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234화.
“이거 재미없게 됐네…….”
“각오해라, 이 괴물 놈! 공중도시의 도서관에서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악룡의 부활이 바로 네놈이지!?”
정시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나름의 대하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각기 병장기를 움켜쥐고 포위망을 좁혀 오는 플레이어들을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무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신의 소멸…… 맞는 것 같지?”
“확실하네요.”
“하.”
그야 유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어떤 신도 소멸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정시우도 한 적이 없다. 그래, 어쩌면 아타헤라는 신도 세력이 너무 약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경쟁에서 도태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하필이면 지금 이 타이밍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시우가 모르는 무언가, 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사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이상한 언어를 중얼거리고 있을 뿐 우리를 보지 않습니다.”
“어쩌면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일단 공격하자!”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공격은! 어쩌면 선한 이일지도 모르잖아요!”
더 이상은 대하드라마를 못 들어 주겠다. 정시우는 이제 마악 선해 보이는 여자 플레이어 한 명이 다른 플레이어들을 뜯어말리는 부분에서 만상만화경을 움켜쥐었다. 이미 없어져 버린 아타헤와 연결된 세상이 아닌, 다른 신들과 연관된 세상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렸다.
“다들 수고해.”
“엇, 우리들의 말을 할 줄 아는 것인가!?”
“잠깐만, 잠깐 기다려 봐요!”
아, 저 여자는 틀림없이 주연이다. 그리고 정시우까지 드라마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 잘못 엮였다가는 또 수아린의 이마에 주름이 늘어나게 생겼다.
“너희들끼리 잘 놀도록. 아스타 라 비스타!”
정시우는 과감하게 게이트로 용세하와 수아린을 밀어 넣고 자신 또한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세상이 일변하고, 어두운 밤의 고요가 그들을 찾아왔다.
“가는 곳마다 낮밤이 바뀌니 시차적응도 안 되겠어요.”
“이미 낮밤 따위는 활동에 관계없지 않습니까. ……형님? 아타헤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아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돼서. ……쩝, 그래도 일단은 지금처럼 움직이는 수밖에 없나.”
정시우 입장에서는 신들 사이의 세력 구도에 변화가 없는 쪽이 가장 일을 진행시키기 수월하다. 하지만 변화가 생긴다면 생기는 대로 나쁠 것도 없었다. 단지 그의 방침도 그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빨리 화신의 전장에 진입해야겠어.”
“그 ‘빨리’라는 게 어느 정도로 빠른 거예요?”
“대충 세 달 정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건 빨라도 너무 빠른 걸요…….”
“자, 움직여! 여기도 신의 파편 별로 없다!”
정시우의 기세만 두고 보면 정말로 세 달 만에 후딱 성장을 마치고 화신의 전장으로 돌입할 것만 같았지만 사태는 그의 바람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제아무리 만상만화경이 미레타가 기억하는 모든 세상으로 진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지만 어떤 세상으로 진입할지 사전에 탐색하는 것은 아티팩트의 소유자인 정시우의 몫이었고, 강한 신들의 파편이 집중된 세상만 콕 집어서 골라 갈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추적자의 자물쇠는 표본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정시우가 원하는 난이도를 선정하기가 쉬웠는데, 만상만화경은 정말이지 오만 세계를 다 비추다 보니 일의 진행이 더딘 면도 있었다.
[세상 히토이에 진입합니다.]
결국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 319번째의 세상에 도달했을 때, 정시우는 목표를 하향 조정해야만 했다.
“1년…… 1년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마악 만상만화경을 구사해 새로운 세상 히토이에 들어서, 빠르게 세상 전체에 퍼져 있는 신의 파편의 힘을 측정해 본 뒤에 정시우가 내뱉은 말이었다. 이걸 불쌍하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수아린은 일단 그를 위로하기로 했다.
“그래도 1년이면 많이 양보하셨네요……. 그 정도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아아, 저쪽에서 날아드는 날개 달린 무리가…… 인간과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인류로군요. 이번에도 금방 들켰습니다. 이 세상은 그래도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네요, 형님.”
