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232화.
“대체 무슨 일이야!?”
“어머, 아들?”
“슈!”
정시우가 집으로 허겁지겁 달려와 보니 부모님과 마리나 일행이 사이좋게 같이 앉아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정시우를 돌아보더니, 다음 순간엔 사이좋게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시우도 텔레비전에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서는 남극 대륙을 배경으로 터무니없이 거대한 거인과 화신의 괴수대결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하도 거대하여 한참 멀리서 찍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생생했다.
“이야, 잘 찍었네.”
“우린 생방송인 줄 알고 아들을 응원하고 있었지 뭐냐.”
아버지가 머쓱하게 대꾸했다. 그 옆에서 벌떡 일어난 마리나가 곧장 정시우에게 몸을 던졌다. 물론 그녀가 상상하던 감격적인 포옹은 원천적으로 차단당했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슈, 저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아니 안 다쳤어!?”
“별로 안 다쳤어. 쟨 약한 놈이거든. 그리고 슈라고 부르지 마.”
“저게!?”
TV 속에서는 한창 미레타의 화신이 무수한 거울로 전신을 뒤덮는 광경이 비추어졌다. 정시우와는 달리 사물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인공위성 카메라의 화면에는, 미레타의 화신이 세상을 모두 비추는 하나의 거대한 거울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오, 저렇게 보니 또 참신한데.”
“참신한 수준이 아니잖아!?”
적어도 여태까지는 자신과 같은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던 것처럼 여겨졌던 정시우가, 수십 킬로미터 이상의 신장을 지닌 말도 안 되는 거인이 되어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도 안 되는 거인과 맞붙고 있는 것이다. 마리나가 느끼는 상실감과 분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냐. 사랑과 용기…… 나머진 기합으로 어떻게든.”
“아들…….”
단순히 전 세계를 향한 과시라기엔 너무 갔다. 이로써 더 이상 정시우와 일반 대중 사이의 소통은 불가능해질 터였다. 신으로 추앙받든가, 괴물로 배척당하든가 어느 쪽이든 그는 일반인과 눈을 마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시우의 어머니만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너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야?”
“다른 세상.”
정시우는 짧게 대꾸하고는 덧붙였다.
“더 강해지러 가.”
“시우 넌 정말……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구나.”
“당연하지.”
자신이 타고난 강함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일찍이 어린 시절의 정시우가 선택한 결론, 바로 자신이 타고난 것 따위는 별것 아니게 보일 정도로 강해지는 것. 그것만을 위해 달려온 삶에 후회도 미련도 없다.
“그래서 그전에 인사드리러 왔어요. 설마 얘네도 같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떠나기 전에 보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네.”
“자, 잠깐만. 나도 데려가!”
마리나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세리아도 마찬가지 표정이었다.
“시우 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제 맹세를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
유일하게 이서희만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가 정시우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나마 그녀가 3인 중에는 제일 현실적인 성격이기에 선뜻 말을 내뱉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정시우는 그녀에게 작게 웃어 주고는 말했다.
“너무 위험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소중한 친구들을 그 길에 끌어들일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럼 아린이나 세하는!”
“이 녀석들은 내가 죽으면 죽어. 물리적으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야. 물론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정시우의 말에 담긴 의미를 눈치챌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는 바보가 있었다.
“나도 시우가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좋아해 줘서 고맙다. 마리나, 나도 네가 있어 제법 즐거웠어. ……하지만 더 많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그러니 넌 내가 없어도 잘 살아 줬으면 좋겠다.”
“크우우…….”
수아린의 머릿속에서 팡파레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기쁨을 티 내기에는 죽상을 하고 있는 여자가 너무 많았기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수아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시우는 쩌적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엔 부모님을 향해서였다.
“일이 좀 정리되면 다시 데리고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올게요.”
“오냐. 약속이다?”
“당연하지.”
이대로 영영 떠나 버린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시우는 스스로 조건을 달았다. 조만간,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부모님께 약속했다. 아들이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 신기하게도 어딘가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아린아, 부디 건강하거라. 시우가 바보 같은 짓 하더라도 버리지 말아 주렴.”
