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로그인-190화 (190/260)

# 190

190화.

마리나의 보너스 가불 사건이 정시우를 비롯한 일행에게 남긴 충격은 지대했지만, 언제까지고 그 장소에 그대로 굳어 있을 수도 없었다.

일행은 다른 사람들의 몰리는 시선을 피해 장소를 옮겨 대화를 나누었다. 바로 크레센트 에이지로 진입한 지금 그들이 취해야 할 행동방식에 대해서였다.

“마리나는 잔뜩 의욕이 샘솟아 있는 상태인 것 같은데…… 이번 던전과 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하늘성 던전을 탐험할 때도 주의해.”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이제 시우 너도 하늘성 던전에 들어올 수 있는 거 아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와 함께하면 걱정이 덜할 텐데. 네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마리나와도 함께할 수 있고 말이야.”

이서희의 말이었다. 살짝 가시가 돋쳐 있는 그녀의 말에 정시우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무래도 앞으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조금 더 공격적으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 이상으로?”

“그래, 이 이상으로.”

아까 마리나는 정시우를 따라잡겠다고 잔뜩 기합이 들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정시우는 앞으로 그 차이는 더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스템의 보호 아래서 이루는 성장은 보다 안전하고 확실하지만 너무 느리니까.

“정말, 어디서 무얼 하려는 건지…….”

“아, 물론 그전에 처리해야 할 것도 있기는 있어. 수중던전 말이야.”

“그것도 결국 우리는 함께하지 못하는 거잖아.”

이서희가 볼을 두툼하니 부풀렸다. 그녀가 마리나와 어울리게 되며 표정이 소녀 시절처럼 풍부하게 된 것이 새삼스레 기뻐진 정시우였으나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이내 이서희가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우리한테는 이렇게 말해 놓고 나중에 마리나만 몰래 데려가는 건 아니겠지?”

“아니거든. 물론 마리나가 너희 중 가장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러니까 마리나가 강해서 좋은 거구나, 너는.”

이서희의 볼이 다시 불룩해졌다. 마치 개구리를 보는 것만 같아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더니 레이저라도 뿜어낼 것만 같은 차가운 시선이 돌아왔다. 정시우가 입을 다물자 세리아가 한숨을 쉬며 그 대신 말했다.

“진정해, 서희. 결국 마리나보다 강해지면 된다는 얘기니까.”

“……응.”

어째 진정시키는 방향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 무슨 얘기하냐?”

“시우 님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실 때가 올 것을 대비해 하늘성을 빠르게 정복해 버리겠다는 얘기입니다. 머릿속까지 핑크빛으로 물든 마리나보다는 저희가 압도적으로 빨리 강해질 겁니다. 장담해도 좋아요.”

“음, 으음.”

세리아의 말에도 어째 가시가 돋친 것 같은데!? 정시우가 움찔하자 세리아가 한숨을 쉬며 말을 보탰다.

“우리 모두 시우 님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옆에서 돕고 싶을 뿐입니다. ……언젠가 그런 때가 오겠죠?”

“……아마 언젠가는.”

사실 지금도 그녀들이 약해서라기보단, 정시우가 그녀들을 대동하고 이세계로 넘어갈 수 없기에 자세히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시우의 말에 세리아는 작게 웃어 보이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그걸로 족하고 물러나 드리죠.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길. 자, 서희. 가자. 어리광 부릴 시간에 강해져야지.”

“우응.”

세리아와 이서희가 함께 그곳을 떠났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후, 정시우는 그 자리에 그대로 뻗어 있고만 싶은 심정이었으나…… 곧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들에게 전달한 대로 수중던전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아린이 너는 뭐 할 말 없냐?”

“없어요. 할 말은 아까 다 했고, 그리고…….”

이서희와 세리아 이상으로 수아린에게 들들 볶일 것을 각오했던 정시우였으나 수아린의 반응은 생각보다도 쿨했다.

“저까지 오빠 괴롭히기 싫은걸요. 애초에 지들이 오빠의 뭐라도 된다고 저러는 거람. 그저 오빠가 마리나한테 기습당했을 뿐인데.”

정시우는 수아린의 어른스러운 태도에 감동했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성장했단 말인가! 그때 수아린이 거기에 말을 덧붙였다.

“마리나한테는 제가 나중에 잘 말해 둘게요. 하지만 오빠도 괜히 다른 여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앞으로 좀 더 가드를 확실히 하실 필요는 있어요.”

“어, 으응……?”

수아린이 그런 말과 함께 정시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마치 자신만이 정시우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정시우는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에 당황하다가는 문득 아까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 냈다.

그리고 침묵하고 말았다.

“음……?”

그것을 본 용세하는 자신이 정시환을 지키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둘 사이에 무언가 긍정적인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 그들과 함께하며 자신은…….

“오, 맙소사…….”

[왜 그렇게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가, 용세하.]

“지금 네 표정이 썩어 있는 것과 비슷한 이유야, 케이나…….”

정시우는 저 녀석들 제법 잘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살포시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수아린의 한없이 자상하고 포용력 넘치는 눈빛이 무서웠다. 그러나 이내 쓰게 웃어 버렸다. 그 이상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였으니까.

물론 방금 생각한 것은 수아린에게는 비밀이었다.

“어서 오세요, 영주님. 날개를 얻으신 것을 축하드려요!”

“고맙다, 이 불법주거침입자야.”