지금 그들이 도착한 세상 히토이는 크레센트 에이지에 이르러 있었다. 슬슬 인류와 몬스터, 그들을 지배하는 신들의 전쟁에서 명암이 갈리기 시작하는 시기인 만큼, 가는 곳마다 어딘가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뉴 에이지는 아직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을 유지하며 몬스터에게 대항하는 경우가 많다면, 크레센트 에이지는 성공적으로 몬스터들을 막아 냈든 막아 내지 못했든 문명은 반쯤 허물어지고, 새로운 세상의 질서가 정립되는 시기였다.
물론 세월이 세월인 만큼 나름 플레이어들의 수준도 높았으며, 그 어떤 세상을 가든 정시우와 그 세상의 플레이어들 사이의 마찰을 피하기란 힘든 일이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너…… 방금 차원의 벽을 찢고 나타났지? 어떤 신의 권속이냐? 역시 마그네!? 그들에게 힘을 더 보탤 생각이냐!”
“오.”
굉장히 식상한 반응 같았지만 정시우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여태까지 만난 플레이어 중에서는 제일 강한 것 같은데…… 혹시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냐?”
“오빠, 방금 그 대사 되게 마왕 같았어요.”
“……플레이어? 선택받은 자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쩔 테냐.”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그를 막아선 대상은 여자였다. 지구의 복장과는 사뭇 다른 이세계의 정장을 입고, 정시우의 출현을 감지하고는 급하게 상의 위에 방어구를 두른 모습이었으나 그것도 제법 매력적이었다.
툭 까놓고 말해 얼굴이 굉장히 예쁘다. 슬렌더한 몸매도 눈부시게 빛나는 연녹색의 모발도 인상적이다. 더 이상은 수아린의 눈치가 보였기에 정시우는 적당히 시선을 거두기로 했다. 아주 조금 늦었는지 수아린의 눈초리가 샐쭉하니 치켜세워져 있었다.
“오빠……?”
“우리 아린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흠, 그걸로 됐어요.”
“정말 그걸로 됐습니까……?”
가만 생각해 보면 지하 플레이어가 되고부터 줄곧 남자보다는 여자랑 엮이는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정시우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는 그를 막아서고 있던 여자 플레이어가 활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며 한 손을 들었다.
“읏차.”
“뭣!?”
여자가 빠르게 쏘아 낸 빛의 화살이 정시우의 손에 잡혔다. 직후 화살이 심상치 않은 마나의 폭발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전에 정시우가 발한 드레인에 마나가 대부분 흡수당하는 바람에 폭발조차 저지되고 말았다.
“금방 떠나 줄 테니까 그냥 이대로…….”
“이이이이익.”
어지간하면 그 한 수에 정시우와 자신 사이의 힘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자는 경악하여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재차 활을 들었다. 굉장히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적이 강하다고 해도, 세상의 힘을 모두 하나로 합치면 네놈 하나 막아 내지 못할 리가 없어……!”
“으아아아악.”
중학교 2학년 때 썼던 일기를 어머니가 낭독했을 때보다도 심각한 정신적 데미지! 제법 강해 보여 흥미가 생겼었지만 이 이상 어울려 주는 것은 무리였다! 정시우는 여자의 말에 녹아웃 당할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 내고는 서둘러 날개를 펼쳤다.
“얌전히 있다 갈 테니까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줘!”
“어딜!”
그가 행동을 개시하려는 순간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들고, 그 뒤를 이어 다른 플레이어들이 뒤에서 영창한 마법이 쇄도해 왔지만 이미 정시우에게 이 정도는 맞아도 가렵지도 않은 수준!
가볍게 소울 포스를 발동하여 만들어 낸 영체의 그물로 잡것들을 단숨에 걷어 낸 정시우는 가장 가까운 신의 파편이 있는 곳을 향해 날갯짓했다.
“아듀!”
“뭣……!?”
