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220화.
“5천 년…… 이라고?”
[그렇다. 그 후 상황을 보고, 지구에서의 전쟁을 재개하든…… 종전을 선언하든 하겠지.]
5천 년, 한반도의 역사에 준하는 세월이다. 백골이 진토가 되고도 모자라 산과 바다가 500번은 뒤집어질 시간.
차마 짐작할 수도 없는 아득한 세월의 무게에 정시우는 그대로 넋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아르고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휴전이라고 해도 지구를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지구의 토종 몬스터 세력이 강성한 만큼 그들을 견제하지 않으면 다시 손도 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향후 5천 년, 그들이 직접 살을 떼어 내 지구로 내려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모든 파편은 회수되었고, 오직 나만이 이곳에 남은 신의 흔적이 되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지구는 향후 거대한 세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당장 너라는 걸출한 인물이 탄생한 것만 보아도 그렇지. 어쩌면 신들이 직접 머무를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할지도 모르는 만큼, 그들에게 있어서도 가볍지 않은 무게를 지닌다. 바로 그렇기에 그들은 인내를 선택한 것이다. 5천 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5천 년이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러나 뭐라 반문하려던 정시우는 끝내 입만 뻐끔거리고 말았다. 여기서 다시 입을 열어 봤자 바보가 되고 끝날 터였다.
[그러니 너의 업적이라는 것이다. 네가 어떤 식으로 신들의 흔적을 추적하여 그들의 세상에까지 침입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게 되면 너는 더 이상 그들에게 닿지 못하게 될 터이니.]
분하지만 맞는 말이다. 이미 정시우가 기억하고 있는 힘의 소유자들이라면 건드려 볼 수 있겠지만 그가 아는 신이라고 해 봤자 비율로 따지면 10%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그리고 이전 루타가 충고한 대로, 어느 한 명만 집중공략 하다가는 그의 무력이 충분히 성장하기도 전에 신과 직접 맞닥뜨리는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아니, 하지만 그것을 고민하기 이전에…… 더 이상 정시우가 신의 파편을 사냥하러 다닐 이유도, 없어진 것이 아닐까?
‘지금 이 녀석이 말한 대로라면 앞으로 나를 건드릴 녀석은 적어도 지구에는 없다는 얘기잖아. 5천 년 동안은…….’
놈은 지구의 토종 몬스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몬스터의 침입은 계속되리라고 말했지만, 엘과 세이락시아가 정시우의 휘하로 들어온 이상 그 정도로는 토종 몬스터 세력을 견제하기는커녕 그들에게 좋은 경험치가 되어 줄 뿐이었다. 균형의 추가 완전히 그들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하늘성 던전도 별로 늘어나지 않을 것이고, 자연히 개미굴도 줄어들 것이고…….’
수중던전도 소규모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비록 5천 년 후라는 굉장히 찝찝한 불안요소가 남아 있지만, 적어도 앞으로 수백 세대 가까이, 인간은 이세계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럼 나는…….’
그가 처음 세웠던 목적을 이루었다…… 그렇게 판단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무려 5천년이나 지난 후의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굳이 싸울 필요도 없는 신이니 몬스터니 하는 것들에 매달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엘과 전투를 벌이고, 그녀의 자유를 빼앗고 내 저열한 본성을 드러내면서까지 투쟁하리라 다짐했던 것이…… 이젠 필요가 없다는 건가.’
이걸 전문용어로 섀도복싱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신들은 일찍이 그와 싸울 생각을 버렸는데 정시우 혼자 다가올 거대한 전투를 생각하고 심각해하며 내 본성이니 욕망이니 중2병 단어를 연발하고 있었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히 정시우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실은 그것이야말로 아르고스가 노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네놈을 처리한다면!]
“……아냐, 그거 하지 마.”
조곤조곤 설명을 해 주다 말고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여 수십만 개에 달하는 촉수를 일제히 쏘아 날리는 아르고스! 그러나 몸에 기운이 빠져도 용의 감각만은 유지하고 있던 정시우는 놈의 기세가 바뀌는 순간 이미 한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고유능력 지배가 발동합니다.]
