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210화.
대부분의 신은 아직 자신을 모르는 이들에게 자신의 명확한 이름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꾸준히 이적을 보이며 목소리를 전달하고, 나약한 인간들이 신을 따르기 시작하면 비로소 신전을 하나둘 내려보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조금씩이나마 그들의 힘의 흔적, 즉 파편이 깃들어 있다. 물론 다른 신들도 동시에 그런 공작을 펼치기 때문에 하나의 세상을 차지하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결국은 승자가 정해지기 마련.
패자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물리거나 전멸하여 도주하고 나면 승자는 비로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바로 세상을 그의 힘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오직 신에게 종속되어 그 신의 피와 살이 되도록.
‘이젠 레벨이 단순히 몬스터를 잡은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어. 아린이와 세하의 레벨이 나와 함께 성장하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들의 성장에 의해서도 내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어찌 보면 우리들의 관계는 신과 그 종속의 관계에 한없이 닮아 있다…….’
영원한 삶, 그리고 모든 이를 압도하는 절대적인 격과 강함을 위해서 그들은 결국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냥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지배하는 세상, 그리고 지배하는 모든 존재에 의해 그들의 능력과 권위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자신의 파편을 떼어 내어 종속에게 주입하는 행위는 일시적으로 그들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은 그들의 존재가, 마나가, 업적이 모두 그 신에게 편입되어 신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로써 몸집을 불린 신은 다시 다른 세상을 찾아 나선다. 새로운 희생양, 자신의 일부가 되어 줄 세상과 존재들을 찾아서.
“이 세상도 라이아가 다스리던 첫 번째 세상과 마찬가지네요. 대기밖에 없는 세상……. 하지만 그래도 첫 번째 세상보다는 조금, 대기의 마나 밀도가 높은 것 같기도 해요.”
“…….”
지금 일행은 라이아가 다스리던 첫 번째 세계에 남아 있던 모든 신의 흔적과 파편을 철저히 부수고 회수한 후 곧장 라이아와 연결된 두 번째 세계로 넘어온 상황이었다.
물론 루타로부터 하나의 신만 공략하지 말고 차례차례 공략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사실 신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한두 개가 아닌 만큼 한 번에 두세 개씩 무너트리며 옮겨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들에 대해서는 이렇게나 많은 걸 알게 됐는데 아직 나 자신에 대해선 완벽히 알 수가 없어. 용의 감각으로 세상에 가득 찬 모든 정보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있는데, 정작 내게서 기인하는 마나의 정체만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어.’
세상을 하나 완벽히 거덜 내며 정시우도 한 차례 레벨업을 했고, 케이나도 성장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용의 감각 덕에 추가로 알게 된 것이, 두 번째 세상으로 넘어온 지금까지 정시우를 상념에 빠트리게 만들었다.
“오빠. 오빠?”
[주인님, 뭘 그리 생각하고 있는가?]
수아린이 걱정스레 정시우의 소매를 당기자 그것을 눈치챈 케이나가 그녀를 대신해 정시우를 불렀다.
“아…… 음, 그게.”
새삼스럽게 신들의 목적을, 그들과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의 유사성을 생각해 보던 정시우는 지금 자신의 종속이라 할 수 있는 일행의 모습을 둘러보고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젓고 말았다.
신을 믿고 그들에게 종속된다는 것으로 인해 육신의 형태가 변화한다는 것은, 현대 인간의 기준에서나 이질적인 일이지 보편적인 도덕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터였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과 사랑, 존재의 본질적인 변질, 다른 집단을 향한 적의와 살의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서 과연 정시우와 그의 종속들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정시우는 그것에 스스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세트나크가 던졌던 질문을 떠올리고 만다.
“케이나, 너는…….”
[음? 대기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지는군. 이번에는 좀 더 빠르게 들킨 것 같다. 주인님, 준비하자.]
그러나 정시우가 마음속의 고민을 바깥으로 털어놓기 직전,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생물체라도 된 것처럼 두근, 진동했다. 그와 함께 쩌렁쩌렁 울리며 그의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반드시 내가 직접 너를 벌하겠다.]
이번엔 그래도 제대로 잠입 액션을 해 보려고 했는데, 역시 집 주인이 같아서야 무리였는가. 정시우는 그답지 않은 무거운 상념을 일단 날려 버리기로 하며 해머를 꺼내어 쥐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더더욱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을 이곳에서 막겠다. 다른 신도 아닌 나를, 내가 다스리는 세상에만 두 번씩이나 흙발로 밀고 들어오다니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겠어!]
