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227화.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변장하고 어떤 놈이 덮쳐 올지 모르는 거울의 대륙, 빙하로 가득한 바다를 조심스레 나아가며 정시우는 새로운 수련의 길을 찾고 있었다.
순수한 자신의 시야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정시우는 시야 정보와 용의 감각이 주는 정보를 일치시킬 방법을 연구 중이었다.
‘신의 파편이 문제가 아냐. 어쩌면 이곳에서 육체와 스킬의 통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물론 그것은 정시우가 이 남극 대륙을 이겨 낼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리 쉽게 되는 일도 아닐뿐더러 단기간에 해결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차라리 무력으로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지금 정시우는 굳이 더 어려운 길을 돌아가려 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원래 지금 오빠의 방식으로 상대하는 적은 아니겠죠?”
“단순히 진실을 가리고 싶은 거라면 그건 간단해. 마나로 놈의 마나를 밀어내면 되는 일이거든.”
물론 남극 전역을 거울의 신…… 아마도 미레타라는 이름의 신의 마나가 뒤덮고 있는 만큼 누구나가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세이락시아와 에리우를 비롯한 강자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둘은 지금도 그렇게 해서 각각 바다와 육지 영역을 개척하며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뒤를 그들의 수하들이 졸졸 따르며 보조하고 있었으니, 이대로 놔두면 세 달 정도로 순조로이 남극을 접수할 수 있을 터였다.
“바다의 세이락시아와 지상의 에리우…… 지구에 하나도 탄생하기 힘든 기적의 가능성이 둘씩이나 탄생해, 그것도 같이 모여 움직이리라는 건…… 아마 거울의 신이 아닌 그 누구라고 해도 예측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이대론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용세하와 수아린은 세이락시아와 에리우만큼 강하지 못하다. 어디서든 제 한 몸 건사할 재간은 있지만 혹여나 신의 파편을 많이 품은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르기에, 정시우는 일단 그들을 미니 모드로 돌려 자신의 품에 넣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은 피막의 날개를 크게 펼쳐, 세이락시아와 에리우와는 다른 방향, 남극의 중심점을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눈에 보이는 것이 거짓이라 해서 자신의 눈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어디까지나 단련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뚫어져라 눈을 크게 뜨고, 용의 감각과 육신을 최대한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기합을 넣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어 보이겠다는 정시우 본인의 의지였다.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를, 좀.’
[꾸에에엑!]
몸에서 긴장이란 긴장은 모두 풀어 버린 채, 완벽한 자연체의 모습이 되어 하늘을 유유자적 날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만만한 사냥감처럼 보이겠는가.
[킥!]
“지금 건 내 눈으로 봤나? 아냐, 하다못해 귀로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 같은데.”
그를 최대의 적으로 규정한 거울의 신의 명에 따라 그에게서 드러나는 완벽한 틈을 찾아 날아드는 거울 몬스터들이었으나, 극한의 환경에 이른 지금 정시우의 용의 감각은 과거 없었던 만큼 예리하게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괴력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완력은 점점 성장하여 지금에 이르러선 가히 반신의 경지에 이른 상태! 일단 한 번 위치를 들켜 잡히기만 하면 그대로 죽음이었다.
[쿠아아아아!]
“아냐, 이것도 아냐.”
“전 오빠가 대체 무엇과 싸우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분명 자기 자신 아니겠습니까……?”
분명 뉴 에이지 진입 이전의 남극해는 그리 거대하지 않았지만, 크레센트 에이지로의 진입이 완벽히 끝나고 거울의 신의 지배를 받게 된 지금은 정시우가 2시간을 비행해도 간신히 바다를 벗어나 대륙의 초입에 이르게 될 만큼 바다가 확장된 상태였다.
[용의 감각 스킬이 Lv16이 되었습니다.]
“좋아, 드디어 1 올랐다.”
정시우는 차디찬 남극 대륙의 빙판(대지 또한 원래의 남극 대륙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에 발을 디디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개구리 몬스터의 마석으로 강화된 탱탱볼을 사용해 집중적으로 용의 감각을 갈고닦았던 1차 수행 이래 정말로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고서야 용의 감각이 성장하는 일이 없었는데, 다른 신의 파편과 싸운 것도 아니고 남극해를 지나오는 동안 스킬레벨을 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순수 신체와의 일치 쪽은 아직 답이 안 나오네…….”
“용의 감각이 육신과 일치된다면, 그건 즉 형님이 용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음…….”
용세하의 돌발적인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정시우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냐. 용의 감각은 어디까지나 절대의 영역에 이른 감지능력을 통칭하는 말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확실히 방금 네 지적은 의미가 있었어.”
“예?”
정시우의 용의 감각은 용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 용의 감각의 실체가 어떻건 정시우가 그것을 용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한, 그의 육체가 용이 되지 않는 이상은 육신과 스킬의 일치가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고쳐야 할 것은 나의 사고다.’
조용한 방에서 혼자 집중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을, 사방에 적이 가득한 거울의 대지에서 시도하다니! 하지만 정시우는 오히려 그런 환경이기에 더더욱 집중을 잘 해낼 수 있었다.
‘내 기원에 용이 있건 없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결론은 이미 내린 후다.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 모두를 하나로 합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닌 실체다. 내 스킬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내 육체의 감각이 따라갈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스킬을 스킬이라 구분 지을 필요도 없는 영역으로, 나는 나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신을 넘겠다느니 어불성설에 불과하게 된다. 지구를 나갈 필요도 없이 그냥 이곳에서 늙어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크악!]
