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203화.
아침. 정시우가 눈을 떠 보니 세이락시아 녀석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푹신푹신한 구름에 파묻혀 하늘을 부유하는 꿈을 꾸었던 것은 아마도 이 녀석 때문이겠지.
따로 방을 정해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알고 기어 들어온 걸까. 그는 잠시간 세이락시아의 볼을 만지작거리다가는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고래였던 주제에 그런 폼으로 잘도 자는구만.”
“일어나셨어요? 식사준비도 마침 다 됐어요.”
방문이 열리며 앞치마를 입은 채인 수아린이 들어왔다. 눈가를 비롯해 얼굴도 조금 붉었지만, 아무래도 어제에 비하면 제법 진정된 모양이었다.
“아린아, 너…….”
“네, 네!?”
어라, 진정된 게 아니었던가!?
“뭐, 왜요? 저도 제 방에서 푹 잘 자고 일어났어요. 불만 없으시죠?”
“어, 응. 아니, 그냥 어젠 미안했다고……. 조금 섬세하지 못한 표현이었던 것 같아서.”
“아아? 아, 그, 그거 말이죠.”
어린 시절 엄마가 아끼던 꽃병을 깨트렸을 때의 정시우가 짓던 것과 똑 닮은 표정을 짓고 있던 수아린은 정시우의 말을 듣고는 노골적으로 안심한 기색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건 이제 정말 괜찮아요. 그런 능력인 거죠? 납득했으니까요. 오히려 당황하는 바람에 주먹이 나가서…… 죄송해요, 오빠.”
“아니, 나도 그건 괜찮은데 너 방금 뭔가 다른…….”
“그럼 됐네요!”
그럼 지금 그 경계는 뭔데.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물어본다고 대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깔끔하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손에 들고 있던 국자로 굳건한 방비 태세를 취하는 수아린의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시우 옆에서 세이락시아가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둘의 목소리가 조금 컸던 모양이었다.
“뿌우이…….”
“그래, 나가서 밥 먹자.”
정시우는 아직 잠이 조금 덜 깬 세이락시아를 다독여 주며 밖으로 나갔다. 수련장에서부터 희미하게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거기……!]
용세하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 거기에 케이나의 기합 소리까지. 용세하는 용세하대로, 또 케이나는 케이나대로 이번 일로 생각하게 된 바가 있으리라.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녀석들도 피로가 많이 쌓였을 텐데 무리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아무리 그래도 오빠만큼 할까요.”
“나도 피로는 금방 풀렸어. 단지…….”
크라켄과의 일전에서 깨달은 고유능력과 새로운 능력. 번뜩이는 깨달음이 그가 숙면을 취하는 동안 보다 완전히 그의 몸에 녹아들며 능력을 추가로 성장시켜 주었다.
전투의 결과로 단숨에 수십 이상 레벨이 오른 것도 있어서, 정신의 격에 육체를 맞춰 끌어 올리고 신체리듬을 완전한 상태로 다듬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실제로 지금 그는 잠들기 이전에 비해 스테이터스 면에서도 강해지고, 신체적으로도 안정감을 되찾은 상태였다. 용의 감각의 조정도 완벽했다.
“자는 것만으로도 강해진다니 대체.”
“위업에 대한 정산을 자면서 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간단하지?”
“식사나 하세욧.”
“뿌이!”
아침으로 나온 계란찜과 된장국만으로 밥을 네 공기 정도 비우며(세이락시아에게는 따로 크라켄 구이를 차려 주었다.) 정시우는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가능하면 베토가 제작하고 있을 방어구가 완성되기까지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 놓을 셈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재가 워낙에 좋은 탓에 세 명 분의 방어구를 만들려면 적어도 시간이 한 달 이상은 걸린다는 모양이었다.
“하늘성이야 다른 플레이어들이 잘 해 주고 있으니 나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테고, 개미굴은 바로 얼마 전에 깔끔하게 정리했고…… 엘 하고는 다시 얘기를 좀 해야겠지.”
“이세계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들 때문인가요?”
“한 자리에서 수억 마리 이상의 몬스터를 때려잡았으니 당분간은 엘 휘하의 부하들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그쪽 관련 문제는 없을 거야. 문제는 인간들이지.”
