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238화.
“우와, 확실히 마나의 밀도가 무겁네요.”
“만월이 되기 직전의 세상이니까 말이지.”
“저기 보시죠, 형님. 하늘성이 보입니다. 굉장히 거대해 보이는군요.”
하프 에이지와 풀 에이지의 중간 단계에 놓인 지버스(Gibbous) 에이지의 세상에 들어선 일행은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으며 여태껏 그들이 지나온 세상과는 사뭇 다른 이세계의 정경을 관찰했다.
이쯤 되면 인류가 몬스터를 상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몬스터의 양과 질이 터무니없이 높아지기 마련인데, 그런 상황에서도 하늘성이 저렇게 상공에 떠 있다는 것은 즉 이 세상의 인류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는 얘기였다.
“한때는 지구인들이 유독 굉장한 건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렇지만도 않네.”
“그렇다면 신들의 침입과 침략에도 끝끝내 버텨 내며 문명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한 걸까요…….”
수아린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정경을 눈앞에 두고 멍하니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정시우는 그것에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지버스 에이지에서 이미 이 정도의 농도라니…… 까딱하는 순간 화신이 강림할 수도 있겠어. 단지 신들이 서로 눈치를 보느라 일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뿐이지. 만약 풀 에이지로 나아간다면…….’
아마도 그곳은 화신의 전장이라 불리게 되겠지. 거기까지 가면 더 이상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 단지 어떤 신에게 복종하는가, 그것만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오빠?”
“아니, 아냐.”
역시 신이란 것들은 한 놈도 남겨 두지 않고 쓸어버려야 한다. 정시우는 새삼 그것을 다짐하며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이 1년간 무수한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기에, 그의 은신술도 상당히 깊어져 있었다.
“이쪽 세상의 플레이어들과 접촉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아니, 역시 우리가 할 일만 후닥 끝내고 가자.”
“지버스 에이지까지 버틴 인류라면 신의 파편의 위험성도, 그것을 굳이 수거하고 다니는 저희의 위험성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요. 굳이 먼저 건드려 오진 않겠지요.”
그렇다. 크레센트 에이지까지는 세상에 멋대로 들어온 정시우 일행의 모습을 발견하는 대로 공격부터 해 오는 엘프 클라나와 같은 녀석들이 많았다면,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인류가 살고 있는 하프 에이지부터는 그들이 정시우를 두려워하고 경외하면 했지 적대해 오는 일은 없었다.
그가 어떤 신에게도 영향 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힘을 흡수하고 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겠지. 어떤 이들은 정시우를 따라오고 싶어 했고, 어떤 이들은 정시우를 신 대신 섬기고자 했지만 정시우는 아직 발을 붙이고 살아갈 대지가 남아 있는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곳의 인류는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니, 굳이 나한테 기대는 이도 없겠지.”
대신, 이미 인류가 멸망에 이르고 신들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에서 건져 낸 소수의 생존자들만은 기꺼이 거주지역으로 받아들였다.
일전 세상 히토이에서 하늘성의 술식이 기록된 바위를 흡수한 이래 거주지역이 터무니없이 넓어졌고, 그 넓은 공간을 그냥 방치하는 것도 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근 1년간 거주지역에 모여든 이만 해도 수천 명, 거주지역의 전체 넓이에 비하면 한없이 한정된 영역 안에서 그들은 제법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면 시작해 볼까.”
“넵.”
1년 이상 이미 질리도록 해 온 일이다. 그들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탐색기를 조작하여 신의 흔적을 찾고, 곧장 그곳에 날아가 신의 파편을 흡수했다.
그런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로이 두 개의 파편(지버스 에이지인 만큼 파편의 크기도 무시 못할 만큼 컸다.)을 흡수했을 즈음, 탐색기를 들여다보던 수아린이 아, 하고 감탄사를 발했다.
“이건…… 이미 가공된 게 하나 있네요. 그것도 상당히 거대한 흔적이에요. 어떤 신의 파편이려나…… 아, 라이아네요.”
“라이아, 그 녀석도 참 호구라니까.”
“누가 들으면 둘이 친구인 줄 알겠어요.”
그간 거쳐 온 세상 중에서는 신의 파편을 이미 다른 인간이 회수하여 아티팩트로 써먹고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물론 정시우는 그것도 매정하게 회수해 왔다.
