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로그인-221화 (221/260)

# 221

221화.

수아린은 그 말을 듣고 저녁 메뉴에 대한 토론이라도 하는 것처럼 평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오빠가 신들과 싸우지 않는다고 해도 당장 지구에 큰 변화는 없겠죠.”

“그렇지. 그저 5천 년 이후에 다가올 전쟁을 모른 채 모두가 조용히 늙어 가겠지.”

“오빠가 신들과 싸운다고 해도 지구의 그 누구도 특별히 득을 보지 않겠죠.”

“내가 이세계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에도 오빠는 신들을 다 쳐 죽이러 가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네요?”

“그렇지.”

정시우가 쓸데없이 상쾌한 표정과 함께 답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 새끼들 다 마음에 안 들거든!”

그놈들이 정시우에게 쫄아 물러나서, 향후 5천 년간 얼굴을 볼 일이 없다고 한들 상관없다.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얻은 힘과 권력으로 앞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이상으로 험난한 전투에 얼굴을 들이미는 꼴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실컷 싸우고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 이제 안 싸워도 되니 멈추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말하는 놈의 면상부터 흠씬 두들겨 줄 것이다.

“물론 싫다는 애들까지 데리고 갈 생각은 없어. 크라켄이나 이 아르고스보다도 훨씬 강한 놈들과 싸우게 될 테니까. 그러니 혹시 무섭다거나 주저되면 솔직하게 말해 줘. 지금 당장은 무리지만, 고유능력을 탐구하다 보면 너희를 서포터 신세에서 풀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무슨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오빠가 간다면 저는 가요.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당연히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오히려 정시우의 태도에 수아린은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처음 그녀와 만났던 시절의 정시우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달려 나갈 뿐이었는데 최근의 그는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져 답답해 보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힘에 대한 탐구까지 난항을 겪고 있었으니, 그녀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도 없어 그녀 본인까지 답답했었는데…… 이것저것 전부 떨쳐 낸 지금의 그를 보니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 음, 그건…….”

포부 좋게 선언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무래도 당장 그의 말을 실천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오빠가 확보한 신의 힘도 별로 종류가 안 되잖아요.”

“그렇지. 이제 지구는 베이스캠프로 삼기에는 그리 적절한 구역이 아니야.”

신들은 지구에서 손을 뺄 것을 다짐했다. 그들이 직접 파편을 내려보내지 않는 이상, 정시우가 지구에 남은 신의 흔적을 추적해 이세계로 가기 위해선 몬스터들이 게이트를 타고 넘어오는 바로 그 순간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사실 생각하고 있는 건 있지만…….”

요정상인들은 지구는 물론이고 다른 세계로의 출입이 자유롭다. 그가 신들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추적자의 자물쇠를 가져온 것도 바로 요정상인이지 않은가.

아마 그들은 정시우가 언젠가 이런 결론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쯤 정시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정시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도 제법 강한 확신을 갖고서.

‘하지만 그전에…….’

가능하면 자신이 지구에서 벌려 놓은 일들을, 우선 완벽히 끝내 놓고 나가고 싶었다. 자신이 없어도 누구 한 명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 놓고 싶었다. 그야말로 5천 년 정도는 이 평온한 상황이 유지될 수 있도록.

“상당히 힘든 일이 되겠군요…….”

“지금의 우리에게라면 그렇게까지 힘든 일도 아니지만 말이야.”

신들이 지구에서 손을 뗐다는 것은 정시우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려도 큰일이 날 것이고, 아무 말 없이 그가 자리를 비워도 결국 몬스터와 인간 사이의 분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균형을 만들어 놓기 위해, 지금은 조금 더 몬스터들을 돌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선 뿌이를 도와 전 세계의 해양을 통합해 놓자.”

[뿌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것 치고는 스케일 한 번 끝내 주네요.”

수아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정시우가 어디를 가든 따르겠다고 시원하게 선언은 해 놨지만, 그래도 당장 크라켄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더라면 기가 죽었을 테니까.

