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231화.
세례의 터라고 거창하게 말한 것치고는, 주방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단지 원래 요리를 위한 공간이 베이스가 되고 아티팩트의 가공이 부가 되었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마치…….
“고대인의 부엌인가. 여기서 뭘 하든 납득이 갈 것 같아. 요리를 하든 살인을 하든…….”
“그 외에 적합한 다른 표현이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수아린도 그 표현이 실로 잘 들어맞는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곳의 규모가 굉장히 거대해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을뿐더러, 굉장히 단단하고 칙칙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솥이나 도마, 둔탁한 칼 등은 제사 도구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솥이 좋겠군요.”
“고르는 의미가 있는 거였냐, 이거?”
세례의 터를 둘러보던 루타가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툴툴대면서도, 정시우는 녀석의 충고를 참고하여 거대한 금속의 솥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투입하는 재료는 지극히 간단. 추적자의 자물쇠, 그리고 미레타의 파편이다.
“설마 제 살아생전에 추적자의 자물쇠가 진화하는 순간을 보게 될 줄이야…….”
“너 대체 몇 살이냐.”
“영주님을 향한 저의 마음만은 영원한 17살이랍니다!”
정시우는 루타를 무시하고 할 일을 하기로 했다. 휴식처가 9레벨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는 대충 그에게 주입되어 있는 상황. 세례의 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이대론 싱거울지도 모르니까 간장을 조금 넣을까.”
“오빠!?”
“미안해, 농담한 것뿐인데 그렇게 기겁할 줄은 몰랐어.”
하지만 포션은 실제로 몇 병 정도 넣었다. 추적자의 자물쇠와 미레타의 파편, 두 거대한 힘을 자연스럽게 이어 주기 위한 매개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포션을 넣자마자 제법 괜찮은 반응이 왔다. 그것을 본 수아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포션이죠?”
“왜냐면 이 포션은 내 피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거거든. 신의 힘을 융합하고 수정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담겼으니 아티팩트 가공의 부재료로는 제격이지 않겠어?”
“……?”
수아린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생전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정시우 또한 그 사실을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휴식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
포션의 생성에 제법 시간이 소모되는 것도, 휴식처가 진화할 때마다 그 시간이 줄어들고 개수가 늘어나는 것도, 모두 그것이 직접적으로 정시우의 성장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1시간에 피 100리터쯤 뽑는다고 문제될 수준은 벗어났지. 그러니까 걱정 말고 마시면 돼.”
“100리터면 명백히 오빠 체중보다도 무겁잖아요!?”
“바보야, 피는 계속 생산되잖아.”
“지금 대체 누가 바보인 거죠!?”
이미 정시우의 무력이 인지의 영역을 초월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기본적인 부분에서 헤매고 마는 수아린이었다. 본인의 신체 또한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언젠가 그녀 또한 깨닫게 되리라. 흉부의 비약적인 발전이라든가, 여러 가지로 말이다.
정시우는 아직도 납득을 하지 못하고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아린을 무시하곤 혼자 솥을 흔들었다. 찰랑찰랑, 불도 때지 않은 솥 안에서 포션이 흔들리며 그 안에 잠긴 재료들을 천천히 녹여 갔다. 사이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스럽게도 여겨지는 잿빛의 빛이 솟구쳤다.
“요정상인은 모두 몇이나 있냐?”
“글쎄요, 모두 모인 적이 없어서 말이죠…… 몇 명은 신에게 잘못 걸려 죽기도 했으니 이젠 서른이 조금 안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요정상인 중엔 누가 제일 예쁘냐?”
“후후, 당연히 제가 제일 예쁘죠. 영주님을 생각하는 마음도 물론 제가…….”
“일단 너는 아니란 얘기구나.”
“영주님!?”
신화의 한 장면이라고 불러도 믿을 수 있을 신비한 광경을 앞에 두고 루타와 정시우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 정시우는 지구에서 살아갈 지구인들에게 관심을 두기보다, 앞으로 자신과 엮일 일이 많을 요정상인들에게 관심을 두는 쪽이 더 현명했으니까.
어쩌면, 언젠가 이들과 공동전선을 펼쳐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이 하늘성, 개미굴과 관계되어 있고, 신들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영주님은 정말 저를 너무 푸대접하시는군요. 저는 항상 영주님만을 생각해서…….”
“추적자의 자물쇠도 팔아먹으려 했지.”
“후후, 사랑은 게임과 같아서 너무 쉬우면 금방 흥미가 식는 법이랍니다. 영주님을 향한 저의 사랑도 언제나 하드모드를 지향하고 있어서…….”
“그거 요즘 나오는 폰겜 하고 비슷한 거 아니냐. 과금해야 키스할 수 있고 그런 거.”
음, 역시 요정상인들에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 녀석들과 공동전선은 무슨 공동전선이란 말인가.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솥을 마지막으로 한 번 흔들었다. 성대한 빛이 터져 나온 직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빛이 사그라졌다.
“됐다.”
“제법 거대한 힘이어서 그런지 애를 먹였네요.”
“읏차…… 으음?”
정시우는 곧장 솥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솥이 워낙 거대해 한참을 뒤적인 끝에야 손가락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팔을 한껏 길게 뻗어 그것을 집은 정시우의 표정이 살짝 오묘해졌다.
