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208화.
베히모스의 가죽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하며 질기고, 더불어 어지간한 속성은 가뿐하게 무시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놈의 사후 남겨진 가죽에는 지상의 지배자로 거듭난 엘의 전력이 담긴 모래창에 복부를 뚫린 흔적만 있을 뿐, 그 외에는 작은 흠집도 찾기가 힘들었다.
물론 정시우의 경우 가죽에 흠집을 내는 허접한 수단을 쓰지 않고 망치에 담긴 충격을 고스란히 뇌와 내장에 전달해 죽였기에 가죽만 보고는 그가 때려죽였다는 증거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세 분의 방어구 모두 가공이 끝났습니다. 남은 건 영주님의 축복뿐이에요.”
그런 가죽의 90% 가까이를 소모해 베토는 세 벌의 가죽 방어구를 만들어 냈다. 덩치만 따지면 에리우보다도 거대했던 늑대의 가죽을 거의 전부 소모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똑같은 형태로 잘라 낸 가죽을 수십 겹으로 겹쳤기 때문이었다.
“한 겹만 해도 충분히 두꺼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겹친 거지?”
“마법입니다. 대상이 되는 소재도 진한 마력을 품고 있어야 하고, 중첩 목적 이외에는 다른 마법을 적용할 수 없어 순수하게 소재의 성능을 극한으로 살리기 위해서만 쓰는 방법입니다. 제가 살고 있던 세계에서는 오직 제 어머니만이 아버지를 도와 이 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죠. 사실 다른 마법사들이 야장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하.”
정시우는 용세하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가죽갑옷을 손으로 두들겨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분명 가죽 재질임에도 금속을 두드리는 것처럼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에 중요한 급소 부위는 맑은 빛의 금속으로 덧대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여태까지 정시우가 적들을 죽이고 획득하기는 했으나 막상 써먹을 데가 없어 베토에게 넘겼던 무구들을 모두 녹여 적절한 배율로 합금한 것이었다.
물론 합금 과정에도 마도야장의 공정이 있었을 것이다. 세 방어구 모두 필수적인 부분에만 덧대어져, 가죽과 비슷한 수준의 경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 기대 이상이잖아.”
“주인님이 준비해 주신 재료가 워낙에 좋았기 때문이죠.”
이 정도라면 자신의 전력도 몇 번인가는 버텨 낼 것 같았다. 막말로 베히모스가 나타났을 때 이 정도로 가죽이 중첩되어 있었더라면 정시우는 조금은 애를 먹었겠지.
‘카오스 스케일로 흡수할 수 있는, 용과 관련된 방어구들을 얻기 전에 임시로 몸을 보호하는 용도면 충분했는데…….’
이건 그냥 쭉 착용하고 다녀도 괜찮을 정도다. 막말로 용과 관련된 방어구를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정시우의 인생 장비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하랑 아린이 것은 알기 쉬운 갑옷이랑 사제복 형태인데 내 건 평상시 입고 다니던 옷이랑 비슷하구나.”
가장 먼저 용세하의 가죽 갑옷은 두 겹 가죽에 천을 덧대어 얇게 압축시킨 내갑과, 수십 겹으로 가죽을 겹치고 여러 세상의 합금을 덧댄 외갑의 두 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아린의 사제복은 우선 거의 속옷에 가까운 내갑, 그 위에 수십 겹의 가죽으로 만든 보호구, 그리고 다시 그 위에 분명 같은 가죽임에도 천과 비슷한 재질로 가공한 사제복으로 구성된 세 개의 의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시우의 것. 평소 그가 입고 다니는 것을 철저히 조사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시 티와 팬티로 시작해 청바지에 셔츠, 가죽 자켓까지. 너무 익숙한 나머지 위화감이 너무 없어서 오히려 위화감이 생길 정도였다.
“성능은 같습니다. 주인님이 움직이시기에 편한 형태를 고려해서 만들었어요.”
“이거 날개나 꼬리 뽑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마력 소재이기 때문에 신체 변이에 동화됩니다. 스킬이나 고유능력을 구사할 때도 마찬가지죠.”
다른 마력적인 성능은 없다고 말했으면서 아무래도 변형과 동화 기능은 기본적으로 달려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켓만 걸치고 즉석에서 날개를 뽑아 보며 성능을 확인했다.
