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로그인-206화 (206/260)

# 206

206화.

결론부터 말하면, 인생…… 아니, 호(虎)생 그리 간단하게 풀리지는 않았다.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후딱 인간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나는 인간이 될 수 없는가.]

“뿌이이.”

에리우가 거대한 앞발을 뻗어 세이락시아의 뺨을 꾸우욱, 밀며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겉으로만 보면 거대 괴수가 무구한 아이를 해치려는 듯한 모습이지만, 둘 중 무력은 세이락시아가 월등히 강했으므로 그럴 걱정은 없었다.

“뿌우우.”

[그런데 왜 나는 될 수 없느냔 말이다! 나도 슈와 놀고 싶은데!]

“너희 의사 통하고 있었구나…….”

정시우와 같이 놀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자연스럽게 인간과 비슷한 형태로 변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세이락시아와 그런 녀석의 말에 납득하지 못하고 짜증을 내는 엘. 정시우는 그들을 보며 둘이 제법 잘 논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동안 노력했어. 설마 2주 만에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까지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어.”

[슈가 잘 가르쳐 주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니 더 많은 것을 가르쳐다오.]

“아니, 이젠 충분해.”

[아니, 부족하다. 더욱이 나는 아직 인간이 되지도 못했다. 내 발음은 아직 이상하단 말이야.]

엘이 투덜거렸으나 이 이상 시간을 내는 것은 정시우도 무리였다. 그가 그녀의 미련을 끊어 내려는 듯 단호히 수업 종료를 선언하고 일어서자, 엘과 놀고 있던 세이락시아가 후다닥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엘의 눈빛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녀석을 죽이면 인간이 되는 능력을 내가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넌 우선 정신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겠구나.”

한숨을 쉬며 물러나는 정시우의 모습에 엘이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그때 세이락시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어 말했다.

“뿌이이, 뿌우.”

[…….]

녀석의 말을 알아듣고 엘이 침묵했다. 정시우가 세이락시아의 이마에 알밤을 먹이며 돌아섰다.

“얘 말은 신경 쓰지 마. 그럼 간다. 지상의 몬스터들을 확실히 정리한 다음에, 네가 인간들 앞에 나설 기회를 내가 마련해 볼게. 머지않아 찾아올 거야.”

[…….]

정시우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있던 엘이, 그가 수아린과 용세하까지 데리고 낙원을 나서려는 순간 입을 열었다.

[나는 육지의 모든 몬스터를 다스리는 존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슈, 네 말대로 지금은 나의 지배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다.]

“그렇지.”

[그대가 다음에 나를 찾아올 때까지 나는 모든 몬스터의 의지를 오롯이 내게로 결집시킬 것이다. 몬스터의 왕국을 만들어, 인간들과 대등 그 이상의 위치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설 것이다.]

“아주 이상적이야.”

[음.]

엘은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순간 보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슈. 결투다.]

“……결투?”

[그래. 그리고 결투에서 지는 자가, 승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갑자기 굉장히 야만적인 전개로 날아가 버린 것 같은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힘을 숭상한다. 힘을 좋아한다. 슈, 너는 내가 여태까지 본 이들 중 가장 강하다. 나는 그래서 네가 좋다. ……그리고 뛰어넘고 싶은 것이다.]

강한 힘을 타고난, 그것을 꾸준히 단련해 온 이들에게 있어서 호승심은 부정할 수 없는 본성이었다. 정시우라고 엘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그렇게 해서 계속 성장해 왔다.

“그게 네가 내린 결론이라 이거지.”

[그렇다. 모두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다. 사실은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맞붙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참아 온 것이다. 나만이 아닌 다른 모든 몬스터들을 생각해 필사적으로 참아 왔지. 하지만 이젠 무리다.]

“그런가…….”

“뿌이.”

엘은 태어난 이후 최초의 개구라를 치며 가슴이 조마조마해졌으나 애석하게도 정시우는 그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는 세이락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결국 이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지만, 설마 엘이 먼저 그 말을 해 올 줄은 몰랐는데…….’

그가 헛웃음을 웃고 있으려니 그를 대신해 수아린이 이를 갈며 말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이를 드러내는군요. 얼마든지 덤벼보시지.”