플레이어들, 그리고 마석을 얻고자 하는 다른 무수한 인간들. 기껏 이세계 몬스터들로부터 오는 위협을 처단해 놨는데 토종 몬스터들과 인간 사이에 대대적으로 시비가 붙는다면 엘에게 면목이 없을 것이다.
“인간들은 토종과 외래종을 거의 구분하지 않으니까 말이죠…….”
[오히려 그 둘을 구분할 필요성이 생긴 지금의 지구가 기이한 환경인 것이지. 토종 몬스터 세력이 이렇게나 번창한 경우는 지구가 유일할 것이다.]
“그것도 전부 내 덕이지.”
[재수가 없군…….]
최대한 양쪽이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협의를 해야 했다. 지금은 수그러들었어도 결국 이세계로부터의 침공은 계속될 터이고, 인간에게도 토종 몬스터에게도 서로 연합하는 것만이 살길이니까.
“엘에게 영어를 가르쳐 두자. 어떻게든 단기간에 학습을 시켜야겠어.”
“소통능력만으로 될까요.”
“안 되면 내가 몬스터들 편으로 붙는다고 선언이라도 해 두지 뭐. 사실 그 방안도 처음부터 생각해 두고 있었어.”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닌 지도자 아래 수억의 몬스터가 모여 집단을 이루고, 거기에 인간 중 최강자의 협력이 더해진다면 그 어떤 인간도 감히 그들을 몬스터로 사냥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평화롭게 교류하며 공동전선에 서는 것은 불가능해도, 최소한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않게 되겠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뿌이, 너도 마찬가지야. 수중 몬스터의 대표로서 인간들 앞에 나서야 할 때가 곧 올 거야.”
“뿌이!”
정시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지, 세이락시아는 자신을 부르는 말에 그저 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녀석으로 괜찮을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별 방도가 없었다. 수중 몬스터임을 상징하는 물의 능력과 인간의 외견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세이락시아는, 인간의 언어만 습득한다면 수중 몬스터의 대변자로 나서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될 터였다.
“그렇게 양측 몬스터 세력의 입지를 다져 놓은 후에 이세계로 출발하는 건가요…….”
“아니, 실은 그전에 한 가지 더 해 둬야 할 일이 있어.”
“그게 뭡니까, 형님?”
정시우는 진지한 얼굴로 물어 오는 용세하에게 마찬가지로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바로 개구리 몬스터를 잡는 거야.”
“아아, 그렇군요…….”
용세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죽어 버렸지만 정시우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뿌이한테 들었는데, 아무래도 높은 점프력과 탱탱한 피부를 지닌 개구리 몬스터들이 태평양 외딴 섬 해안가에 단체로 서식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다는 모양이야. 상당히 거대하고 강력한 놈들이 군집하고 있어서 뿌이도 건드리지 못했다니 그 능력은 확실하겠지!”
“그 확실한 능력을 지닌 개구리들을 잡아 탱탱볼을 강화하시겠다 그거군요.”
“바로 그거야……!”
정시우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오감 스킬을 수련하던 시절 그렇게나 간절히 원했던 강화 탱탱볼 수련의 꿈을 이룰 시점이 드디어 지금 이 순간 찾아온 것이다!
정시우는 감격에 젖어 말을 잇지 못했으나 용세하는 곧 자신도 강제로 참여하게 될 감각 수련의 공포에 치를 떠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케이나만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구리? 탱탱볼?]
“곧 알게 될 거예요. 아마 당신도 빠져나갈 수 없을 테니까…….”
본인만은 사제 계열이라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수아린이 말했다. 케이나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피니트 바운스볼]
[랭크 ? A]
[공격력 ? 500 ? 3,500]
[옵션 ? 에너지 드레인]
[굉장한 탄력을 지니고 있어 목표 지점에 도달한 순간 보다 거센 힘으로 튀어 오른다. 착탄 순간만은 굉장히 딱딱해지며 대상의 체력과 마력을 흡수하여 상태를 회복하고 에너지를 얻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오 맙소사, 이거야말로 바로 내가 원했던 거야…….”
정시우가 아직까지 개구리 체액이 눌러 붙은 채인 뺨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몇 번인가의 시행착오 끝에 완벽한 조합 비율로 탄생한 탱탱볼의 자태는 실로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탱탱볼 주제에 최대 공격력이 3,500이라니…….”