카오스 윙에 깃든 바람의 질주의 힘이 정시우는 물론이고 수아린과 용세하까지도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이탈시켰다. 가히 순간이동과 같은 신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형님, 저 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신경 쓰였던 건데.”
이미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게 된 저 너머로부터 활을 든 여자가 분개하며 날개를 펼치는 모습을 뒤돌아 확인하며 용세하가 정시우에게 물었다.
“역시 저 여자 엘프 아닌가요? 그 뒤에 있던 이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내가 봐도 완벽한 엘프야.”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하는 터무니없는 미모, 게임이나 만화에서나 봤던 길쭉하게 뻗은 귀도 물론 그들이 알고 있는 엘프의 특징과 일치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특징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뭐가 됐든 일단 배척하고 보는 그 사나워 보이는 기세에.”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꺾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불굴의 의지까지…….”
“완벽하군요. 정말 완벽한 엘프예요.”
“그래, 완벽하다니까.”
“……오빠.”
수아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에게 태클을 걸었다.
“그건 엘프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도 얼마든지 지닐 수 있는 특징이잖아요. 지금 대체 뭘 연상하시는 거예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시우는 수아린의 추궁이 더해지기 전 재차 날갯짓을 했다. 아무래도 그 엘프 궁수는 계속해서 그들을 쫓아오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정시우가 한 번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그들의 거리가 터무니없이 벌어져, 정시우가 첫 신의 파편이 있는 곳에 도달했을 땐 이미 정시우의 용의 감각에도 그녀가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긴 어디지. 일단 적대적인 생명의 기척이 넘치긴 하는데.”
“굉장히 거대한 성채로군요. 어쩌면 이 세상은 인간…… 아니, 인류의 영역보다 몬스터의 영역이 더 넓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봤자 신의 파편은 별 거 없어. 오히려 이 세상에 흩뿌려진 신의 파편에 비해 인류와 몬스터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놀라고 있는 참이야.”
잘 하면 곧 하프 에이지로 진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 와서까지 꽝이라니 정시우의 실망감이 얼마나 큰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그때였다. 정시우 일행이 굳이 모습을 감출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성채 내부에 급격히 많은 생명체가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크하아아아아아아! 위대한 마그네 님의 이름으로, 건방진 침입자들을 응징하라!]
[마그네 님의 이름으로,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라!]
성문이 호쾌하게 박살 나며 그 안에 모여든 전사들이 단숨에 뛰쳐나왔다! 그 무리를 이끄는 선두에 신의 파편에서 비롯된 중병기를 들고 있는 전사가 있었으니, 정시우는 그놈을 보며 탄식하고 말았다.
“오크잖아!”
[그렇다, 우리는 위대한 오크다! 마그네 님의 이름으로 강화된 오크!]
[쳇, 엘프가 아니잖아.]
[그래도 좋다. 저 여자 무척 예쁘다!]
“히익!?”
무수한 숫자의 오크 전사들이 자신을 핥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들의 강함과는 관계없이 움츠러든 수아린이 정시우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정시우와 용세하의 눈은 동시에 아득해지고 말았다.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야.”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형님.”
세상 모든 오크가 힘의 신 헥토를 따를 것이라 생각했던 시기가 정시우에게도 있었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오크들에게는 욕망의 신 마그네라는 더욱 훌륭한 섬김의 대상이 있었던 것이다.
“일단…… 다 조져 놓을까.”
“예, 형님.”
“오빠, 아무래도 전 무리예요. 전투 끝날 때까지 들어가 있을게요!”
“그래, 얼른 들어가.”
[쿠와아아아아아아! 저 망할 도마뱀이 예쁜 여자를 숨겼다!]
[죽여, 죽이고 빼앗아!]
수아린이 다급히 미니 사이즈로 변해 그의 가슴팍으로 기어 들어가는 가운데 정시우는 화끈하게 마신의 징벌을 꺼내어 들었다.
엘프와 오크가 판치는 세상, 히토이에는 아직 정시우가 모르는 비밀이 조금 더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