원래 플레이어용으로 등 부분에 날개 구멍이 있는 장비를 착용해 왔던 수아린과 용세하와는 달리 그는 처음 날개를 뽑았을 때 당시 걸치고 있던 방어구에 구멍이 났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그 부분이 녹아 사라져 날개를 어렵지 않게 뽑아낼 수 있었다. 날개를 회수하면 다시 방어구가 원래 형태를 되찾는 것이 신기했다.
“대단해.”
정시우가 끊임없이 감탄하자 베토는 한껏 기분이 좋아진 듯 헤헤 웃었다. 그것을 본 케이나가 참지 못하고 베토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위험한 남매라고 정시우는 생각했다.
[그런데 누나 것은 없니?]
“앗, 그건…….”
“넌 레벨 오를 때마다 갑주도 같이 강화되잖아. 애꿎은 동생 괴롭히지 마라.”
[성능은 중요하지 않다. 동생이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정시우는 열변을 토하는 케이나를 개무시하고 방어구들을 한데 모았다. 무엇 하나 빼먹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고이 보관해 두었던 유고의 파편을 꺼냈다.
“좋아, 그럼 해 볼까.”
다른 이라면 신의 파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지만 정시우는 슬슬 신의 파편을 조종하는 것도 심드렁했다. 아주 부드럽게 그것을 녹이고 삼등분하여 자신의 마력을 더해 안정성을 더하고, 자연스럽게 방어구들에 주입한다.
실시간으로 방어구의 한계가 깨어지고, 물리와 마나의 영역을 초월한 무구로 재탄생했다.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광경이란!
“베히모스의 권능이 살아나고 있어요……!”
신력이 부여되는 순간 세 방어구가 베히모스가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를 되찾는 모습에 베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것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정시우는 살짝 미묘한 표정이었다.
“즉 반푼이란 얘기지. 땅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을 때는 능력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히모스의, 보다 정확히 말해 유고의 힘을 방어구에 부여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방어구가 갖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소, 즉 방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땅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만큼, 유고의 파편을 소모하여 힘을 부여한 순간 가뜩이나 탁월했던 방어구의 성능은 두 배 가까이 끌어 올랐다. 베히모스가 되살아나서 이걸 물어뜯어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질긴 방어구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좋아, 끝났다.”
“엄청 간단하게 해치워 버렸어!”
“이 까짓게 뭐라고. 각자 확인해 봐.”
정시우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수아린과 용세하에게 각각 방어구들을 넘겨주고는 자신 몫의 방어구 세트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몇 줄인가의 메시지가 망막 위로 떠올랐다.
[포효의 근원]
[랭크 ? S+++]
[방어력 ? 7,200]
[숙련도 ? 0/50,000]
[속성 ? 대지 A++]
[옵션 ? 대지에 발을 디디고 있는 한 쓰러지지 않는다.]
[오직 착용자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치밀하게 제작된 방어구. 이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는 한, 적어도 지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상대로는 물러나지 않게 된다. 터무니없는 방어력과 편의성을 자랑한다.]
“허.”
랭크가 당연하다는 듯이 S를 돌파해, SS에 근접한 것은 그렇다 치자. 정시우는 이렇게나 높은 등급을 지닌 아티팩트의 속성과 옵션, 설명이 간단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심지어는 더 늘어날 여지조차 없다. 이 아티팩트는 이것 자체로 완성된 것이다.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은 아티팩트에 깃든 대지 속성만큼이나 단단한 이미지였다.
“더는 손댈 여지도, 발전할 여지도 없다는 거지…….”
“완전한 아이템이네요…… 아마 숙련도를 모두 채우면 기본적인 성능은 향상되겠지만.”
“이거면 크라켄한테 맞아도 괜찮습니까, 형님?”
“한 대 정도는?”
용세하는 그 말을 듣고 좌절했지만 용세하가 크라켄한테 공격을 당하고 살아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아티팩트가 얼마나 뛰어난지 증명이 되는 셈이었다.
“좋아, 그러면 이제 출발해 볼까.”
“잠깐만, 옷 갈아입고 올게요!”
수아린이 방어구를 쥐고 다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시우와 용세하 역시 후딱 옷을 갈아입었다. 방어구는 착용 즉시 그의 육신과 빠르게 동화하여 적당한 편안함을 안겨 주었다. 더욱이 확고한 안정감은 마치 그 본인이 움직이는 요새가 된 것만 같았다.