[내가 결투를 신청한 것은 네가 아니라 슈다. 나는 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린이 너, 저번에 보여 줬던 여유는 어디 갔냐, 여유는.”

“흥!”

수아린이 코웃음을 치며 정시우의 팔짱을 꼈다. 엘은 그런 그녀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오직 정시우를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엘의 시선에 조용히 생각하다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기껏 세운 몬스터의 왕국을 내게 고스란히 헌상하는 꼴이 되겠지만, 몬스터들에 대한 네 지배권은 그대로 놔둘 테니 안심해.”

[쿠후…… 그렇게 나와야지.]

정시우와 엘이 전의에 찬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기에 끓어오른 마나가 다른 이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할 정도였다.

사실 이미 둘 사이의 힘의 우열은 분명했고,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결투라는 형태로 그것을 가리기로 한 것은 둘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정시우의 어리광과 회피에, 엘의 자존심과 욕망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분명 결투가 끝날 시점에는 단순히 둘의 관계만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을 터였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그렇게 2주에 걸친 과외수업이 끝났다. 정시우가 일행을 데리고 자리를 뜨자, 엘은 끝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거대 호랑이의 난동에 일대가 지진이라도 온 것처럼 흔들렸다. 한 번만 더 부끄러웠다간 산이 무너질 것이다.

[패자가 승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다니…… 바, 방금 나는 너무 대담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만 숙녀답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가!]

[숙녀답지 못한 것은 이제 와 새삼스럽지도 않…… 찌이이익!]

퉁명스레 말하던 사리테가 엘의 앞발에 한 방 얻어맞고는 하늘까지 날아갔다. 엘의 난동은 그로부터 3시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엘의 혼신을 다한 프로포즈를 정시우가 알아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확률 높은 가설을 떠올린 후에야 말이다.

그로부터 한동안 엘은 쪽팔려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쪽팔림과는 별개로, 전 세계 육상 몬스터의 단합과 새로운 왕국의 형성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든 세상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이 드디어 무게감을 갖고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뿌이, 이제 너도 심해관으로 돌아가야지.”

“뿌이!?”

엘과의 일을 일단 해결한 정시우는 그다음 일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바로 자신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세이락시아를 심해관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뿌이, 뿌이이이이!”

“안 돼, 지구의 바다에는 네가 필요해. 엘은 육지의 모든 몬스터를 휘하에 넣었는데 너희는 아직 태평양뿐이잖아.”

“뿌우우우…….”

돌아가라는 정시우의 말에 격렬하게 고개를 젓던 세이락시아는 그의 통렬한 지적에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지구의 육지와 바다의 비율은 3대 7이었기에 실제로는 엘에 비해 그렇게까지 꿀리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순진한 뿌이는 그대로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뿌이, 뿌이이이.”

“그래, 장하다. 너라면 반드시 해적왕…… 바다의 왕이 될 수 있을 거야.”

“뿌이!”

결국 세이락시아는 지구의 바다를 모두 정복하면 예뻐해 주겠다는 정시우의 약속을 받아 낸 후 심해관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인벤토리에 남아 있던 크라켄의 사체 중 나중에 활용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살점 부위를 모두 녀석에게 들려 심해관에 보낸 정시우는 휴식처 문턱을 넘어서며 비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아, 지금부턴 정말 수련뿐이야.”

“마치 여태까진 그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휴식처로 돌아온 후 정시우는 미진했던 탱탱볼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용의 감각 스킬을 수련할수록 자신의 모든 능력이 급격히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젠장, 벌써 다 가르치고 돌아왔단 말인가!?]

“그동안 쉰 만큼 더 열심히 하자고. 일단 탱탱볼 개수를 두 배로 늘릴까?”

모처럼 베토와의 휴일을 즐기던 케이나도 탱탱볼의 시련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물론 정시우가 고안한 만큼 수련효과만큼은 기가 막혔으나, 그들의 감각이 성장하면 할수록 정시우는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채고 탱탱볼의 개수를 늘렸다.

정시우에게는 즐거운, 케이나와 용세하에게는 매 순간순간이 죽음의 고비인 시련 속에서 그들이 새로 숙달한 감각 스킬의 레벨만 쑥쑥 성장했다.

[용의 감각 스킬이 Lv12가 되었습니다.]

“후.”

