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화.
크레센트 에이지로의 진입이 완료되고 2시간이 지났을 즈음 38단계 던전에 갇혔던 플레이어들이 무사히 돌아왔다. 비록 4할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목숨을 잃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전멸을 각오하고 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결과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음 놓고 그들을 환영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물론 그들의 손에 끌려 나온 괴물의 정체 때문이었다.
[크하아아아아아아아! 크그그그가아아아악!]
“저 괴물이 용성 길드의 마스터 이강후라는 말씀입니까!?”
“마석을 섭취하여 당장의 마력 증가를 노리다가 그만…….”
“저자가 플레이어의 사체를 흡수했어요! 인간을, 플레이어의 존재를 모독했다구요! ……이, 이렇게 말하면 되죠?”
용성 길드의 마스터 이강후의 변이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하늘성과 던전 내부에서는 전자기기가 작동하지 않지만 바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공위성이며 플레이어들의 스마트폰에 놈의 흉측한 모습이 그대로 찍힌 것이다.
비대하게 부푼 덩치,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게 일그러진 육체. 너덜거리는 촉수에, 놈의 육신 안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마력이 더해져 플레이어들에게는 혐오와 그 이상의 공포를 안겨 주었다.
“맙소사. 인류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한 거지?”
“인류가 아냐, 전부 이강후 저 자식이 나쁜 거잖아!”
[끄하아아아아!]
“히익!”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끊임없이 몰려오는 이계의 몬스터들에게 대항하기도 벅찬데 이젠 같은 인간과도 싸워야 한다니, 그것도 저런 괴물과!
그런데 한창 암담한 심정에 빠진 플레이어들 앞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물론 마신의 징벌을 쥐고 있는 정시우였다.
“좋아, 다들 확실히 찍었지? 정체도 다 알렸고? 그러면 피해가 나오기 전에 얼른 마무리해 볼까.”
[마나아아아르으으으으을……!]
인간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촉수 괴물로 변이한 이강후는 과거 제주도에서 처리했던 김하룡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의 정시우에게는 그리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사실, 바람의 질주를 얻고 카오스 윙을 각성한 지금 정시우에게 있어 김하룡과 이강후의 무력의 차이는 얼마나 더 때려야 죽느냐, 정도의 오차에 불과했다.
[마나아아아아아!]
“그래, 네가 좋아하는 마나 잔뜩 먹여 주마!”
다른 플레이어들이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동안, 정시우는 카오스 스케일을 끌어 올려 놈의 촉수 공격을 그냥 맞아 주며 망치로 놈을 흠씬 두들겼다. 해머가 놈의 몸통에 작렬할 때마다 끔찍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칵! 카학!]
“때릴 구석이! 많아서! 좋네!”
[끄아아아악!]
사실 보다 깔끔하게 죽여 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이 방법을 선택했다. 보다 시각적인 효과가 뛰어나고, 그의 무력을 보여 주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끓어넘치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선 놈을 쉽게 죽여 줄 수 없었다.
[마나…… 어째서……!]
“그러게 분수에 맞지도 않는 짓을 누가 하래?”
그것은 한없이 일방적인 승부였다. 놈이 아무리 촉수에 마나 드레인까지 동원하여 정시우를 상처 입히려고 해도 정시우의 비늘을 상처 입힐 수도, 그의 마나 드레인을 넘어설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촉수가 비늘을 뚫는 데 성공한다 해도 놈을 기다리는 것은 7레벨의 침식 내성. 정시우는 방어구의 부재를 비늘과 내성 스킬로 때워 버리고 있었다!
[침식 내성이 Lv8이 되었습니다.]
[어째, 서…… 마, 리나…….]
“읏차!”
[꾸헤에에에에엑!]
독염과 흑뢰가 가미된 마신의 징벌에 흠씬 두들겨 맞아 넝마가 된 이강후. 정시우는 마지막으로 해머를 거대화하여 그런 놈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이미 촉수는 전부 타 버리고 없어, 그저 하나의 덩어리라고 불러 마땅한 놈의 잔해가 유성처럼 지상으로 추락했다. 심지어 정시우는 날개를 펴고 그 뒤를 쫓아가며 해머로 추가타를 넣기까지 했다!
“지독해!”
“무, 무서워…… 저 사람만은 절대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는데…….”
정시우는 기어이 놈이 가루 한 톨 안 남기고 소멸할 때까지 때려 죽였다. 시체마저 곱게 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이는 집행이었다.
그러나 사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종국에 이강후가 어떤 존재로 변이했든 결국 그 근본은 플레이어였고, 따라서 놈이 죽자 자연스레 유령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잿가루마저 바짝 타 사라진 자리에 불길한 검은색의 마석이 하나 남았다.
“오빠, 그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미 알고 있잖아.”