휴식처로 귀환한 정시우는 당당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요정상인 루타와 마주했다. 그가 단호하게 그녀를 들어 올리자 루타가 날개와 양팔을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기념선물까지 드렸는데 절 이렇게나 험악하게 취급하시다니!”

“네가 아니라 다른 애가 준 거잖아.”

“그게 그거라구요! 이심전심! 물론 전 비드를 좀 받아 낼 생각이기는 했지만!”

솔직한 자백에 정시우는 그쯤에서 녀석을 봐주기로 했다. 루타는 풀려나자마자 준비하고 있었던 말들을 그에게 주르륵 늘어놓았다.

“물론 영주님은 아티팩트를 사용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계시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소 조건일 뿐이에요. 실제로 영주님은 아직 신의 힘을 직접 손에 넣지 않는 이상은 그들의 힘을 흉내 낼 수 없으시지요?”

“뭐야, 그런 경지도 있었어?”

“지금 영주님의 경지도 평범하게 마나를 다루는 이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경지랍니다.”

정시우가 침묵하자 루타는 귀엽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신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지구를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 사이에도 실시간으로 전쟁이라 불러 마땅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요. 그리고 영주님은 이미 그들 중 일부에게 눈에 보일 만큼 뚜렷한 타격을 입히셨고…… 잘 하면 그것이 신들의 전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만약 영주님의 활약으로 약화된 신이 다른 신에게 지고, 그 끝에 소멸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적대해야 할 신이 한 명 줄어 편해지는 결과가 나올까요?”

이렇게 물어본다는 건 죽어도 그것만은 아니라는 얘기겠지…… 정시우는 가만히 생각하다 말고 문득 물었다.

“혹시 이긴 신의 힘이 엄청 강해지거나 하냐?”

“빙고. 신들의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후의 한 명을 가르는 것이거든요. 당연히 승자에게 힘이 집중되지요. 영주님이 전투를 거쳐 레벨을 성장시키는 것과 별반 다를 바도 없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저는 영주님께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어요.”

루타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녀의 손가락이 두 개, 펴져 있었다.

“모든 신의 세력을 살금살금 깎거나, 한 명을 맹공하여 완전히 그 힘을 앗아 버리거나. 물론 후자를 택하기엔 영주님이 아직 많이 약하시지만요.”

“그러면 묻자. 신은 모두 몇 명이나 되지? 그래야 내가 모든 신의 세력을 깎든 말든 할 거 아냐.”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수중던전과 개미굴, 하늘성을 모두 탐색하신다면 그들 모두의 흔적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신의 힘을 구분하실 수 있게 된 지금이라면 그리 힘든 얘기도 아니지요?”

“……좋아,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정시우는 다시 루타의 목덜미를 붙잡고 들어 올릴 준비를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너희는 대체 나의 뭐냐? 그리고 나한테 무엇을 바라는 거지?”

“그야 물론.”

요정상인 루타가 까르륵 웃으며 답했다.

“금칙사항이랍니다!”

“야!”

“그럼 전 이만! 쿠키 올려놨으니까 뺏으러 오지 마세요!”

“큭…….”

정시우가 움직이는 것보다도 루타가 도망치는 것이 더 빨랐다. 정시우의 무력이 빼어나게 성장한 지금이라면 억지로 그녀를 붙잡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이전보다는 정보가 늘어났네요. 명확한 행동지침을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하늘성과 개미굴이 프롤로그였다면, 신들과 직접적인 힘을 겨루는 본편으로 진입한 기분도 들고…….”

[역시 저들은 하늘성의 시스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 것인가.]

“글쎄…….”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케이나의 말을 부인했다. 당장 그만해도 이전에는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로는 오히려…….

“저들은 시스템이 아니라, 나와 연관된 존재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늘성은?]

“그것도 나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랑 얘기를 나누고 그런 생각이 강해졌어.”

[자의식 과잉이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공교롭게도 나도 주인님과 생각이 같다.]

케이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툭 까놓고 말해 요정상인들이 주인님에게 보이는 호의가 장난 아니지 않은가. 난 주인님이 요정상인들에 한해 매료해 버리는 고유능력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다.]

“그런 능력은 별로 갖고 싶지 않은걸. 않지만…… 역시 그러려나.”

“……자자, 기껏 루타가 직접 쿠키를 주고 갔으니, 일단 이걸 먹고 후다닥 움직이죠.”

대체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런 사춘기 청소년에게나 어울릴 법한 고민에 정시우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수아린이 일단 그들을 진정시키고 나섰다.

루타와는 신과 싸우느니 마느니 거창한 얘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지금 그들이 맞서야 할 것은 신이 아니었으니 벌써부터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원래 머릿속이 복잡할 땐 몸을 움직여야 하는 법이에요. 그리고 오랜만에 뿌이도 보고요.”

“그래, 뿌이가 있었지.”

너무 오랫동안 찾지 않았다며 투정이라도 부려 올 것 같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아린이 내민 쿠키를 이로 받아 깨물었다. 이전보다 한층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용세하와 케이나가 다시 암담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자리 비워 드려야 할 것만 같은데…….”

[넌 그 나이 먹고 여자 친구 하나 안 만들고 뭐하는 거냐, 용세하.]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생각나는 말 하지 말아 줄래?”

그로부터 20분 후, 쿠키를 먹고 진정한 정시우 일행은 거주지역의 호수를 통해 실로 오랜만에 심해관으로 향했다.

드디어 수중던전에 입장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