“버리다뇨, 제가, 언감생심…….”
이미 수아린을 완전히 며느리 취급하는 어머니의 말에 수아린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정시환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정시우와 용세하의 어깨를 각각 두드려 주었다.
“오랜만에 얼굴 좀 봤다 싶으면 이렇게 사고를 치는구나. 부디 무사히 돌아와라. 시우도, 세하도.”
“누굴 걱정하는 거야, 아버지 아들인데.”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아버님.”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성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정시우는 그들에게도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리 눈치가 없는 자신이라도 지금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짧게 이렇게만 말했다.
“나중에 보자.”
한 번 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혹시나 몰라 그간 얻은 방어용 아티팩트 따위를 테이블에 수북이 쌓아 둔 정시우는 그제야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곳을 나왔다.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당분간 말이 없었으나, 곧 정시우의 어머니가 손뼉을 치며 명랑하게 외쳤다.
“우리 밥 먹자! 원래 기운 없을 땐 밥 먹고 힘내는 거야!”
“아냐.”
마리나가 부정했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동자에 투지가 어려 있었다.
“던전에 갈래.”
“질린다, 너. 남자한테 차인 화를 몬스터한테 풀 생각이야? 난 잠깐 내 생각을 정리…… 히익.”
“…….”
세리아를 돌아보는 마리나의 눈빛이 너무나도 무서운 나머지 세리아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리나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엄청나게 강해져서 시우가 나를 두고 간 걸 반드시 후회하게 해 줄 거야. 내 첫키스를 받아 갔으면서 이렇게 도망치는 건 납득 못해.”
“네가 강제로 한 거면서…….”
“다들 따라와, 지금부터 잘 시간도 없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해! 어머니, 나중에 봐!”
마리나는 정시우가 남긴 것과 똑같은 말을 남기곤 기운이 쭉 빠져 늘어진 상태인 세리아와 이서희를 붙잡아 끌고 집을 뛰쳐나갔다. 그 자리에 남은 이들은 눈만 깜박이며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우리끼리라도 밥 먹을까?”
“그다음엔 저 사태의 여파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나 얘기해 봅시다. 시우 녀석, 마지막까지 큰 숙제를 남겨 두고 가는구만.”
“그러게 말이야. 그냥 다 며느리 삼고 싶었는데 말이죠.”
“여보, 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정시우는 지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개미굴을 청소했다. 그러나 막상 새로 생겨난 개미굴도 별로 없었다. 신들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하늘성 던전도 전체적으로 약화되고, 그와 반대로 전체적으로 향상된 수준의 플레이어들이 제법 공략을 준수하며 던전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앞으로도 그리 걱정할 일은 없겠지. 조금 정도 지상으로 터져 나와도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을 테고.”
“개미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 기분이 묘한걸요. 처음 오빠의 서포터가 되었을 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막막했는데 말이죠…….”
아니 잠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막막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잖아? 생각해 보면 그때와 지금, 다른 것은…… 굳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으려나. 수아린은 정시우의 손을 살짝 쥐며 볼을 발그레 붉혔다. 뒤에서 용세하가 외쳤다.
“이제 그만 출발하시죠!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다른 세상의 모습이 기대되어 정말로 참을 수가 없군요!”
“아, 그러고 보면 세하 너한테는 미안하게 됐다. 세리아랑 잘 해 보게 도와주고 싶었는데…….”
“갑자기 기획 의도를 알 수 없는 소개팅 얘기를 꺼내셔도 대답이 곤란합니다만!?”
머나먼 과거 생겨났던 오해를 새삼스럽게 풀고 난 후, 셋은 마지막으로 휴식처에서 식사를 했다. 어째선지 루타도 함께였다.
“화신과의 전투를 겪었다고는 해도 당분간은 그들이 다스리는 하위 세계, 그들이 정복하고자 하는 다른 세상들을 탐사하시게 되겠죠. 그 세월들도 결코 짧지만은 않을 거예요.”
“짧아질걸.”