[보, 보지도 않고 나를…….]
[미레타 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놈은 지금 힘을 구사하고 있어. 이 거만한 필멸자에게 끝나지 않는 환몽의 공포를…… 쿠학!]
얼음으로 뒤덮인 대륙과 바다를 거대 호랑이와 고래가 휩쓰는 가운데, 날개를 펄럭이며 묵묵히 대륙을 가로지르는 한 명의 인간이 주위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늘에서 반사된 빛이 대지에 부딪혀 난반사되며 용의 감각마저 혼란시켜 왔으나 정시우는 그런 일시적인 변화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그가 추구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거울 너머의 진짜 모습이었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전에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야.’
정시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거인화의 달성을 앞두고 잠시 미루어 두고 있던 보다 본질적인 문제, 육체와 스킬의 합일. 이 대륙에 도착해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 크나큰 힌트를 얻었으니까.
[용의 감각 스킬이 Lv17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지닌 스킬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감지합니다. 보다 깊이 스스로를 관조한다면 변화의 끄트머리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영 헛발질은 아니구나. 내가 노린 게 아니라 다른 게 변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만은 지울 수가 없지만.”
“오빠, 대기가 점점 변해 가는 것 같아요.”
“그렇겠지. 중심부로 들어가고 있으니까.”
본래 남극에는 각 나라에서 연구 기지를 설치하고 관리해 오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뉴 에이지 이후로는 그러한 모든 시도가 좌절로 끝나게 되었다.
정시우는 중간중간 인간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간단히 땅을 뒤집어 그들을 위한 무덤을 만들어 주며 꾸준히 날갯짓을 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다시 다섯 시간을 비행했을 때, 그는 먼저 다른 방향으로 보냈던 엘과 정예 몬스터 무리와 재회하게 되었다.
[슈!]
“다친 녀석은 없고?”
[침 바르면 낫는 수준이니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도 슈, 아무래도 이 이상은 무리일 것 같다. 대기가 순식간에 달라졌어. 무엇보다도 위험한 기척이 느껴진다. 북극에서는 느끼지 못한 기척이야.]
역시 동물인 만큼 육감 하나는 확실하구나. 정시우는 피식 웃으며 엘을 뒤로 물렸다.
“아직 탐사하지 못한 영역이 많지. 너희는 이 주위를 정리해 줘. 북극에 이어 남극까지 접수하려면 애들을 곱게 부려야지.”
[슈, 이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물리, 마력적인 강함과는 별개의, 근원을 짐작하기도 힘든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내 모래의 힘은 이곳에서도 유효하지만, 어째선지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어. 네 강함은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아가야 해. 어떻게 되든 지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끄응.]
정시우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에리우는 그가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그를 더 말리지 못하고 물러났다. 시무룩해진 그녀에게 정시우가 그 딴엔 제법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이 대륙만 완벽히 정리하고 나면 그땐 함께 다른 세계로 넘어가야 하니까, 이곳에서 해 둘 수 있는 준비는 모두 완벽히 해 둬.”
[……알겠다!]
엘의 컨디션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역시 동물은 간단해서 좋구만, 정시우는 속으로만 썩소를 지으며 재차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용의 감각은 제대로 살아 있어, 그와 에리우를 노리고 거대한 창을 찔러 온 기괴한 곤충형 몬스터의 목을 잡아 뜯는 것을 잊지 않았다.
[킥, 키힉……!]
“놈을 따르는 일반적인 몬스터는 단지 다른 신의 권속처럼 기운을 바꿨을 뿐인 평범한 몬스터였지만…… 핵심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놈들의 개성이 심해지고 있어. 순수하게 놈의 능력을 받아들이기 위해 탄생한 괴물들이야.”
“징그러우니까 그거 얼른 죽여 주세요.”
엘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보낸 정시우는 아마도 거울의 신의 힘이 뭉쳐 있을 남극 대륙의 핵심…… 남극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그의 육신에 가해지는 압력이 더해졌다.
물론 그 압력의 절반 이상은 거울에 비춰진 빛처럼 허상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심지어는 그가 나아가는 방향을 헷갈리도록 전 방위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인 마나의 압력이 닥쳐 오니,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과 별다를 바가 없는 환경이었다.
“고작 몇 걸음 걸어왔을 뿐인데 완전히 마경이 되었잖아요!”
“몇 걸음은 무슨, 벌써 30분은 걸었어.”
“제, 제 시간 감각까지 이상해졌단 말이에요!?”
“형님, 말도 안 되지만…… 이곳, 조금 덥지 않습니까?”
“영하 120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네.”
“…….”
수아린과 용세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정시우의 마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면 까딱 실수로 실체화라도 했다간 그 순간 이 대지의 마력에 휘말릴 것 같아 두려웠다.
“거울의 신이 아니라 거짓의 신 아냐……?”
“거울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비추는 거야. 단지 이놈은 자신이 관측해 온 모든 것을 한 시간대에 쏟아 내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짓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이 힘이 다른 신들에게도 강하게 먹히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거울의 본질은 현실을 ‘비추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벽을 뛰어넘지 못한 필멸자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강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야말로 정시우가 이 벽을 뛰어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벽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다른 신들과 싸울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될 테니까!
[용의 감각 스킬이 Lv18이 되었습니다.]
“좋아, 이제 조금 알겠네.”
[정말로 귀찮은 일을 벌여 주는구나, 인간…….]
그로부터 다시 여섯 시간이 지났을 때,
정시우는 비로소 남극 대륙의 중심에 서 있던 벽과 마주하는 데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