그녀에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가능하면 정시우와 데이트도 몇 번 더 해 두고 싶다. 엘 때문에 생긴 불안감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지구의 바다 대통합? 그 정도면 숨 돌리기로 딱이었다.

“진짜 전쟁을 앞둔 마지막 정비 기간이네요.”

“그렇게 되겠네.”

“해양 정복이 마지막 정비라니…….”

굉장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용세하가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그러나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용세하 역시 훌륭한 이들의 일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은 나가서 밥 먹자. 거인화 이거 제대로 하니까 엄청 지치고 배고프다. 나 타코야키 먹고 싶어.”

“하필이면 저런 괴물을 상대한 직후에 말입니까!?”

“식용으로 빼 둔 크라켄 살점이 좀 남아 있었을 거예요. 오랜만에 힘 좀 써 보죠, 뭐.”

[뿌이!]

거창한 논의의 끝은 결국 저녁 메뉴 결정이었다. 일행은 마지막 수호자까지 잃고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 수중던전을 천천히 돌아본 후(아직까지 살아남아있던 몬스터들을 군멸포로 무자비하게 쓸어버린 후) 심해관으로 돌아왔다. 마침 심해관을 지키는 제사장 세루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든 찾아와 주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리자님. ……오오, 세이락시아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시다니!]

“그렇게 됐으니까 준비해, 세루타. 지구의 바다를 하나로 만들 거야.”

[뿌이!]

[……예!?]

정시우로부터 난데없는 명을 받은 세루타의 망둥이 같은 눈이 더더욱 망둥이처럼 튀어나왔다. 그러나 정시우는 말을 반복하지 않고 세루타의 등을 툭, 쳐 줄 뿐이었다.

“그렇게 알고 있어.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모두 내보내도록 해. 사흘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예, 예에!?]

[뿌이!]

세루타에게 청천벽력을 꽂아 버린 후 그대로 휴식처로의 문을 열어 귀환하는 정시우. 세이락시아가 빈틈없이 소년의 모습으로 화해 그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세루타의 눈에 들어왔다.

세루타는 팔을 뻗어 그들을 붙잡으려다 말고 문이 닫혀 사라지는 것을 보며 허망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바다라니…… 지구의 오대양을 전부……? 대체 대리자님께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지!?]

한 마리의 망둥이를 고뇌에 빠트린 후 정시우가 휴식처로 돌아오자 그곳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루타의 모습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영주님. 가셨던 일은 모두 잘 풀리셨나요?”

“아, 나중에 봐. 지금은 너랑 할 얘기 없다.”

“어째서! 지금 영주님은 분명히 저한테 할 말이 있는 표정이신데……!”

“그러니까 난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꼭 말해 줘야 아냐?”

“역시 다 알고 계신…… 우아아아아아!”

극렬히 저항하는 루타를 손쉽게 거주지역으로 보내 버린 후, 정시우는 후우, 개운한 한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한 번 겪었던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그 가운데 그가 여태 보지 못했던 문구 또한 섞여 있었다.

[남은 비드의 94%를 소모하여 휴식처와 관련 부속 기구, 거주지역을 진화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휴식처를 9레벨로 진화시키기 위해선 더욱 많은 비드를 모아야만 합니다.]

“아, 그렇구나.”

정시우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가능성이 열렸다는 사실을 파악하며 스스로의 이마를 탁, 쳤다.

어렴풋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시우가 마력과 물리력의 통합 문제…… 즉 거인화 문제의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인해 휴식처가 9레벨까지 해금된 모양이었다!

문제는 기껏 9레벨이 해금되어도 진화를 위한 비드가 부족하다는 것. 정시우는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침 적절한 기준이 나온 셈이네. 이걸 9레벨까지는 진화시켜 놓고 다른 세상을 찾아가도록 하자. 휴식처야말로 내게 가장 큰 힘을 주는 것 중 하나니까.”

“통합 던전 한두 번으로는 안 될 것 같은걸요.”

