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209화.
툭 까놓고 말해 지금 신 중에서 정시우에게 제일 만만한 놈을 고르라면 망설임의 여지도 없이 라이아를 고를 것이다. 정시우가 가장 먼저 알게 된 신이기도 하면서, 다른 신들로부터 가장 업신여겨지는 신. 그것이 바로 라이아였다.
생각해 보면 아직 권속도 아닌 마리나한테 자신의 파편을 직접 가공까지 하여 넘겨준 시점에서 라이아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다른 신들에 비해 얼마나 경쟁력이 딸리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오기는 왔는데.”
정시우는 발밑을 확인하곤 기겁했다. 설마하니 기본적인 생태환경은 지구와 같으리라 생각했는데, 추적자의 자물쇠를 통해 차원을 넘어오자마자 발밑이 휑했던 것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대지가 없고 대기만이 존재했다.
[바이크에 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끝장이었군…….]
“슬슬 케이나용으로 바이크를 하나 만들어도 될 것 같은데요, 오빠.”
허공에 하얀 깃털 날개를 펼치며 떠오른 수아린이 정시우의 허리를 가볍게 붙잡고 바이크에 걸터앉은 채인 케이나를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이크를 케이나에게 맡기고 물러 나왔다.
“이건 어디쯤…… 아, 지구랑 딱 비슷한 수준의 크레센트 에이지구나.”
“그런 것치고는 환경이 터무니없이 다른데요…….”
정시우는 수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최소한 용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는 대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어디까지고 넓은 하늘,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대기의 영역이 펼쳐져 있을 뿐!
그렇다고 해서 라이아의 영향을 받아 변이된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 세상에 있는 라이아의 힘만으로는 결코 세상의 형태를 바꿔 놓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마도 원래부터 대지가 없었거나 드물었던 것이, 라이아의 휘하에 들게 되면서 완벽히 변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작부터 지구와 다른 세상도 많았구나…….”
[어쩌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세상들이 지구와 연결되기 쉬웠던 것일지도 모르지. 실제로 나의 세상도 지구와 비슷했다.]
정시우는 케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용의 감각을 더더욱 확장했다.
대기에는 그저 라이아의 힘에서 비롯된 희미한 잔향, 미약한 의지가 흐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중 농도가 짙은 영역을 되짚어 가면 머지않아 라이아와 깊은 연관이 있는 구조물이나 생명체를 찾을 수 있게 될 터였다.
“하지만 기껏 챙겨 입은 방어구의 옵션은 절대로 활용할 수가 없게 되었네요…….”
“이 정도 세상에서는 옵션의 힘까지 빌릴 필요가 없을 거야. 규모 자체는 크지만 그리 큰 위협은 느껴지지 않거든. 그야 완전히 라이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상 지구에 있는 몬스터들보다는 강하겠지만…… 그나저나 정말 넓기는 엄청 넓네.”
이전에도 이세계는 몇 번인가 다녀왔다. 파에토와 뒤세느의 파편들과 격돌한 세상에서도 전체적으로 세상을 한 번 훑은 적이 있다. 그래도 세상의 규모만 놓고 본다면 지금 도착한 이곳이 가장 넓은 기분이었다. 대지가 없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정시우의 낯빛이 곧 살짝 바뀌었다. 그저 세상을 가득 채우고 흘러갈 뿐이던 신의 마나가 점차로 그에게 적대적으로 날을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들켰어. 설마 이 허접한 신한테 내 마력을 들킬 줄이야…….”
[감히 네가 내 영역을 흙발로 짓밟다니!]
바로 그 순간, 과거 몇 번인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뇌신 라이아의 목소리가 정시우의 귀에 직접 꽂혀 들어왔다. 정시우는 라이아를 필요 이상으로 얕잡아 본 것을 반성하며 마신의 징벌을 꺼내어 들었다. 그것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라이아의 분노가 더해졌다.
[감히 나의 힘을 멋대로! 네놈을 이곳에서 갈기갈기 찢어, 나의 힘을 되찾겠다!]
“역시 뇌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성미야.”
정시우는 그래도 최대한 신들에게 모습을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전제부터 어긋나 있었다.
신들 사이의 분쟁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면 몰라도, 이미 어떤 특정한 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에서 불순분자인 자신이 정체를 감추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네놈의 세상에서 제법 힘을 키운 모양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고 있구나. 네놈 때문에 나는 지구를 포기해야 하게 되었는데, 설마 네가 직접 나를 찾아올 줄이야!]