“역시 유고의 힘을 부여하는 게 정답이었어. 그대로 유고의 세상으로 달려가 닥치는 대로 파편을 끌어모으고 싶을 정도야.”
“이렇게 대단한 갑옷을 입었는데도 크라켄한테 두 방…….”
“그건 그만 생각하라니까.”
정시우는 방어구에 지극히 만족했다. 그야 카오스 스케일에 흡수되지는 없었지만…… 시험 삼아 카오스 스케일을 발동해보니 포효의 근원 위로 촘촘히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이 방어구의 진면목이었다. 육체와 동화, 변이하는 것! 카오스 스케일의 방어력과 포효의 근원의 방어력이 합쳐지면 이젠 정시우 본인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기 힘들어질 것이다!
“좋아, 완벽해.”
“정말 늠름한 모습이시네요, 영주님!”
“나가.”
부른 적이 없는 루타까지 그 장소에 와 있었다. 정시우가 눈을 새하얗게 뜨며 그녀를 쫓아내려 했지만 루타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적어도 떠나시는 모습까지는 지켜보게 해주세요! 선물, 선물 드릴 테니까!”
“흠…… 좋아, 내놔 봐.”
“양아치…….”
루타가 꺼내 놓은 것은 좁쌀만 한 결정이었다. 그것을 면밀히 살핀 정시우는 이내 몸을 딱딱히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결정, 아니 신의 파편의 본 주인은…….
“이건 혹시 헥토의 파편이냐?”
“놈의 권능을 카피할 수 있을 만큼 큰 결정은 아니지만, 그건 영주님께 중요한 일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이 안에 담긴 기운의 특징이지요.”
정시우는 얼마 전 개미굴의 통합 던전에서 헥토의 개입에 의해 뒤바뀐 던전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헥토의 힘을 나누어 받은 이들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헥토는 꼬리를 자르고 내뺐고, 그 결과 정시우는 헥토의 파편이 아닌, 바람의 신 프루타의 파편을 획득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헥토의 힘을 흉내 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기껏 추적자의 자물쇠가 있어도 헥토가 다스리는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있으면 가능하겠어.”
“힘내세요, 헥토와 연관된 모든 것들이 영주님을 딱 적당하게 자극해 줄 테니까요. 적당히 아프고 시원한 어깨 안마처럼 말이죠! 말 나온 김에 안마라도 해 드릴까요?”
“너…… 이걸 어디서 났냐? 헥토 본인의 힘을 어떻게 가져올 수 있었던 거야?”
정시우는 자신의 어깨로 뻗어지던 루타의 손을 중간에 낚아채며 그녀에게 물었다.
공교로운 것도 정도가 있다. 하필이면 이세계 탐험을 시작하려는 상황에, 지금 그에게 가장 신경이 쓰이는 놈의 파편을 준비해 오다니. 그러나 루타는 그의 물음에도 상쾌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건 금칙사항입니다!”
“네 존재를 금칙사항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
“그렇게 대담한 말씀을…… 지금 조금 마음이 흔들렸어요. 제 공략까지 얼마 남지 않으셨네요!”
이 녀석은 글렀다. 정시우는 에휴, 한숨을 쉬면서도 순순히 헥토의 파편을 흡수했다. 루타의 말마따나 헥토의 권능을 가져오기에는 미약한, 그러나 놈의 힘을 구분하고 기억하기에는 충분한 크기.
마력이 10 정도 영구적으로 상승했고, 정시우는 이제 놈의 마력을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빠, 다 입었…… 응? 왜 그렇게 전의를 불태우고 계세요?”
“아무것도 아냐. 옷 예쁘다.”
“헤헤.”
이젠 수아린을 칭찬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수아린이 그의 말에 배시시 웃곤 괜히 예쁜 척을 하며 조신하게 다가왔다. 옆에서 케이나가 토하는 시늉을 하는 것은 무시했다.
“그러면 정말로 가 볼까. 어차피 조만간 다시 한 번 들릴 테니 이별이랍시고 오버할 필요도 없어. 다들 잘 지내고 있어.”
“헥토가 다스리는 세상으로, 떠나시나요?”
“아니.”
정시우는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어 오는 루타를 보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헥토와 관련된 세상은 가 보고 싶다. 놈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보다 강해진 후의 얘기다. 아직 정시우는 준비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 준비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가야 하는 곳은…….
“뇌신, 라이아가 다스리는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