“그야 레벨 250을 넘기는 괴물 개구리들의 마석과 부산물을 더해 만들어 낸 거니까요. 아니, 이 부엌 대체 어떻게 그런 공정까지 가능한 거죠?”
“우리한테 허락된 시간은 짧아. 탱탱볼 대량생산이 끝나는 대로 곧장 수련에 들어가자.”
“크흑.”
방어구라도 걸치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최대 공격력 3,500의 탱탱볼에 끊임없이 얻어맞다 보면 그 어떤 방어구라도 금방 깨져 버리고 말 터였다. 용세하는 사약을 받기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도마 위에서 하나둘 탱탱볼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케이나 너도 하는 거야.”
[저 공을 베어 버려도 되는가?]
“아니. 그래도 몸으로 받아 내거나 주먹으로 쳐 내는 건 돼.”
[……그렇다면 하다못해 수련 시간을 달리했으면 좋겠다만.]
“안 돼.”
정시우는 몰라도 용세하 앞에서는 고고한 스승 포지션을 유지해 왔던 케이나에게 처음으로 위기가 닥쳐온 순간이었다.
케이나는 자기 나름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봤지만 정시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이 앞으로 크라켄을 만나도 쫄아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최소한의 수련만은 시켜 놓을 생각이었다.
“나중엔 크라켄만이 아니라 신과도 직접 싸워야 할 텐데 탱탱볼 정도로 물러나지 말자고!”
[그렇다면 차라리 그 신이라는 놈을 데려와라. 탱탱볼에 패배하는 것만은 죽기보다 싫다.]
“그건 나중에.”
정시우는 사약을 마실 준비를 마친 용세하와 끝내 체념하지 못한 케이나를 잡아끌고 수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
거실에 남겨진 수아린은 아직까지도 심해관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세이락시아와 아무 의미도 담기지 않은 시선을 주고받다가는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쿠키 먹을래?”
“뿌이!”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처음엔 딱 세 개로 시작한 탱탱볼 수련은 이틀 차에 30개, 사흘 차에 100개를 돌파했다. 탱탱볼 개수를 늘리는 데에는 물론, 정시우 외에 다른 일행의 동의 여부는 관계가 없었다.
그 시점에 이미 용세하와 케이나는 모든 탱탱볼을 피해 내는 것은 포기하고, 피할 수 있는 만큼만 피하고 피할 수 없는 탱탱볼을 상대로는 방어 스킬과 맨몸 공격 스킬을 수련한다는 스탠스를 확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정말 다 피하고 있다니…….]
방대한 수련장을 120개가 넘는 탱탱볼이 거의 광속이 아닐까 싶은 속도로 튀어 다니고 있는 지금, 난반사하는 모든 탱탱볼을 피해 몸을 놀릴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정시우가 해내고 있는 것이다.
“감각을 확장해. 각각의 탱탱볼이 튀어 오르는 순간만 파악하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더욱이…….”
인피니트 바운스는 수련장 벽이나 천장,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수련장의 마나를 빨아들여 힘을 늘린다. 즉 마나를 읽어 낼 수 있다면 탱탱볼을 피하기 쉬워진다는 얘기였다. 그것도 120개가 넘는 탱탱볼을 상대로!
밥 선생님의 그림 강좌 같은 정시우의 설명에 용세하와 케이나는 그저 이만 갈았다.
“형님을 이렇게나 간절히 때려 보고 싶었던 것은 처음이야……!”
[우연이군, 나도 그렇…… 아얏!]
정시우가 허공으로 주먹을 뻗자 마침 날아들던 탱탱볼이 그의 주먹에 얻어맞고 방향을 바꿔 날아가 귀신 같이 케이나의 정수리를 가격했다. 그 순간 케이나의 표정에 독기가 깃들었다.
[좋아, 해 보자는 거지.]
“아주 좋은 표정인데 그래!”
“너무 무서워, 나 여기서 나갈래…….”
[용세하, 협력해라! 2대1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내가…… 아얏!”
단순한 탱탱볼 피하기 수련에서, 사방에서 날아드는 탱탱볼의 궤도를 바꾸어 상대를 공격하는 미니게임까지 추가되니 더더욱 피 터지는 수련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다시 사흘, 용세하가 기적적으로 시각 스킬을 획득하고 케이나가 시각은 물론 촉각 스킬까지 획득한 시점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지상 몬스터의 여왕 에리우로부터의 전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