비록 그들은 그 힘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 믿을지 몰라도, 실상 그 안의 신의 힘은 전혀 변질되거나 봉인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 원한다면 그 힘은 언제고 해방되어 주위 모든 것을 집어삼킬 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이아니까…… 아마 아티팩트를 스스로 뿌린 거겠지. 여태까지 라이아의 아티팩트만 세 개는 회수한 것 같은데.”
“그야 수만, 수십만 개 이상의 세상을 돌아다니면 세 개 정도는 회수할 법하죠.”
“다른 신은 별로 그런 경우가 없잖아.”
라이아는 다른 신들에 비해 인류를 좋아한다. 그야 모든 신이 끝끝내 인류를 지배하고 싶어 하지만, 라이아는 그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상대가 완벽히 넘어오기 전에 먼저 힘을 적극적으로 빌려주고 마는 것이다. 밀당의 허접이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것까지 회수하고 갈까. 또 귀찮은 일이 되겠네.”
더구나 상대는 지버스 에이지에 이르러 있는 이 세상…… 에서도 가장 강한 상대로 짐작되었다. 하긴 새로운 막이 열렸으니 슬슬 또 소란을 피울 때가 되긴 했지. 정시우는 반쯤 체념하고 날개를 펼쳤다.
실로 거대한, 태양을 가릴 수도 있을 법한 크기의 피막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 순간 그가 품은 용의 기세가 세상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단순히 기세를 퍼트렸을 뿐인데 끔찍한 진동이 일어 일대의 마나와 공명했다!
[용의 위엄 스킬이 Lv46이 되었습니다.]
“아, 오랜만에 레벨 올랐네. 역시 지버스 에이지라서 그런가.”
“오빠의 격을 느끼고 움츠러드는 상대의 레벨도 중요하니까 말이죠…….”
“형님, 이곳저곳에서 반응이 오는 모양입니다.”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러라고 일부러 요란을 떤 것이다. 신의 파편의 위험성은 인지해도 그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내어준 아티팩트의 위험성은 무시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톡톡히 경고를 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
“저건 또 뭐야, 신의 종속인가!?”
“서, 설마 요정상인들에게 말로만 들었던 ‘화신’이 바로 저 녀석인가!”
정시우는 날개를 크게 휘저어 상공을 활강하며 라이아의 아티팩트의 보유자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머나먼 상공 위에서 하늘성의 입구가 열리며 그 안에 대기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눈을 빛내는 것이 보였다.
“아니, 잠깐 기다려 봐. 화신은 그 크기만 최소 수 킬로미터라고 들었는데. 저 녀석은 그냥 날개만 엄청나게 클 뿐이잖아.”
“신의 흔적, 느껴져?”
“그렇다면 최소한 내가 모르는 신인데……!?”
오, 역시 지버스까지 살아남은 세상답게 인류의 지식 정도도 높았다. 조금 뜻밖인 것은 이 세상의 인류로 보이는 이들이 인간보다는 오크나 트롤처럼 피부가 두껍고 구강구조가 특이하다는 점인데, 그런 몬스터들에 비하면 확실히 총기 있는 눈빛이나 슬림한 동체가 독특하게 느껴졌다.
정시우는 그들의 모습을 살피면서도 빠르게 대륙의 상공을 가르고 나아갔다. 당연하지만, 카오스 윙을 지닌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플레이어는 적어도 이 대륙에는 없었다.
“요정상인들과 비슷한 모습, 비슷한 체구의 인류도 있었으니까 말이지. 아, 다 왔다.”
“요새가 마력 반응을 보이는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흣.”
그들의 목적지는 철저하게 방어 목적으로 건설된 인류의 요새의 최상층. 부수려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지만 그의 목적은 신의 힘의 회수이지 인류의 멸망이 아니다.
그는 마나를 감지한 요새의 방어 기재가 발동하는 순간 가볍게 날갯짓을 해 불러낸 바람으로 마나의 결집을 와해하고는, 날개를 축소시키며 최상층의 유리창을 깨부수고 안으로 침입했다.
“큭!?”
“아, 여자네요. 이상하게 일정 시점 이상부터는 세상의 최강자가 여자인 경우가 많다니까.”
“성별의 차이는 던전에서는 별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지.”
“그것 참 고마운 말이긴 한데…… 그쪽 오빠는, 정말 몬스터가 아닌 걸까?”
