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228화.
그곳엔 일견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정시우는 자신의 목적지가 이곳임을 확신하고 멈추어 섰다. 그는 날개를 접고 지상에 안착하며 여유롭게 마신의 징벌을 꺼내어 들었다.
“아무리 나라도 조금 헤맸어. 괜히 용의 감각과 육체 감각을 일치시겠다고 씨름하는 바람에.”
[용…… 역시 너는 헥토의 관계자인가?]
“헥토? 아아.”
여전히 어디선가 모를 곳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에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이내 픽 웃어 버렸다.
“난 헥토와는 달라. 적어도 그놈과 썩 좋은 관계는 아니니 안심해.”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불안해지는군. 네놈 용들은 언제나 우리와 같은 존재들을 비웃어 왔지…….]
놈의 목소리는 노인의 것처럼도, 소녀의 것처럼도 들렸다. 위에서 크게 울려 퍼지는가 싶으면 빙판 아래에서 작게 속삭여 오는 것처럼도 들렸다. 적어도 놈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낼 셈이 없다는 것만은 명백해 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아주 다행히도, 네게 있는 용의 힘은 아주 적은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렇게 작은 힘으로도 내 작전에 훼방을 놓을 만큼 섬뜩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너는 너무 거만했다.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거야.]
“미안하지만 여태까지 제법 많이 들어 본 인트로거든. 특별히 할 말 더 없으면 이제 적당히 생략하고 본편으로 들어가지 않을래?”
[후…… 역시 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그 말을 들은 순간 처음으로 정시우의 본능이 위기를 감지했다. 용의 감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캐치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망치를 들어 아래를 내려쳤다. 그것이 무언가에 잡혔다.
[역시 감각만은 좋구나.]
“큭……!?”
용의 감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것을 방금 자신은 어떻게 느낀 것이지? 정시우의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은 북극 대륙은 물론이고 남극 대륙을 지나오며 상대한 거울의 신의 종속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힘이지 않은가!
‘용의 감각이 통하지 않아? 용의 감각은 마나로서 마나를 느끼는 스킬. 단순히 상대의 격이 나보다 높은 게 아니라, 이건…….’
[화신에 대해 들어 보았는가?]
거울의 신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재차 정시우의 육신 앞뒤로 어마어마한 압력이 밀려들었다.
정시우는 용의 감각으로 그 두 압력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만은 파악했으나, 공격의 진체가 어디서 다가오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곳까지 그를 이끈 용의 감각을 믿지 못하는 상황.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큭……!”
[화신이란 신의 아바타다. 단순히 파편을 떼어 내어 그들의 권속에 주입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 물론 권속에 강림하는 강림체와도 다르지. 순수하게 신의 힘의 일부를 정련하여, 신의 의식이 직접 그곳에 깃든다.]
결국 정시우가 택한 방법은 모든 방향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사마귀의 앞발인지, 상어의 이빨인지, 용의 꼬리인지 모를 공격이 그의 전신을 후려쳤다. 거울의 신일지언정 정시우에게 가해지는 데미지만은 끔찍하도록 강렬했다.
[그렇기에 그것은 화신이지만 신이다. 너는 아직 모를 것이다. 진짜 전쟁은 이런 반절도 차지 못한 세상이 아닌, 보름을 넘어 새로운 영역에 도달한 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어떻게…….”
정시우의 육신을 흐르는 마력이 빠르게 그가 입은 상처를 수복했다. 위기상황에서 피의 흐름이 더욱 더 빨라지며, 심장고동이 정시우의 귓가에 쿵쿵 울릴 만큼 커졌다.
“너는 화신의 모습으로 지구에 나타난 거지?”
[역시 이만큼 힌트를 주면 알아차리는 것인가.]
신의 파편을 통해, 혹은 강림체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 아닌, 신의 힘을 직접 떼어 내 의식을 담아낸 화신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현되는 신의 힘. 화신의 힘!
그러니 정시우가 눈치채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이것은 격 이전의 문제다. 2차원의 직선이, 3차원의 직육면체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거울의 신이다.]
“화신의 몸으로 전장에 가 봤자 다른 신들한테 털린다는 얘기냐?”
[…….]
정곡인 모양이었다. 한층 거센 공격이 정시우를 덮쳐 왔다! 정시우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버텨 내며, 마신의 징벌을 거대화해 최대한 놈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그것을 휘둘렀다. 하지만 놈이 그것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놈과 싸우는 짧은 시간 동안 용의 감각과 신체의 감각을 일치시킨다? 그건 터무니없는 과제야. 불가능하다.’
그것은 정시우가 앞으로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다. 조금 위기가 닥쳐 왔다고 금세 각성할 수 있다면 진즉 그 능력을 손에 쥐었을 것이다.
[나의 힘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보다 안전하고 확실하게 나의 세상을 늘려 갈 방법을 찾았지. 알고 있느냐? 무수한 거울로 반사를 거듭해, 끝내 힘은 한 점에 집중될 수 있는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네 능력을 십분 활용해, 본디 화신을 만들어 낼 수 없어야 하는 환경인 지구에 화신으로 강림했다는 것만은 잘 알겠네.”
아마 그것은 헤데아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리라. 크라켄과 아르고스 둘을 합쳐도 지금 정시우가 대적하고 있는 적과 같은 몸집을 얻지는 못할 테니까.
‘……잠깐?’
정시우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말고 퍼뜩 멈추었다. 방금,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뭐지? 뭐가 걸린 거지?
[무수한 신들이 지구를 노렸다. 그들의 파편이 무수히 지구에 떨어졌고, 심지어 어떤 이는 화신의 전장에서 부리는 수하까지도 이 세상에 강림시켰지. 나는 거울, 그들 모두를 비추어 이곳에 나를 강림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모르게, 은밀하게, 그래. 그들이 나를 얕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화신의 전장에서 부리는 수하…….”