“다들 준비해. 전 방위에서 날아들 테니까.”
정시우는 라이아의 목소리를 개무시하며 일행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곧 그의 말이 현실이 되었다. 라이아의 의지와 분노가 세상을 가득 채우며,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몬스터부터 차례대로 적의 위치를 간파하고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라이아 님께서 명하셨다. 침입자를 처단하라고!]
[저들을 성역에 들여선 안 된다.]
[!??!!]
날개가 달린 리자드맨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놈, 날개가 없이 마력만으로 부유하는 이형의 존재들, 날개도 없고 뚜렷한 형체도 없는 마법생물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곳곳에 퍼져 있던 몬스터들이 그들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놈들 모두 신체 어딘가가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 라이아의 축복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근원이 라이아에게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너무 눈이 부셔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어…… 우리도 조금 숫자를 모아서 와야 했던 것 아닐까요?”
“대체 몇 마리인 거지?”
용세하와 수아린은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던 적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하자 기함했지만 정시우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차피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하고 넘어온 곳인데 적의 숫자를 일일이 세어 무엇하겠는가.
“이 녀석들은 메인이 아냐. 1, 2억 모이는 시점에서 우리한테 위해를 입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숫자가 억이 넘어가면 우리한테 위해를 입힐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구형의 방어막을 펼쳐 봐. 탐색이 끝나는 대로 전속력으로 돌진할 테니까.”
“탐색……? 이, 일단 방어막을 펼칠게요!”
탐색이란 정시우에게는 도움이 될, 그리고 라이아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물건과 장소를 찾기 위한 탐색을 이르는 것이었다.
정시우가 라이아의 세상에 건너온 이유는 이 세상에 잔류하는 라이아의 파편을 회수하고 라이아의 마력이 짙게 남은 시설물들을 파괴하여 라이아에게 영구적인 데미지를 입히기 위함이지, 세상 전체를 때려 부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찾아갈 수많은 세상에서 전부 그런 짓을 하려다간 1, 2천 년으로는 끝나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스피드였다.
“완성됐어요! 꺅, 조금만 더 있으면 눈앞을 확인하기도 어려워질 것 같은데요!?”
“좋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
구형의 결계가 일행을 완벽하게 감싼 것을 확인한 정시우는 한 손을 뻗어 수아린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다른 일행은 전투 중에까지 눈꼴 시린 짓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물론 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력이 수아린에게 전달되며,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 활성화되고 있는 방어막에까지 부여되었다. 그러자 실시간으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방어막 위로 물이 흘러……?”
[캬아아아아악!]
[키긱!]
그것은 실로 재미난 광경이었다. 헤데아의 힘을 빌려 만들어 낸 물의 마력을 수아린을 통해 방어막에 흐르게 하자, 뇌전 속성을 띠고 있는 몬스터들의 공격이 방어막에 직격해도 방어막을 타고 흐를 뿐 그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끄아아아악!]
[벼, 벼락…… 라이아 님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우리에게 라이아 님께서 내리는 벌이시다!]
[최소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 무뢰배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 끼헥!]
더욱이 물에 닿는 순간 방전되며 힘의 컨트롤러가 몬스터에서 수아린으로 바뀌며, 뇌전에 완벽한 내성을 지니고 있지 못한 몬스터들은 되려 자신의 힘에 자신이 당해 나가떨어지기까지 했다.
그저 가볍게 속성을 둘렀을 뿐인데 짧은 순간 천 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소멸되자 수아린은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었다.
“마치 오빠가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아요.”
“마법은 못 부려. 내 머리 성능이 거기까진 안 되더라고.”
정시우는 마치 마법이 고등한 상위 스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결과물만 놓고 보면 어쭙잖은 마법보다 그가 벌인 짓이 위력이 수백 배는 더했다.
그러나 정시우의 진정한 활약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한 손은 여전히 수아린을 붙잡은 채, 나머지 한 손을 뒤로 뻗은 정시우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수천 명의 유령들을 불러낸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모습은 더욱 자연스러웠다.
“나의 팔이 되어라.”
[명에 따르겠습니다.]