[뿌이!]
단지 그것뿐이었다. 모처럼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같잖은 수작을 부리는 아르고스에의 분노와 짜증을 듬뿍 담아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세이락시아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와 공명했다.
처음 거인화를 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빠르게 빛의 마나 덩어리로 화한 세이락시아가 그의 팔에 달라붙어 순식간에 팔을 키워 나갔다!
[그 연약한 육신으로 감히 허락되지 않은 영역에 오르려 하다니…… 음!?]
“하.”
심해를 밝히는 찬란한 빛 속에서 나타난 것은 길이만 족히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인의 팔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팔이라고 부르기에도, 그렇다고 아르고스와 같은 괴물의 팔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적합했으나, 단지 거대하며 밝은 빛을 발하는 팔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신……?”
“숨도…… 쉬기가 힘듭니다. 어마어마한, 격이…….”
그렇다. 그것은 지난 반년간 질리도록 써먹은 부분 거인화였으나, 그 원리부터 결과물까지 이전의 그것과는 천양지차인 진정한 거인화. 영과 육, 마나의 구분을 떠나 정시우와 세이락시아, 두 존재만으로 이루어 낸 기적이었다.
[세 번째 고유능력의 존재를 자각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인간의 몸으로 초월자의 육신을 만들어 내다니……!?]
“더 알려 줄 거 없지?”
정시우가 내뻗은 거인의 팔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촉수들을 단숨에 터트렸다. 그의 팔이 휘젓는 영역의 모든 것이 터져 나갔으니, 팔이 아니라 레이저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그럼 그만 사라져라.”
[마신의 징벌의 격이 당신의 영향을 받아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모든 속성의 랭크가 한 단계 격상됩니다.]
어느덧 거인의 팔에는 합당한 크기로 키워진 마신의 징벌이 들려 있었다. 헤데아의 힘이 짙게 남은 바닷물 속에서도 짙게 타오르는 독염이 일대를 데워 일그러져 보이게 만들었다.
[네놈의 힘은 너무나 빠르게 성장했구나……. 그 기세가 가히 ‘용’과 같아.]
그것을 보며 아르고스는 깔끔하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다. 발악을 하려거든 아직 많은 방법이 남아 있었지만, 결국 정시우에게 유효한 데미지를 입히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놈이 선택한 수단이 바로 말로 그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모든 경로가 닫히고, 아무리 네가 날고 기어도 신들에게 접촉할 수 없는 때가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부술 기세로 내리쳐진 거인의 망치가 아르고스의 본체를 정확히 가격했다. 비록 거대화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시우의 육신! 그가 익히고 새겨 온 모든 스킬들의 효과가 겹쳐져 발생한 끔찍한 충격에 놈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너보다 강한 자를 찾지 못하게 된 그 거대한 힘이…… 어느 방향으로 터져 나갈지, 무척 기대가 되는군…… 큭.]
다시 한 번 거인의 망치 강타가 발동했을 때 아르고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정시우가 다시 망치를 휘둘렀을 때 놈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내려치자 놈의 몸이 형태를 잃고 심해 속에서 부서져 내렸다.
[레벨이 12 올랐습니다.]
정시우는 적의 사망을 확인하고는 담담히 거인화를 해제하고는, 수중에 힘을 퍼트려 놈이 죽고 나온 헤데아의 파편을 수거했다. 레벨 업으로 인한 고통은 이제 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뿌이, 이리 와.”
[뿌이.]
정시우와 순간이나마 한 몸이 되었던 만큼 그의 심란한 마음 상태를 파악하고 이해한 세이락시아는 그의 부름에 순순히 그에게로 다가와 헤데아의 힘을 나누어 받았다. 그 순간 녀석의 수중 장악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축하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뭐…….”
정시우는 헤데아의 힘을 순조로이 세이락시아에게 이식시켜 준 후 잠시간 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가는, 이내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이나 뱉었다.
“어쨌든, 이걸로 상황파악은 끝났네.”