분명 크라켄과 아르고스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래,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제 생각났다. 그들은 화신의 전장에서 활약하는 몬스터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그들이 신을 닮아 가기 위해 추구하던 것은…….
‘거인화…….’
정시우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래! 방금 정시우는 그들이 몸집을 합쳐도 화신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정시우가, 본능적으로 눈앞의 적은 ‘거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용의 감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인지가, 그 가능성이 내 안에 있어. 이것을 확실히 찾아내면 분명히 감각의 통합이 가능해진다! 육신과 용의 감각의 통합이……!’
하지만 아까도 결론 내렸듯 그것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정시우가 본능적으로 적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로써 비로소 반격이 가능해진다.
[용의 자식아, 나는 이 세상을 얻어야겠다. 너라는 눈부신 빛을 짓밟아 으깨, 지금은 당분간 이 대륙의 암흑을 그대로 즐겨야겠구나.]
“큭……!”
그는 다시 공격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어디서 다가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정시우는 그 순간 온 힘을 다해 허공으로 솟구쳤다. 중간에 그를 막아서고자 하는 것이 있었으나, 바람으로 전신을 두른 정시우는 어떻게든 그것을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후우…….”
[날파리 주제에 제법 빠르구나. 하지만 그것도 곧……!]
놈을 무시하고 하늘에 홀로 서, 거대한 대륙을 내려다본다. 분명 놈은 이것과 같은 경치를 보고 있을 터이다. 아아, 그러니 그가 놈과 마주하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다.
정시우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마나를 담아 고함을 질렀다.
“다 모여어어어어어어어어어!”
용의 위엄을 담은 워 크라이가 남극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적을 물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군을 소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효과는 탁월했다. 그 순간 바로 경계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이 고개를 퍼뜩 들었고, 남극해를 정리하고 있던 세이락시아 역시 그를 감지하고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확실히 그들은 강력하다. 신의 수호자라고 해도 믿어 줄 수 있지. 하지만 화신을 상대로는 무리다. 너는 너와 함께 저들의 무덤을 마련한 것이다.]
“큭!”
다시 다가온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 공격, 그것을 맞상대하려면 그 또한 지금 자신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 육신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오빠…….”
“너희도 도와줘야겠다.”
“얼마든지요!”
합체 로봇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용세하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저희의 역할은 그것이었던지도 모르죠. 오빠 마음대로 하세요.”
“좋아.”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소울 포스의 낙인이 미치도록 번쩍이며, 그 안에서 잠자고 있던 모든 영혼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주인님.]
[나의 주인님.]
“저들을 모두 내게로.”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가 부리는 모든 유령은 거리의 개념을 지워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거울의 신, 미레타의 화신이 재차 공격을 가해 오기도 전, 유령들은 대지의 몬스터들과 수중의 몬스터들을 모두 그에게로 끌어왔다.
[뿌이!]
[슈……!]
지금은 그들 모두의 뜻을 일일이 물을 시간도 아깝다. 그는 서둘러 모두를 받아들였다.
신의 정체에 대해 보다 깊이 깨달은 정시우가, 비로소 그들과 같은 전장에 서기 위한 자격을 손에 넣는 순간이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집니다. 부여 스킬이 모든 고유능력의 영향을 받아 진화합니다. ‘마나의 길’ 스킬을 얻었습니다. 모든 마나를 부려,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집니다. 모든 고유능력의 영향을 받아 ‘마신(魔身)’ 스킬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고유능력에 복종하는 모든 대상과 융합하여, 육신과 마나와 영혼을 어우르는 마신으로 거듭납니다. 단 아직 경지가 부족하여 융합이 완전하지 않으니 주의하세요.]
99레벨로 성장하고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드디어 부여 스킬이 진화했다.
자신의 육신이 되었든 사물이 되었든, 마나를 부여한다는 개념은 너무 낡고 연약하다. 마나를 다룬다는 것은, 타자와 자신과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 그렇게 되면 그곳에 남는 것은 오직 마나가 지나는 길뿐이다.
정시우는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그 덕에 간신히 거인화라 통칭하던 능력을 스킬로서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순간, 그 스킬 또한 사라지고 그와 하나가 될 터였다.
[뭐……? 용도, 하물며 신의 자격도 얻지 못한 네놈이 지금…… 신을 따라하겠다는 것이냐?]
“제법 유세를 떠는구나. 하지만 난 지금 그 누구를 따라하는 것도 아냐. 나는 나의 길을 걷고 있는 거다.”
그를 따르는 모든 이가 그에게 기꺼이 복종했다. 허공에서 정시우의 새로운 육신, 마신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형성되었다. 정시우는 그 안에 파묻혀 더없이 안락한 기분을 누렸다.
[그 연약한 몸뚱이, 초파리만 한 뇌로 어찌……!]
무수한 존재가 그의 자아에 흡수되며 그의 정신을 보다 견고하게 만들어 주며, 그것에 영향을 받아 단단하고 강건한 육신이 만들어졌다.
무수한 타자를 받아들여 확고한 하나의 자아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은 신들이 구사하는 화신의 술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술, 오직 정시우에게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어떻게!]
“그건 말이지.”
정시우가 눈을 떴다. 이젠 놈이 보였다. 빙하의 대지에 반쯤 몸을 파묻은,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하늘을 뚫을 듯이 높이 치솟은 거인…… 거울의 신, 미레타의 화신이.
“내가 졸라 잘났기 때문이야.”
정시우가 마신의 징벌을 쥐었다. 신장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인이, 비로소 첫 발을 내딛어 적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