[주인님의 일부가 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유령들뿐만 아니라 세이락시아를 비롯한 실체를 지닌 종속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거인화를 지금 이곳에서 다시 시전하는 것은 무리지만, 유령들 수천 명을 이용하여 거대한 영체의 팔을 만들어 내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당장 지금도 그의 어깨에서부터 그의 팔을 완전히 감싼 유령들이 압축되고 늘어나며 순수한 영력으로 화하여, 실로 거대한 팔의 형태를 이루어 완전히 방어막 바깥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그 팔로 상대하시려고요?”
“아니, 상대를 안 하려고.”
정시우는 말을 마치고 자신의 팔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영력으로 만들어진 거대 팔 또한 그의 팔을 따라 움직였다.
그 상태에서 무엇을 하려나 했더니, 영체의 팔이 손바닥을 펼쳐 그들이 들어와 있는 방어막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야구공을 쥐듯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이미 방어막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영체 팔을 이용해 방어막을 건드리다니 대체 무슨 의도…… 아.]
팔이 움직이는 형태를 보고 그의 의도를 추측해 낸 케이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용세하와 수아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정시우는 수아린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지탱하며 나머지 한 팔을 휘둘렀다.
“꺄…… 아아아아아!”
괴력을 담아 있는 힘껏 휘둘러진 거대 팔이, 손아귀에 쥐고 있던 방어막을 그 안에 있던 일행과 함께 내던져 버렸다!
탐색을 마쳐 첫 번째 목표물을 찾아낸 정시우가 그 방향으로 냅다 방어막을 던지게 한 것이다. 힘을 휘두르면서 그 힘에는 물리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영체 팔이기에 보일 수 있는 기교!
“잠…… 끄아아아아아악!”
나머지 일행이 총알보다 빠르게 날아가는 방어막 안에서 헛숨을 내쉬는 가운데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용세하만이 방어막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굴러다녔다.
정시우는 교육을 엄하게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녀석을 도와주지 않았다. 늦기 전에 간신히 자세를 잡고 버틴 케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용세하의 안전을 기원할 따름이었다.
“우와아, 우리가 지나온 길에 전기 파리채에 얻어맞은 모기 시체 같은 것들이 잔뜩…….”
“정말 적절한 비유로구나.”
정시우의 마력이 부여된 방어막은 일단 깨질 일은 없다. 단단한 내구도와 무지막지한 스피드가 합쳐지면 필연적으로 터무니없는 공격력이 형성되고, 거기에 물의 속성까지 부여되어 있으니 방어막이 내던져진 경로에 있던 몬스터들은 수아린의 말마따나 모기 시체처럼 널브러지고 말았다.
그것만 해도 수만 마리 이상이었으니 가히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몬스터들의 규모를 알 만했다. 그리고 지금의 정시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좋아, 신전 하나 발견! 그대로 부순다!”
“앗, 다시 영체 팔이…… 으아아아아아아!”
방어막이 속도를 잃어 갈 즈음 용세하가 기껏 균형을 잡고 일어섰지만, 정시우는 매정하게도 재차 영체 팔을 휘둘러 방어막을 내던졌다. 물론 용세하는 재차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아름다워라…….”
[장관이로군. 세트나크에 비하면 심미안이 제법 괜찮지 않은가.]
그렇게 재차 추진력을 얻은 그들 앞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전 그들이 부수었던 라이아의 소신전보다 족히 다섯 배는 거대해 보이는 신전이었다.
몽실몽실 하얀 구름이 대지 대신 신전 바닥을 받치고 있었으며, 새하얀 마력으로 빚어진 신전 전체에 흐르는 라이아의 마력이 그곳이 심상치 않은 장소임을 알려 주었다.
“지금 잘 봐 둬. 곧 사라질 테니까.”
[나, 나의 신전이…… 안 돼!]
“아…….”
그러나 그로부터 5초 후, 쇄도하는 방어막에 얻어맞은 신전은 정시우가 익힌 파괴공학 덕분에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보는 이 누구나 통탄을 금치 못할 허무한 몰락이었다.
[끄아아아아아, 용서할 수 없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네놈을 여기에 묻어 버리고 말겠어!]
“좋아, 일단 파편 하나 건졌고 다음 타겟!”
종들을 부려 미처 신전을 보호해 볼 틈도 없이 그것이 파괴당하자 라이아는 절규하며 정시우를 저주했다. 그러나 정시우는 경쾌하게 웃으며 재차 영체 팔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것은 그로부터 길게 이어질 정시우와 라이아의 악연의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