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198화.
자신의 종속들을 이용해 크라켄에게 맞설 마지막 수단을 발현한 직후, 정시우는 그의 시야마저 가려 버리는 백광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는 떴다.
그곳에는 수중던전 속 크라켄의 모습이 아니라, 어두운 구름에 덮인 하늘과 구름을 뚫고 지상에 쏟아져 내리는 유성우의 모습이 있었다.
‘또 용의 꿈이구나. 하긴 용과 관련된 능력이니까 슬슬 또 쿨이 찼다고 생각하기는 했지.’
그리고 그가 맞았다. 그는 용이 되어 있었다. 이제 와 놀라울 것도 없다. 강탈이든 지배든, 그것이 정시우가 느끼는 용의 본질에 가깝다는 것은 분명했고, 거기에 자극을 받아 또 꿈을 꾸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이번 꿈에서 이전까지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세계에 용을 제외한 다른 존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존재 또한 용이었다. 정시우의 의식이 깃든 용보다는 그 존재감이 다소 미약했지만 용은 용이었다.
[어리석다.]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목소리로 상대방이 말했다.
[한없는 강함을 숭상하던 네가 어째서 퇴보를 선택하는가.]
[퇴보? 그저 무한히 앞으로 나아가는 길의 단편일 뿐이다. 그것을 읽어 내지 못하는 네가 더 어리석구나.]
정시우와 조금도 닮지 않은,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용은 대꾸했다. 상대방은 그 말에 실망스럽다는 투로 대꾸했다.
[모두가 너를 비웃을 것이다. 전투를 피하고 도망칠 구멍을 파는 지렁이라고 부를 것이다.]
[지렁이, 토룡이라. 그도 용은 용이니 좋지 않은가. 나는 지하가 좋다. 모든 것이 그곳에서 비롯되었으나, 끝내 솟아 하늘에 이르리라.]
[하늘? 그전에 붙잡아 내팽개칠 것이다. 태양에 이르지 못하고 지면 위에서 바짝 말라죽게 될 것이다.]
[네가?]
용이 상대방을 비웃었다. 정시우의 그것을 완전히 닮은, 그러나 규모 면에서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날개가 가득 펼쳐지며 하늘을 가렸다. 그 순간 지면에 격돌하기 직전의 유성우가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마력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 말고는 완전 모르겠네.’
역시 나는 마법은 텄구나, 하고 정시우가 새삼스레 깨닫는 가운데, 용은 상대방에게 실로 오만한 목소리로 고했다.
[불쌍하고 가련한 아이들아, 그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임을 밝히기 전까지, 그 누구도.]
[과연 그렇게 될지 두고 보지.]
[좋은 눈빛이다. 너도 네 나름의 목표를, 어디 있는 힘껏 달성해 보아라.]
용들의 대화가 끝났다. 상대방은 짧은 영창조차 없이 빠르게 마법을 발동하여 곧장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그 자리에 홀로 남은 용은 피식 웃으며 마법을 연달아 발동시켰다.
다가오는 멸망을 맞이하여,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이윽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싹이 트리라.]
그 순간 정시우는 눈을 떴다. 혹시 용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는 거대한, 아주 거대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종속들의 육신과 마력, 영력으로 자기 자신이 자아낸 거인의 육신에, 그의 정신이 온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너, 너…….]
그리고 눈앞에는 그렇게나 그를 공포에 질리게 했던 크라켄의 모습이 있었다. 이전에 비해 제법 만만해 보였다.
[어떻게……!?]
크라켄이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더 이상 길이와 두께로 구분 짓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거대해진 놈의 여덟 개 다리가, 정시우의 몸을 차마 침범하지 못하고 강력한 마력과 물리력을 발휘하는 그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정시우는 그것을 비틀어 놈에게 고통을 주며 씩 웃었다.
“거기서 더 거대해질 수 있냐?”
[나, 나를…… 헤데아 님……!]
놈과 동일한 시선을 갖게 되니 깨달은 것이 있다. 놈은 결코 보이는 덩치만큼 거대한 존재가 아니다.
