는 쉴 새 없이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카오스 테일이 소멸합니다.]
[카오스 윙이 소멸합니다. 바람의 질주의 힘을 체내로 복귀시킵니다.]
[카오스 스케일이 소멸합니다. 스톤 스킨의 힘을 체내로 복귀시킵니다. 그간의 업적의 결과, 아이언 스킨(Lv98)으로 진화합니다.]
[용의 위엄이 소멸합니다.]
[용의 감각이 소멸합니다.]
[모든 스테이터스가 대폭 하락합니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Lv47이 되었습니다.]
[고유능력, 강탈이 소멸합니다.]
정시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슴팍으로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루타가 급한 김에 마법으로라도 그를 막고자 했으나 소용없었다.
비록 용을 버린다고 해도 그가 지닌 액티브 스킬들, 마나의 길의 힘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것은 그 스스로가 깨달은 마나의 운용법이며, 마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의 별이었으니까.
그 능력으로 그는 자신과 휴식처의 연결을 과감하게 끊어 냈다.
[휴식처와 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마나의 길이 Lv41이 되었습니다.]
“돌려주지.”
정시우는 잔뜩 피가 묻은 빛의 덩어리…… 휴식처의 열쇠를 루타에게 건네었다. 루타는 망연히 그것을 받아 들며 대체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나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주지역의 모두를 부탁해. 역시 난 사람 위에 서는 체질이 아니라서.”
“영, 주님…… 말씀해 주세요, 제가 대체 무슨 잘못을.”
“아무 잘못 없어.”
정시우는 해맑게 웃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냥 이러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