[라이아가 본신을 강림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몬스터를 통해 강림할지는 알 수 없으며, 일단 강림이 성공하고 나면 이 세상을 이루고 있던 생명 절대 다수가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강림까지 남은 시간 ? 3:45]
“오.”
세상 하나가 망할 때까지는 정시우의 난동을 참아 넘겼던 라이아도 곧장 자신이 다스리는 다른 세상에까지 그가 마수를 뻗어 오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일까? 기어이 본신의 힘의 소모를 감수하고서 강림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뇌신의 분노, 네 몸에 직접 새겨 주마!]
“아, 라이아 화났다.”
“유치원에서 싸우고 돌아온 아이 같은 소리를…….”
정시우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중얼거리자 수아린이 기가 막힌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지구와 연결되어 있던 세계의 신전에서 강림을 한 번 한 이후로 제법 손해를 봤을 텐데도 얼마나 정시우에게 화가 났으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그의 심정을 감히 이해할 만했다. 그런 수아린의 말에 케이나가 추가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아니지. 기왕 세상이 하나 망했으니 다른 신들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넘어가 그들에게도 피해를 입혀 주길 원했는데 두 번째로 고른 세상마저 자신의 영역이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아, 과연. 제법 냉정한 사고를 하고 있었구나.”
적어도 정시우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시우는 라이아의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한 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나와 주길 기대하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강림을 시도해 줄 줄이야. 땡잡았다.”
“전 오빠가 라이아의 강림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부터 금시초문인 걸요!?”
“무슨 소리야, 이세계로 오고부터는 줄곧 힘을 숨기고 있었잖아. 내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숨겼었던 거라구요……?”
수아린이 기겁하여 외치는 말에 정시우는 외려 어리둥절해져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수아린은 그의 말에 첫 번째 세상에서 그가 벌였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의 손을 잡고 방어막에 물의 힘을 입혔던 것, 유령들을 부려 영체의 팔을 만들어 내 방어막을 세게 던져 내며 자신을 끌어안았던 것, 석양 아래 함께 무너져 가는 신전을 지켜보았던 것…….(다소 미화가 있었다.)
“헤…….”
[수아린이 본제에서 벗어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군…….]
볼을 붉히고 몸을 배배 꼬는 수아린을 보며 케이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수아린이 저런 여유를 보여 줄 수 있다는 것부터가 그녀가 진심으로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얘기였다. 정시우에게 여력이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너무 경솔한 것이 아닌가, 주인님? 크라켄 같은 녀석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하다못해 신의 축복을 받은 몬스터도 아닌, 신의 강림체가 아닌가.]
“난 빨리 신들을 약화시키고 싶은 거지, 빨리 천국행 익스프레스에 타고 싶은 게 아냐. 매 순간순간 확실히 견적을 내고 움직이고 있으니 안심해.”
[그건…… 참 무서운 말이군.]
나날이 성장하는 정시우의 용의 감각은, 분명히 초기에는 케이나의 능력으로도 어떻게든 가까이 따라갈 수 있었던 것 같았거늘 지금에 이르러선 차이가 너무 크게 벌어져 그림자를 쫓는 것조차 벅찬 상황이었다.
가끔 그 사실에 박탈감을 느끼는 케이나였으나, 이런 때만은 그것이 무척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라이아의 강림까지 남은 시간 ? 1:39]
“이젠 라이아의 목소리가 안 들리네요.”
“강림에 신경 쓰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몬스터들도 다 숨어서 안 나오잖아.”
정말로 만약에, 진짜로 재수가 없어서 정시우가 덜컥 한 마리 잡았더니 강림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저번 강림에서도 안습한 꼴을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라이아는 이미 정시우를 상대로 털렸던 경험이 있기에 이번만은 신중하고도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가만히 놔두면 결국 말도 안 되게 강해지고 말 테니까…… 뭔가 해 두긴 해 둬야겠지.”
[그렇다면 역시 위험한 것이 맞지 않은가!]
“뭘 모르는구나, 케이나. 1분 30초면 세상을 뒤집어 놓기엔 충분한 시간이거든.”
라이아의 강림까지 1분 30초가 남은 시점에 정시우는 한 손을 뻗었다.
‘넌 이미 정답을 내놓았는데, 거기서 다시 망설일 필요가 있단 말인가?’