신의 힘을 빌려 억지로 억지로 자신의 몸을 부풀렸을 뿐, 정시우와의 수십 시간에 이르는 전투에 실은 이미 극한의 피로와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도 그리 다르지 않지. 제아무리 지배를 각성했다고는 해도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건 힘들어.’
그의 상태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거인? 크라켄의 다리를 붙잡아 비틀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성장한 지금 정시우의 상태는 크라켄 못지않게 불안정한 상태였다. 애초에 반쯤 기합과 억지로 이룬 경지다. 완전히 터득하기 위해선 피나는 고련이 필요할 터였다.
지금도 그의 의식 안에서 다른 무수한 종속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부하들과 뜻을 하나로 합치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래도 어쨌든 한 방 먹이는 건 가능하거든……!”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거인의 육체를 얻은 것으로 인해 한 가지 더 얻게 된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무기에 찾아온 변화였다.
[조건을 달성하여 마신의 징벌의 옵션이 강화됩니다.]
[마신의 징벌]
[랭크 ? S+++]
[공격력 ? 6,500 ? 8,500]
[숙련도 ? 1,967/40,000]
[속성 ? 1. 독염 A+++ 2. 흑뢰 A++]
[옵션 ? 1. 거대화 가능(소, 중, 대, 특대, ???) 2. 주위 마나를 흡수해 차지 스트라이크 가능 3. 절대로 파괴되지 않음 4. ???]
[스스로 성장하는 자의 궤적을 쫓아 스스로 성장하는 신물.]
마신의 징벌은 지금까지도 스스로 알아서 잘 성장해왔지만, 정시우가 두 번째 고유능력을 각성하고 새로운 힘을 얻는 것에 따라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바로 거대화 기능이었다.
[그런 자그마한 망치를…… 음!?]
“거대화…… 특대.”
정시우는 마신의 징벌의 거대화 기능을 여태까지 아주 잘 사용해 왔다. ‘거대화 ? 소’만 해도 어지간한 건물은 한 큐에 날려 버릴 수 있었고, 괴력 스킬을 일상적으로 수련하게 되며 힘이 늘고부터는 ‘거대화 ? 중’, 나중에는 ‘거대화 ? 대’까지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정시우의 힘이 부족할뿐더러 거대화 기능이 ‘대’까지밖에는 없었기에 그것이 정시우의 최대였던 것이다.
“차지…….”
[네, 네놈……!]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정시우는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모든 종속의 힘을 받아들여 덩치를 불리며 그 힘 또한 과거 없었던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에 따라 마신의 징벌 또한 성장했고…… 결국 길이 3킬로미터, 너비 500미터, 두께 200미터에 이르는 말도 안 되는 병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이 정시우의 손에 들리니 딱 맞는 크기로 보였다. 크라켄과 한판 붙을 크기로 성장한 지금의 정시우에게 맞는 크기로!
“스트…….”
[놔, 놔라. 놔!]
크라켄은 어떻게든 정시우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는 놈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더 이상 덩치로는 정시우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없었고, 먹물이나 다른 수중마법으로도 생채기 정도밖에는 낼 수가 없다!
[헤, 헤데아 님. 당신의 종이! 당신의 종이 지금 하찮은 인간을 상대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헤데아 님!]
더욱이 정시우는 마신의 징벌의 옵션인 차지 스트라이크를 발동하면서, 마나 드레인을 활용하여 수중던전의 마나는 물론이고 크라켄의 마나까지 있는 대로 끌어당기고 있었으므로 놈이 자유롭게 저항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크!”
[카하아악!]
그리고 끝내 그것이 작렬했다. 정시우의 괴력을 고스란히 담아낸 초거대 해머가 수중을 가르는 과정에서 세이락시아의 물을 다루는 힘에 의해 오히려 힘과 속도를 더하더니, 크라켄이 몸을 비틀 새도 없이 정확히 놈의 머리통에 명중하며 실로 끔찍한 폭음을 터트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악! 크하아아아아아!]
