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207화.
정시우는 원래 하늘성까지 자신이 정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개미굴이니 수중던전이니 지하니, 그 외에도 정시우가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으니까.
다만 하늘성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었다. 무려 10년간 그는 하늘성에 한 가지 집념을 불태워 왔으니까.
[대도서관에 입장합니다. 마도사서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책이 있는 구역을 확인하세요.]
하늘성에 들어온 정시우는 우선 수아린과 함께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하늘성에서 가장 볼 것이 많은 공간이기도 했다. 사실, 그곳을 빼놓고는 딱히 뭔가를 할 만한 공간도 없었다.
“정말 터무니없이 넓네.”
정시우는 천천히 날개를 펄럭이며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세트나크의 73마성에 진입했을 때 수아린이 성의 내부 구조와 하늘성의 도서관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과연 거대한 홀을 중심으로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들이 수십, 수백 겹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란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날개가 없는 이라면 이 까마득한 천장 아래 펼쳐진 거대한 책장들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리라.
“어차피 지식은 다 습득하셨다면서요.”
“중요한 것만 빼고는 다 날려 버렸어. 머리 안에 이렇게 거대한 도서관을 통째로 다 담았다가는 뇌 안에 다른 걸 기억할 공간이 남지 않게 되어서 1년을 주기로 기억을 지워야…….”
“저도 금X목록은 봤어요.”
“쳇.”
하지만 기억에 남겨 두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의 정시우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 수집하여 조합하는 것으로 그 순간의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을 모색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별 정보는 없어요. 무수한 던전에 관한 이야기와, 플레이어들이 던전에서 얻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죠.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다른 세계의 환경, 그리고 플레이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세계의 존재, 하늘성이 만들어진 의도를 파악한다면 쉽게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스스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수아린에게 정시우가 추가로 설명해 주었다.
“간단히 말해 하늘성 시스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 무수히 많은 세계에 발을 걸치고, 몬스터와 스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거야. 비록 신들의 침공에 무너지는 세상은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저항의 흔적은 도서관에 수집되어 다른 세상에 전달되는 거지.”
“그건 저도 모르던 정보인데…….”
“이것만은 남겨 둬야 하는 정보였거든.”
“…….”
수아린이 새하얀 눈으로 정시우를 바라보기에 그렇게 해설했더니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이제 말 안 할래요. 제 허접한 지식과 경험으로 말하는 게 바보처럼 느껴지는걸요.”
“미안, 조용히 들을게.”
하늘성에 오르며 날개를 얻는 그 순간, 강탈로 하늘성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굳이 수아린에게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정보만 원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내가 듣고 싶은 건 네가 보고 겪은 하늘성이니까. 아린이 네 입으로 말해 줘.”
“……말은 잘하시네요.”
수아린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 이게 게임이었으면 호감도가 올랐다는 안내문이 떠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라는 점에서 정시우 스스로도 아주 조금 당황스러웠다.
정시우가 손을 내밀자 수아린은 흥, 코웃음을 치면서도 얌전히 그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또 조금 간지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면 이쪽으로 와 보세요. 제가 처음에 하늘성에 들어왔을 때 찾았던 책이 있어요.”
“그래.”
정시우와 수아린의 뜻하지 않은 도서관 데이트는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정시우는 수아린이 안내하는 책들을 차례대로 훑으며 그녀가 이곳에 들어와 어떤 식으로 던전을 찾고,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사제는 어떻게 된 거야?”
“나중에 보면 사제가 된 이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제법 읽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하지만 역시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어서…… 역시, 그냥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저는 앞에 잘 나서지 못했고, 그래서 앞에서 싸우기보단 뒤에서 다른 이들을 보조하는 데에 주력해야 했으니까…….”
자신이 사제가 되었던 그날을 회상하는 수아린의 목소리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퍼스트 플레이어로 각성하여, 인류와 기대와 불안을 한 몸에 지고 아직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을 등불 하나 들고 걸어 나가야 했던 나날.
항상 불안하고, 무서웠다. 어떻게든 최전선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을 도우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 얻게 된 것이 사제라는 클래스였다. 그녀의 겁쟁이 기질과 소심함이 어느 샌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코 물러나지 않는 용기와 상냥함으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럴 때 김하룡을 만났으니…… 솔직히 처음엔 좋은 아저씨라고 생각했었죠.”
“분명 너처럼 낚인 아이들이 많았던 거겠지. 세하도 그렇고.”
자신들을 이끌어 주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주는 아저씨. 복잡한 고민을 하지 않고 마냥 뒤를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면 어린아이들은 십중팔구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시기에 김하룡과 같은 방식으로 집단을 형성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하룡과 그들의 차이는 단지 능력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 차이일 뿐.
“그래도 오빠는 김하룡한테 고마워하셔야 해요. 다른 사람들이 다 그 인간 눈치를 보느라,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예쁜 제가 남자들 하고 손도 한 번 못 잡아 보고 이 나이까지 자라났으니까요. 영광인 줄 아세요.”
“그것 참 고맙다.”
그는 여자의 과거를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반대로 수아린이 정시우의 과거에 엄청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그 부분을 건드리면 괜히 귀찮아지므로 정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기로 했다.
“도서관은 볼 만큼 본 것 같네요. 수련장도 있는데 보실래요?”
“테스트 던전은?”
“거긴 후보 딱지를 뗀 이후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어요.”