“상황파악이…… 그야 확실히 끝나기는 했지만요.”
어찌해야 할 줄 모르기는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아무것도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동시에 장난 아니게 찝찝한 기분을 들게 했던 것이다.
여태까지 정시우가 해 온 일들은 앞으로 커져갈 전쟁을 생각하고 준비했던 것들인데, 앞으로 적의 위협이 커지기는커녕 줄어든다면…….
“물론 엘과 뿌이는 확실히 내 휘하에 있지만, 공동의 적을 향한 투쟁이라는 직접적인 명분이 사라진 이상 그들과 인간의 충돌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해질지도 몰라.”
“아니, 설마 정말로 신이란 작자들이 형님을 두려워해 전력을 모두 빼 버리다니.”
“솔직히 너무 얼떨떨한걸요. 이제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말한들 누가 믿을 수 있겠어요?”
정시우의 생각처럼 일이 급진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의 파편이 모두 사라졌다고 해도 몬스터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고, 아직 하늘성은 건재하며, 광활한 바다를 모두 세이락시아가 이끄는 무리가 토벌하기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하지만 이르든 늦든 모두가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정시우가 중간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 턱이 없이, 그저 신들이 지구에서 발을 뺐다는 결과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아으, 머리가 아파요.”
“총 100스테이지까지 있는 게임에서 12스테이지까지밖엔 깨지 못했는데 라스트보스가 도망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묘하게 구체적인 수치로 말하지 마라, 세하야…….”
정시우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꾸하며 이마를 짚었다. 두 서포터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세이락시아 역시 작은 고래 버전으로 다가와 그의 허리에 머리를 비볐다.
정시우는 그나마 케이나를 데려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혼자 생각하고 싶었다.
‘엘과 세이락시아가 이끄는 몬스터들을 어떻게 해야 인간들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지?’
그렇다. 그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까딱 그가 판단을 잘못하면 기껏 외계의 침입을 막는 데 성공해 놓고, 지구에서 탄생한 몬스터와 인간들이 치고 박고 싸워 서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정시우는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지금,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사실 정시우는 인류의 종속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세이락시아와 엘을 거두고, 인간과 지구 몬스터들의 싸움을 막기로 한 것은 그렇게 해야 자신이 신들과의 전투에 집중하기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 그 정도 의미였다.
애초에 이 한 몸 바쳐 지구를 지키겠다, 하는 거창한 목적 따윈 그에게 없었다. 그저 순수하게 강해지는 것이 즐거워서, 그리고 자신이 하늘성이나 개미굴과 엮이도록 만든 정체 모를 것들을 다 한 대씩 쥐어 패 주고 싶어서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뛰어다녔던 것이 아닌가.
‘……뭐야, 그렇구나.’
정시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 자신이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신들이 지구에서 손을 떼건 말건 아무 상관없었잖아.’
물론 이대로 살면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신들이 그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그는 자유를 찾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남은 한 가지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그는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다! 애초에 그가 하늘성의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최초의 거인화는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졌는가? 개미굴 플레이어로서의 활동은 무엇을 위해서였는가?
날개도 없는 그가 끝내 하늘성까지 아득바득 기어 올라갔던 것은 어째서였는가? 그가 다른 존재를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강해지고 싶어.”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부끄러운 말 소리 내서 하지 마세요, 오빠. ……네?”
습관적으로 태클을 걸다 말고 그의 말의 뜻을 깨달은 수아린이 뒤늦게 반문했다.
“강해지고 싶다고. 누구보다도. 그러니까.”
“……아, 왠지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 알 것 같아요.”
지구가 안전해졌다니 이 이상 잘된 일은 없다. 안 그래도 가끔씩 신경을 써야 해서 귀찮아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이제 그냥 마음 놓고, 정시우가 날뛰고 싶은 곳에서 날뛰면 되는 것이다!
“신들을 다 쳐 죽이러 가자.”
순식간에 마음을 굳힌 정시우가 한없이 즐거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우주대깡패가 탄생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