세상에 들어온 순간부터 있는 대로 존재감을 마구 흩뿌려 내고 있었으니 이 세상의 강자가 그를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라이아의 아티팩트의 소유주는 간단한 옷차림이나마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손에 들린 대검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이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준비할 시간을 준 건 고맙지만…… 그래도 레이디의 방에 함부로 들어온 대가는 크다고, 잘생긴 오빠.”
“크레센트 에이지쯤 됐으면 왜 쳐들어왔냐고 꼬치꼬치 캐물어 볼 텐데,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네.”
정시우는 방을 슥 둘러보았다. 방 안에 널브러진 남녀의 속옷이나 이곳저곳에 감도는 묘한 냄새가 조금 전까지 그녀가 이 방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했다.
그래도 남자는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다. 그런데 같은 남자 입장에서 한심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 정시우의 뒤로 수아린이 숨으며 엄청나게 일부러 내는 듯한 깜찍한 비명을 질렀다.
“꺅, 부끄러워라.”
“세하야, 뒤에서 날아오는 다른 놈들 처리해라.”
“넵!”
“무시!? 오빠 방금 저 무시했죠!?”
이 전투 요새는 인류의 최전선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당연히 아티팩트의 소유주 외에도 인류의 최강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 용세하는 정시우의 말을 듣자마자 랜스를 꺼내 들어, 곧장 그들이 부수고 들어온 창문을 향해 돌진했다.
“이쪽 창문이, 크악!?”
“안에서 뭔가 튀어나왔……!”
“후, 제2격!”
“카학!”
소란을 감지하고 날아오던 이들이 그의 끔찍한 기세를 담아낸 랜스 차징에 차례대로 튕겨 나갔다. 그것을 본 아티팩트의 소유주는 입을 헤 벌리며 중얼거렸다.
“저 오빠도 엄청 강한걸…… 하지만 잘생긴 오빠 쪽이 더 강해 보여. 아무래도 이쪽에 승산은 없어 보이네.”
“죽이진 않을 거야. 너희한테 딱히 악의는 없거든. 그래도 라이아의 힘은 그 상태로 다루기엔 너무 위험해. 회수하지.”
“……그래,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이제부터 한판 제대로 승부를 벌여 볼까 하는 타이밍에, 그녀는 정시우가 한 손에 마나를 모으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냥 대검을 놓아 버렸다.
“음?”
그녀의 마나로 조종되고 있는 것일까? 대검은 그대로 하늘을 부드럽게 유영하여 정시우의 눈앞에 멈추었다. 그는 그것을 낚아채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순순해?”
“이기지도 못할 게 빤히 보이는데 덤벼들 정도로 바보도 아니고. 괜히 열 내다가 정작 중요한 전투에서 못 움직이게 되면 손해고. 그리고…….”
“그리고?”
“안 그래도 요정상인에게 줄곧 들어왔어. 내가 이 무기에 언젠가 잡아먹힐 거라고.”
요정상인들이 미리 손을 써 놓았던 것일까. 정시우는 힘을 과시하는 취미는 있어도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기에, 굳이 사람을 패지 않고 넘어간다면 제일 좋은 일이었다.
“후우, 그럼 감사히 받지. 자, 신의 힘은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돼. 일단 놈들의 의지를 확실히 죽여 놔야 한다니까.”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잘생긴 오빠!”
그는 그 자리에서 라이아의 대검에 머무르는 힘을 모조리 뽑아내, 뇌전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 부츠에 그것을 그대로 밀어 넣어 합성시켰다.
이제 휴식처 외부에서 세례의 터의 힘을 다루는 것도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기에 부츠의 변화도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지닌 힘이 워낙 큰 만큼, 아직 이 정도로는 능력치의 큰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후, 그러면 돌아가 볼까. 다음 세상의 주민들도 너희처럼 순순하기만 하면 고마울 텐데 말이지.”
“역시, 당신이 그들이 말하던 영주님이구나.”
“음?”
부츠의 강화를 마치고 그대로 용세하와 합류하여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 아티팩트를 잃은 여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말에 정시우의 미간이 꿈틀거리자 여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영주님을 만나면 전해 달라고 했어. 이제 곧 준비가 된다고 말이야.”
“효과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이미 그들이 무엇을 꾸미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정시우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자,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 같은 절대적인 강자 입장에서 보면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개미가 백만 마리 정도 모이면 어떻게든 트롤 한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겠어?”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
“후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운걸.”
정시우는 자신의 스킬, 마신을 떠올리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쓰게 웃었다. 그리곤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으로 향했다.
그가 신들의 대량 소멸을 감지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