크라켄이 폭음에 지지 않겠다는 듯이 비명을 토해 냈다. 거인화하면서 증폭된 마력을 온전히 신성력과 독염, 세이락시아의 권능으로 전환하여 때려 박은 일격. 제아무리 신에게 사랑받는 시종이라 한들 아이처럼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고통이었다.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차지 스트라이크의 효과는 단순히 강한 공격이 아니다. 극한에 가깝게 응축된 에너지가 한 점에서 폭발하며 놈의 피부를 단숨에 걷어 버리고 한없이 연약한 속살에 치명적인 독염을 퍼트려, 이대로 놔두어도 빈사로 몰고 갈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정시우가 아니다. 거인화가 풀리기 전에 어떻게든 놈을 죽여 놓아야 하니까!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스킬을 정시우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반복재생.”
그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조용히 속삭이며 망치를 들어 올렸다.
재앙이 재래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록 위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차지 스트라이크는 차지 스트라이크! 두 번째 일격에 얻어맞는 그 순간 크라켄이 실로 끔찍한 단말마를 부르짖었다.
정시우는 놈이 소리를 지를 여력도 없게 망치를 두어 번 더 휘둘렀고, 크라켄의 생명반응이 확실하게 소멸하는 것을 인지하고서야 망치를 거두었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거인화 상태도 그것으로 깨끗이 풀렸으나, 정시우는 크라켄 소멸의 순간 자신을 덮쳐 오는 거대한 마나와 기록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벨이 46 올랐습니다.]
[각 내성 스킬이 큰 폭으로 성장합니다. 그중 특히 빙결 내성이 크게 성장합니다.]
[용의 감각 스킬이 Lv8, 용의 위엄 스킬이 Lv13이 되었습니다.]
[카오스 윙 스킬이 Lv3, 카오스 테일 스킬이 Lv7, 카오스 스케일 스킬이 Lv9가 되었습니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Lv15가 되었습니다. 아직 그 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스킬 및 스펠을 시도할 경우, 설령 획득하지 못하더라도 시전에 성공할 수 있게 됩니다.]
[소울 포스 스킬이 Lv15가 되었습니다. 영혼을 다루는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며, 정신력이 큰 폭으로 성장합니다.]
[괴력 스킬이 Lv13이 되었습니다. 거인의 감각을 기억합니다.]
[강타 스킬이 Lv83이 되었습니다. 스킬 시전 시, 일정 확률로 ‘거인의 일격’이 발동합니다.]
[반복재생 스킬이 Lv10이 되었습니다. 재생되는 스킬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조련 스킬이 Lv15가 되었습니다.]
정시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20도 아니고 30도 아니고 46? 그 외에도 놀라운 성장이었지만 레벨이 단숨에 50 가까이 오르는 것보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의 전신을 덮쳐 온 격통이 그의 의심을 단숨에 날려 주었다. 이 정도 고통이라면 레벨이 46 오르는 것이 확실했다! 분명 죽었을 크라켄한테 한 방 얻어맞는 기분마저 느끼며 정시우는 거품을 물었다.
“그으아아아아아.”
[주, 주인님! 뼈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만…….]
거인화가 끝나 수중으로 풀려 나온 케이나가 경황 중에도 정시우의 몸을 걱정했다. 그러나 크라켄의 사망 순간 분출되는 마나와 기록 모두를 탐욕스레 끌어당겨 육신을 변화시키는 정시우의 모습을 보며 그리 큰 걱정은 필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뿌이이이이이이이이이!]
한편 세이락시아는 그저 정시우와 하나 되어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뿌듯하게 울음을 울 뿐이었다. 그와 함께 크라켄을 해치운 덕분에 녀석의 레벨도 상당히 올랐지만, 그 정도 고통은 기쁘게 받아넘길 수 있었다.
그때 크라켄의 시체 속에서 미약한 빛이 이는가 싶더니 깊고 어두운 물속에서도 신비롭고 찬연하게 빛나는 보석의 결정이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그것은 새로운 주인을 찾듯 물속에서 흔들거리다가는, 이내 세이락시아의 콧잔등 위에 살포시 앉았다.
[헤데아의 파편을 얻었습니다.]
수아린이 있었더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태클을 걸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초괴수대전이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