“절대로……?”
[테스트 던전에 입장합니다. 시험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던전의 활성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짜잔! 절대라는 것은 없었다. 하늘성의 보안 따위로는 이제 정시우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아린은 정시우와 함께 고요한 테스트 던전의 정경을 둘러보며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저도 11년 만에 보는 광경이에요. 오빠가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억지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네요……!”
“다른 사람도 입장해야 하니까 오래 있는 건 힘들어. 자, 대충 보고 나가자.”
둘은 그 후로도 경매장이니 광장이니 하늘성이 포함하고 있는 갖가지 플레이어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을 둘러보며 하늘성에 대해, 플레이어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별 시답잖은 얘기들까지 나누며 돌아다녔다. 중간에 도시락도 까먹었다.
“저기 봐, 정시우가 첫 번째 마누라랑 데이트한다.”
“수아린 정말 예쁘다…….”
“나도 팔짱 잘 낄 수 있는데…….”
“나도 입 있는데…… 도시락 잘 먹을 수 있는데…….”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모습을 들키기도 했지만, 사실 둘의 관계가 진전되기 훨씬 이전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둘의 관계는 확고한 연인 관계였으므로 별로 큰일이 날 것도 없었다.
“아아, 둘이서만 몰래 데이트한다! 너무해!”
그러나 둘을 발견한 이가 마리나라면 이야기가 아주 조금 달랐다. 그녀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울상을 지었다.
“첫키스를 바쳐 가며 가불까지 해 준 나는 내팽개쳐 두고 아린만 챙기다니, 흑흑.”
“강매한 주제에 잘도 그런 억지를.”
“저, 저도 해 줄 수 있거든요, 가불!”
“그럼 무승부니까 나도 같이 데이트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담한 발언이 튀어나오는 가운데 마리나가 유치원생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정시우의 팔에 팔짱을 끼어 왔다. 수아린과 팔짱을 끼고 있는 팔의 반대쪽이었다. 그러자 단숨에 웅성거림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헉, 둘째 마누라까지 참전했다.”
“플레이어 중에 제일 예쁜 미녀로 손꼽히는 두 명을 독점하다니…… 이건 독과점법 위반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두 사람 하고 동시에 데이트…… 용자다.”
“용자다.”
“나도 팔 두 개 있는데…….”
이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짓이다. 평소였더라면 마리나의 어린아이 같은 땡깡에 삼촌 마음으로 어울려 줬겠지만…….
“마리나,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아린이랑…….”
“후우.”
지금은 수아린에게만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정시우가 마리나를 상처 입힐 각오를 하고 엄한 말을 하려던 순간, 수아린이 한숨을 쉬며 그의 말을 끊고는 말했다.
“어쩔 수 없죠. 둘만의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히 보낼 수 있는걸요. 그러니까 오늘은 마리나한테 양보를 조금 해 줄게요.”
“으극, 기쁘지만 뭔가 근본적인 부분에서 져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아린이 너?”
수아린의 행동에 정시우가 오히려 당황했다. 요즘 들어 감정적으로 제법 안정된 상태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정시우와 관련되는 여자마다 가시를 세우고 대하던 수아린이 오늘은 왜 이러는 것인가.
이젠 제법 스스로에게 확신이 선 것일까? 수아린은 정시우의 의혹을 불식하는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꼭 붙잡고는 말했다.
“오늘 헤어지면 이 사람들 하고는 당분간 못 만나는데, 안 좋게 헤어지면 싫잖아요. 지금까지 오빠를 혼자 독점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전 충분히 행복하니까, 이제 다 같이 놀아요.”
“다 같이?”
그러나 정시우가 뒷말을 채 잇기 전 용의 감각에 다른 기척이 두 개, 추가로 잡혔다. 정시우는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세리아와 이서희의 모습을 보며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이 셋은 거의 항상 같이 다니곤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상도 아닌 하늘성에서 마리나만 나타난 시점에서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시우 님이 안 만나 주실 것 같아서 셋이서 던전이나 가려다가, 갑자기 마리나가 날뛰기에…….”
“어머나…… 데이트 중이었니?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미안.”
세리아가 정말로 죄송하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이서희 또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세리아는 몰라도 이서희의 입가와 눈꼬리는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말과는 달리 ‘쌤통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시우가 눈으로만 따지자 끝내 그녀가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당분간 못 본다고 한 마디 던져 놓고 잠수는 정말 상처받는단 말이야. 우리가 뭔가 잘못했나 한참 생각했잖아. 거기에 하늘성에서 수아린 씨랑 데이트하고 있으면, 그치?”
“나 그 얘기 듣고 싶어! 얼마 전 지상에서 엄청난 규모의 몬스터 간 전투가 벌어졌던 거, 시우는 뭔가 알고 있지? 그치?”
세리아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이서희는 새침한 표정으로 따지고, 마리나는 서운함 같은 건 잊어버린 듯 정시우에게 달라붙으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정시우는 끝내 성대한 한숨을 토해 내며 수아린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부터 데이트는 지하로 가자.”
“아예 다른 세상으로 가면 되죠, 뭐.”
수아린이 시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시우는 실로 명안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 여자 넷을 끌고 다닌다며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런 놈들한테까지 신경을 써 줄 겨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하늘성 데이트로부터 사흘이 지난 시점에, 드디어 방어구 제작이 클라이막스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