“그렇게 단언하시니 조금 무서워지려고 하잖아요. 지금 신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세상의 숫자만도 대체 얼마나 되는 줄 아시나요? 우리 요정상인들이 밤잠도 줄여 가며 빨빨거리며 돌아다녀도 그 세상들을 모두 밟기가 힘들 정도랍니다!”
“세상을 전부 훑을 필요는 없잖아. 미레타가 말했던 화신의 전장…… 그곳에 들어가도 건사할 수 있겠다, 할 정도의 확신이 설 때까지만 돌아다닐 거야.”
루타는 그 확신이 서는 시기가 언제일지 두려워 묻지 못했다. 갑자기 세 달, 같은 대꾸가 돌아오면 대답이 곤란한 것이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비록 영주님께서는 강해지기 위해 많은 세상들을 거칠 뿐이지만…… 그 세상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그들에게는 영주님이야말로 구원자가 될 거예요.”
“멋대로 구원받으라지.”
“거기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
루타는 또 루타 나름 꾸미는 것이 있는지, 정시우의 지그시 꽂히는 시선에도 기분 나쁜 주제에 귀여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정시우가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수아린에게 한 그릇을 더 달라고 부탁할 즈음, 루타가 넌지시 그에게 부탁했다.
“차후 미레타의 파편을 얻으시게 되면 저한테 좋은 가격에 팔아 주시지 않겠어요?”
“응? ……아, 과연. 그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알아차리셨어요!?”
“너희가 하는 짓이 모두 일관성 있는 일이니까 그야 당연하지.”
정시우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지만 이내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힘이 루타에게 넘어가는 정도로 큰일이 일어날 리도 없었고, 정시우의 예상대로라면 오히려 다른 모든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 되어 줄 터였다.
“그 정도야. 좋은 거래 기대하고 있을게.”
“물론이죠, 영주님 특권으로 저한테 특별 서비스까지 받아 가실 수 있답니다!”
“아, 서비스는 미리 거부해 둘게. 그 게임 안 한다니까.”
“너무해!?”
식사를 한 후 개운하게 샤워까지 마쳤다. 할 일을 모두 마쳤으니 한숨 푹 자고 출발하기로 했다. 이미 생리적으로는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났음에도, 심리적 안정을 취하는 데에는 역시 평범한 사람의 사이클이 최고라는 이유에서였다.
“자, 그러면…….”
“오, 오빠…….”
낮의 일이 있었던 터라 수아린은 내심 정시우가 대담하게 나오지 않을까 긴장감과 기대감과 흥분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정시우는 그런 그녀의 기대감이 무색하게도 매정한 말을 내뱉었다.
“다들 푹 자 둬. 내일부턴 다시 낯선 환경에 내던져지게 될 테니까.”
“옙.”
“어, 어라?”
정시우는 당황한 수아린의 이마에 살짝 알밤을 먹였다.
“내일 보자.”
“아, 으으…… 네에.”
“그러면…….”
“넵.”
정시우는 그렇게 수아린을 침실로 보낸 후, 아직 떠나지 않은 용세하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가 곧장 창고로 달려가 술병을 몇 개인가 가져왔다. 척하면 착이었다. 물론 용세하의 표정도 조금은 복잡했다.
“선배님이 기대 많이 하고 계셨을 텐데.”
“아니, 아린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실은 낮에 그건 실수였어…….”
용세하와 둘만 남게 된 순간에야 정시우의 얼굴에 조금 홍조가 돌았다. 마리나를 거절한답시고 간접적으로 수아린에게 고백한 꼴이 되었으니 부끄럽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아, 좀 더 제대로 된 환경에서 분위기 잡고 고백했어야 했는데.”
“형님도 참 세세한 걸 신경 쓰신다니까.”
“어떻게 하지, 지구 떠나기 전에 확실히 해 두는 게 베스트였는데 이젠 어정쩡해서 뭘 못하겠잖아!”
“진정하시고 잔 받으시죠, 형님. 밤은 깁니다. 다 들어 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두 명의 남자는 날이 샐 때까지 술을 마셨다.
물론 그들의 컨디션은 심리, 물리적인 요인으로 결정되는 수준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기에 다음 날 출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지만, 다른 세계로 떠나는 날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개판이었다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