그러나 수련을 재개하고 다시 열흘이 흐른 시점에서 정시우는 수련의 한계를 깨닫고 몸을 멈추었다. 확실히 단기간에 그의 주력 스킬을 빠르게 성장시킨 것은 좋았지만 용의 감각 스킬의 레벨이 오른 순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공이 너무 느리고 약해서 더 이상은 스킬 수련이 안 될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뭐가……! 약하다는 말씀입니까!”

[무시해라, 용세하. 격장지계다! 너의 빈틈을 이끌어 내려는…… 큭!]

수련장 안에는 정시우가 여태껏 만들어 놓은 인피니티 바운스볼 총 551개가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터였다.

열심히 움직여 봤자 감각을 더는 성장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정시우는 이젠 움직이지도 않고 마나만을 조종하여 그것들을 모두 빗나가게 하고 있었지만, 용세하와 케이나는 지금 이 순간도 필사적으로 몸을 놀려 그것들을 피하고 있었다.

“좀 더 잘 움직여 봐, 그래서야 크라켄의 먹물도 못 피하겠다!”

“그게 뭔지도 모르겠는데요!”

[크학!]

누가 보면 던전의 라스트보스인 정시우가 탱탱볼들을 조종하여 용세하와 케이나를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반드시 네놈을 쓰러트리고 말겠다!]

“훗.”

[끄아아아아악!]

정신없이 탱탱볼을 피해 내던 케이나가 독기에 가득 차 외쳤다. 그것을 본 정시우가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주위로 날아들던 탱탱볼들이 빨려들듯이 방향을 전환하여 일제히 케이나에게 쏟아졌다.

“케이나아아아아! 크학!”

“후, 재밌었다.”

반항의 대가로 처절하게 얻어맞고 녹다운된 케이나, 그녀를 구해 보려다 함께 쓰러지고 마는 용세하. 배드엔딩 묘사까지 완벽했다. 만족한 정시우는 탱탱볼들을 전부 다른 방향으로 쳐 내며 그곳을 나섰다.

“난 이제 나갈 테니까 너흰 적어도 청각하고 시각, 촉각 스킬을 다 얻기 전까지는 나오지 마라.”

“이 안에 뼈를 묻으라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용세하는 시각과 청각, 케이나는 시각과 촉각 스킬을 획득한 상태에서 더는 진전이 없었다. 대신 이미 획득한 감각 스킬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 이상은 재능의 영역인 듯하여 내심 포기하고 있었는데 역시 정시우는 귀신 교관답게 용서가 없었다.

[이 악마 놈 같으니.]

“건승을 기원한다, 제군들.”

정시우는 수련장을 나와 바깥에서 문을 잠갔다. 자신의 소중한 파트너들이 부디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기를 기원한 후 그동안 흘린 땀을 샤워로 씻어 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수아린과 함께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그녀와 둘만이 함께 하는 식사는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분위기가 간지러웠지만, 더는 그것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방어구는? 그동안 베토가 안 찾아왔어?”

“아직인가 봐요. 많이 헤매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형태는 다 잡은 것 같았는데 말이죠.”

그는 수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긴, 그동안 제법 많은 일을 한 것 같아도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것이다.

지구는 아직도 크레센트 에이지에 적응하느라 한창 바쁜 시기였고, 근 한 달간 정시우가 진행한 일들만 해도 무척 많았다. 조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일행의 안전을 위해서도, 확실한 성장을 위해서도.

“잘 먹었습니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는 국그릇을 깔끔하게 비우고는 후, 만족스러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이세계로 떠나기 전 뭔가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부모님한테 짤막하니 안부인사도 드렸고, 마리나와 세리아, 이서희에게도 연락해 두었다. 특히 마리나가 자신도 데려가 달라며 칭얼댔지만 데려갈 방법이 없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면 정말 할 게 없네.”

“개미굴이라도 들어가시던가요? 수중던전에 다시 들어가셔도 되고, 아니면 하늘성에 가 보시겠어요?”

“음…….”

정시우와 수아린이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져 낯이 간지러워졌고, 곧 정시우는 결론을 냈다.

“좋아, 그럼 같이 하늘성에라도 놀러 가 보자.”

“하늘성 가는 걸 놀이공원 놀러 가듯이 말하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수아린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도시락을 쌌다. 그녀도 이미 정시우에게 전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