“이건 거울이 아닌데.”
그는 그것을 곧장 솥 바깥으로 꺼냈다. 손가락 두 개로 충분히 집을 수 있는, 작디작은 투명의 구체……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수아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평범한 유리구슬처럼 보이는데요?”
“오, 이런.”
그러나 루타의 반응은 달랐다. 검은자와 흰자가 반복되는 그녀의 신비로운 눈동자 속 아주 깊은 곳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이 유리구슬, 지구를 비추고 있잖아요……!?”
“네……?”
“아주 대충은 내용물이 있다는 것이 저한테도 보입니다만, 아무리 봐도 분명한 모양새를 띠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요…….”
수아린과 용세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정시우만은 용의 감각을 돋워 유리구슬 안에서 반짝이는 상을 모조리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그제야 그도 알아차렸다.
“정확히는 지구의 모든 마나를 비추고 있는 거야. 그 녀석, 잘도 이런 짓을 하고 다녔군.”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요……?”
“[신]이라 불리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영주님은 그것을 훌륭히 카피하신 거예요. 카피 전문가의 것을 카피하다니 재미난 일이군요.”
“훗, 페이커 따위 별 거 아니지.”
곧 정시우의 눈앞으로 유리구슬이 지닌 정보가 떠올랐다. 어느 정도 정시우가 예상하고 있던 대로였다.
[만상만화경]
[랭크 ? SSS]
[근원의 힘을 찾은 거울. 기운을 뒤집고, 비추며, 길을 연다. 세상에 존재하는 힘이라면 무엇이든 어디까지고 추적할 수 있다.]
“……좋았어.”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도 전율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아티팩트는 정시우에게 흡사 전능감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미레타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던 모든 신의 세상…… 그 어떤 세상이든 이것으로 넘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거라면 하늘성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겠네요. 거미줄처럼 연계된 모든 신의 힘…… 그 힘이 닿아 있는 어떤 세상이라도!”
루타가 눈을 굉장한 기세로 빛내며 달라붙었다. 설마 이 정도로까지 성공적으로 미레타의 힘을 가공할 수 있을 줄은 그녀조차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시우는 매정하게 그녀를 떼어 냈다.
“안 빌려준다.”
“너무해! 뽀뽀, 뽀뽀 해 드릴 테니까!”
“아, 난 그 게임 안 할 거야.”
더욱이 이 아티팩트는 요정상인들이 구사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아티팩트의 힘으로 기운을 변환시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아티팩트의 주인에게 부담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모든 기운을 다스릴 수 있는 정시우라면 그런 면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윽고 그 사실을 깨달은 루타는 볼을 퉁퉁하게 부풀리며 정시우에게 충고했다.
“그 아티팩트는 영주님께 분명 엄청난 자유를 안겨 줄 거예요. 하지만 조심하셔야 해요, 이미 미레타의 화신과 전투를 벌여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아직 영주님의 힘은 그들에 비하면 미약하니까요.”
“괜찮아.”
정시우는 유리구슬을 매만지며 시험 삼아 그 안에서 빛나는 힘 몇 가지를 확대해 보기도 하고, 지금 당장 자신이 넘어갈 수 있는 게이트를 만들어 내 보기도 하며 루타에게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곧 놈들과 정면에서 싸울 수 있을 만큼 성장할 테니까.”
미레타의 화신은 다른 신의 화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했다. 정시우도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 예를 들어 라이아의 화신이 두렵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렵다는 말은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보고, 최후의 발악으로도 더 이상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때나 내뱉는 말. 미래가 닫힌 자들에게만 허용된 말인 것이다.
“루타,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네게 들를 테니 지금은 쉬고 있어. 난 떠날 준비가 다 됐으니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와야겠어.”
“그렇다면 저도 영주님의 부모님께 인사를…….”
“어딜.”
루타는 거주지역으로 쫓겨나면서도 정시우에게 어필을 멈추지 않았으나 수아린의 가드는 지극히 단단했다. 정시우는 유리구슬…… 만상만화경을 품속에 소중히 집어넣은 후, 일행과 함께 세례의 터를 나왔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면 바로 출발하는 건가요?”
“그럴까 생각 중이야. 어차피 컨디션은 만전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실감이 나질 않아요. 실은 남극에서 전투를 벌일 때부터 그랬지만요…….”
무조건적으로 정시우를 따른다고는 해도,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으며 위험하기까지 한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 그리 쉽고 간단한 일은 아닐 터였다. 정시우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며 그녀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넌 앞으로 어딜 가든 내 옆에만 붙어 있으면 돼. 그곳이 네게 가장 편안한 장소가 될 테니까.”
“그거 되게 무서운 말이네요.”
동시에 마음 놓이게 하는 말이다. 수아린이 배시시 웃으며 정시우의 손을 맞잡자 금세 둘 사이에서 피어나는 핑크빛 기류에 용세하가 툴툴거렸다.
“저도 형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오냐, 아주 찰싹 붙어 있어라.”
그는 피식 웃으며 나머지 한 손을 뻗어 용세하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런데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기 위해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유령들과 의식을 연결한 순간 정시우의 고개가 좌우로 기울었다.
“두 분이 같이 계시는데…… 아니.”
부모님이 있는 장소에서 다른 익숙한 세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름 아닌 마리나 일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