머릿속에 웅웅거리던 세트나크의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뻥뻥 걷어차 준 직후, 그가 다스리는 수만 명의 유령이 일제히 풀려나왔다. 정시우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명했다.
“부수고 회수해 와라.”
[알겠습니다!]
그의 사념을 정확히 전달받은 유령들이 적당한 무리를 이루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 영혼까지 떨리게 하는 강한 기세! 이젠 유령들을 동시에 부리며 두통을 느끼는 일조차 없다. 단기간에 정시우가 파격적으로 성장했음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신전을 부수려는 건가요?”
“맞아. 내가 거인화를 할 때 여러 요소가 필요한 것처럼, 라이아도 강림을 할 때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거든. 아무래도 가장 큰 요소는 라이아 본인의 마력이겠지? 바로 그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것이 놈의 신전이라는 건 뻔한 사실이니까.”
라이아가 강림한다고 해서 손 놓고 마냥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용의 감각을 끊임없이 확장하며 라이아가 강림을 했을 때의 최대 능력 정도를 측정하고, 몬스터의 규모와 라이아의 힘이 강하게 담긴 유적지와 신전을 모두 파악했다.
그리고 유령들에게 그 이미지를 고스란히 전달하여 신속하게 파괴하고 오도록 한 것이다. 모두 파괴하는 것은 무리여도, 라이아가 강림했을 때의 마력 수치를 낮추는 정도라면 가능했다.
[결국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가 아닌가!]
“결과는 같아도 과정이 다른 거야, 과정이.”
[이, 이……!]
유령군단은 정말로 신속하고 정확했다. 놈들이 편대를 이루어 이 드넓은 세상 곳곳에 숨겨진 라이아의 파편을 하나둘 찾아내고 파괴해 나가는 것을 보며 라이아는 치를 떨어야만 했다.
자신이 지금 세트나크와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저 정도로 강력한 언데드 정예 군단을 부려 그것도 정확하게 자신의 신전을 요격할 수 있다니!
무엇보다도 정시우가 그런 능력을 여태까지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제일 열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림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강림은 성공해도 실패해도 본인에게 리스크가 돌아오는 위험천만한 기술이다.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저놈을 눈앞에서 놓쳐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 저기! 잘 부순다. 역시 교육을 시킨 보람이 있어.”
“바쁘신 와중에 그런 교육은 또 언제 시키셨어요?”
[라이아의 강림까지 남은 시간 ? 3초]
그렇게 눈앞에서 자신의 살이 깎이고 피가 터져 나가는 광경을 보며 소리로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길 1분 30여 초, 비로소 강림에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순간 라이아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놈, 이제 징벌의 시간이다! 고작 크레센트 에이지 하나 감당하는 수준으로 신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나의 힘이 무한하다는 것을, 그까짓 신전이 없어도 나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놈이네.”
그로써 정시우 또한 놈의 위치를 파악했다. 라이아가 다스리는 세상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빛의 정령의 하늘동굴의 둥지, 그곳에서 이제 막 발아한 작디작은 빛의 정령.
다른 무수한 정령들 틈에 파묻혀 있어 쉽게 보이지도 않고, 그놈이 그놈 같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엘리트 몬스터에 강림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강인함을 포기하고 확실히 강림에 성공시킬 수 있는 포지션을 택한 것이다.
“망했다.”
그 사실을 파악한 정시우는 절망하며 중얼거렸다.
“제일 센 놈한테 강림할 걸 예상해서 힘을 낮춰 놓은 건데…… 저런 찌끄레기한테 강림하는 바람에 터무니없이 약해졌잖아!”
[…….]
[크라켄과의 전투가 있은 후 자신을 냉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주인님, 정말 제대로 각을 재고 있는 것인가?]
진심으로 좌절하는 정시우의 모습에 이제 막 강림을 완료한 라이아는 바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벙 쪄 버리고 말았다. 반면 케이나는 그의 자만과 허세가 아직 낫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에 괜히 불안해했다.
“좋아, 이렇게 되면 저거 후딱 해치우고 세 번째 세상까지 라이아 걸로 골라서 놈을 잔뜩 약 올리는 작전으로 가자.”
[뭣……!?]
[아아, 이 주인님은 틀렸다.]
정시우가 다짐하는 목소리를 들은 라이아가 잔뜩 흥분하며 몸집을 크게 불렸다. 순식간에 터무니없는 광량이 터져 나와 하늘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케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정시우가 정말로 자기 자신과 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