“마석도 소모해야지. 어차피 휴식처를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건 마나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휴식처 진화에 마석을 소모하지 않았던 것은 마석의 용처가 달리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드를 얻는 것보다도 쉽게 마석을 공급할 수 있었으니, 휴식처 진화에 마석을 소모하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침 거대 프로젝트를 시행하려는 참이잖아. 설마 지구 바다를 다 털었는데 휴식처를 9레벨로 진화시킬 만한 비드도 얻지 못하지는 않겠지.”

“바다 몬스터들이 들으면 통곡하겠네요.”

정시우는 우선 휴식처에 남은 비드의 94%를 깔끔하게 쏟아부어 휴식처의 진화를 진행시켰다.

[휴식처 진화를 개시합니다. 현재 진행도 0%…….]

“꺅, 바닥이 갈라져요!”

“복도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구획이 나뉘고 있는데요……!?”

6, 7레벨로 진화할 때도 그 규모가 터무니없기는 했지만, 이번엔 격이 달랐다. 여태까지의 변화가 원룸이 최고급 주택으로 바뀌는 수준의 변화였다고 한다면, 이번엔 건물이 아파트 단지로 바뀌는 수준의 변화였다!

“머, 멀어진다.”

“수련장이 따로 떨어져 나와서…… 체육관이 되었습니다!”

“지금 체육관 같은 땀내 나는 시설이 문제가 아니에요. 욕실이 엄청나게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고요……!?”

정시우마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휴식처의 정경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했겠는가. 용세하와 수아린은 제각기 변해 가는 건물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하고 어버버 소리를 내고 있었다.

[휴식처의 격이 상승하며, 휴식처 내부의 모든 공간이 마나로 공명합니다. 그 모두가 당신과 직접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특성에 맞추어 보다 적합한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남은 비드를 모두 소모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휴식처에 들어올 때 사용하는 문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크게 뒤틀리며 변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거실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방이 따로 떨어져 나오면서 사이사이에 자연히 돌로 된 복도와 벽이 솟아나고, 수련장과 욕실 같은 공간은 완전히 별개의 공간이 되면서 건물 내부에서 하나의 새로운 건물을 형성했다. 거실은 이미 평범한 거실이 아니라 로비라고 불러 마땅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욕실까지 가려면 한 3분은 걸어야겠는데요…….”

“괜찮아. 여기 이거 보여?”

“카펫이잖아요? 엄청 비싸 보이긴 하는데.”

정시우가 거실…… 이제 로비라고 불러야 하는 공간의 중앙에 놓인 카페트를 가리켜 보이자 수아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곤, 지금도 그의 뇌리에 실시간으로 주입되고 있는 휴식처의 업데이트 정보를 가르쳐 주었다.

“저 위에 서면 네가 원하는 공간으로 갈 수 있어. 간이 워프 게이트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넵, 알겠습니다.”

이곳에서 상식을 따지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수아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정시우는 수아린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려 주며 피식 웃었다.

실은 꼭 저 카펫 위가 아니어도 된다. 적어도 이 안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휴식처가 레벨 8로 성장한 순간부터…… 아니, 실은 그 이전부터. 이곳은 물질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에 말려들어 있었구나. 아니,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건물이며 공간도 결국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을 물질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와 내부를 이어 주는 매개. 그것을 문이라 해석하기에 문이 되었고, 편히 쉬며 잠들 수 있는 공간을 침실이라 해석했기에 침실이 되었고, 몸의 더러운 것들을 씻어 내며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을 욕실이라 해석했기에 욕실이 된 것이다.

실은 정시우도 아직까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 공간이 정시우와 그의 동료가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마련된 장소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휴식처의 진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자신이 바뀌어 가는 것에 따라 바뀌어 가는 관념,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개념. 그런 것들에 대해 또 쓸데없이 깊은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마침 타이밍 좋게 휴식처의 진화가 끝났다. 굉장히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주는 문구와 함께.

[휴식처의 외부에 있어도 휴식처가 포함하는 모든 옵션의 30%를 상시 적용받을 수 있게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