정시우는 씩 웃으며 마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비록 끔찍하게 변질되기는 했지만, 놈이 흡수한 막대한 마력의 정수가 깃든 마석. 너무나 많은 종류의 마력이 섞여 평범한 플레이어는 노출되는 것만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었지만, 정시우에게는 당연히 아니었다.
단 지금 이걸 어쩌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정시우는 마석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씩 웃었다.
“자, 이제 놈이 지상에 남긴 것들이 끝장나는 것만 지켜보면 되겠네.”
[일일이 그렇게 섬뜩한 말을 하는 것 좀 참아 줬으면 좋겠군, 주인님…….]
그러나 케이나에겐 애석하게도 모든 일은 정시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이강후와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플레이어들이 보고 겪은 일, 요정상인의 말, 세상으로 뛰쳐나온 이강후의 끔찍한 모습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뉴 에이지가 닥쳐온 후 1년도 되지 않아 크레센트 에이지로 진입하며 한창 혼란스러워하던 인류에게, 마석의 과다 섭취로 인한 인간의 변질은 마침 딱 좋은 성토감이 되어 주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심각한 사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인류의 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할 마석을 개인의 욕심으로 소모하고, 나아가 저런 참상을 만들어 내다니. 용성은 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단 말인가!”
용성 길드와 용화 그룹 소유의 공장과 건물들이 모두 무너진 일이 뒤늦게 밝혀졌지만, 그쯤 이르러선 이미 아무도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강후와 마석에 관련된 일련의 실험들을 전혀 몰랐다고 부정하며 빠르게 그와 손절했고, WPC는 용성과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제명했다. 물론 마무리 일격은 정시우의 아버지, 정시환이 맡았다.
“마석 거래는 지극히 공정하고 엄중한 절차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개인, 혹은 이익 집단이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성 길드는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무고한 이들에게 피해를 입혔으며…….”
“런던 시내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 뒤에 용성 길드가 있었단 말입니까!”
“마석 섭취로 이미 뇌에 이상이 와 있었던 게 분명해!”
용성 길드와 용화 그룹의 몰락은 실로 극적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계 경제와 하늘성의 중심에 서 있던 그들이 입에 담는 것만으로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암적인 집단으로 전락하리라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당장 그들의 수장인 이강후부터가 괴물로 변해 처리당하고, 기반시설이 붕괴되어 재기의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마석을 품고 살아남은 기존 용성 길드의 구성원들은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가게 되었으니,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었다.
용화 그룹이라는 뒷배를 업고 급부상한 용성 길드, 그들이 지구의 역사에 남긴 흔적은 단 하나. 마석을 섭취한 인간이 도달하는 말로의 증명뿐이었다.
“좋아, 감동스러운 연설이었어. 역시 우리 아버지야. 나보단 못하지만 제법 멋있어.”
“어떻게 해, 오빠의 왕자병이 슬슬 말기로…….”
정시우는 발표문을 읽는 아버지 옆에 이전보다 한층 강해진(그야 38단계 던전을 클리어했으니) 존 스미스가 철통같이 경호를 서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마리나를 비롯한 일행까지 우르르 몰려나와 무척 눈에 띄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뒤에서 쑥덕거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그 내용이란 것들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저 사람이 용성 길드를 혼자서 무너트린 것이나 다름없어.”
“아버지는 마석거래소장, 본인은 최강의 플레이어…… 이래서야 용성 길드의 빈자리를 정시우가 차지하게 되는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용성과 용화 이상으로 무서운 조합 아닌가 이거, 응? 아주 썩은 냄새가 나. 이것도 다 정시우가 뒷공작을 벌인 결과 아냐?”
플레이어들은 일반인보다 정시우의 무력을 훨씬 민감하게 실감했고, 이강후의 변이 과정을 직접 목도한 이들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그를 무서워하기는 했어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인들 중에는 일련의 공교로운 사건을 정시우가 뒤에서 조종했으리라 믿고 있는 이도 있는 모양이었다. 정시우는 참 상상력도 좋다고 생각했다.
“신경 쓰지 마, 슈. 저 사람들 전부 나 같은 엄청난 미녀랑 파트너인 슈를 부러워해서 하는 말들일 뿐이니까!”
“신경 안 써. 슈라고 하지 마. 그리고 멋대로 내 파트너라고 하지도 마.”
정시우는 쉴 틈도 없이 세 번 연달아 마리나의 말을 부정하고는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번 사건은 그녀의 기가 죽기에 충분한 일이었음에도 정작 그녀는 이전보다 한층 씩씩해 보였으니까.
물론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이래저래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고생을 한 그녀이기에 더더욱 의외였던 것이다.
“네 스태미나는 무한이냐?”
“응? 아…… 에히히.”
그러나 그의 시선과 목소리에 담긴 의문을 보기 좋게 캐치해 낸 마리나는 옅게 웃으며 그의 팔짱을 끼었다. 그 폼이 실로 자연스러워 둘이 원래 이런 사이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슈도 참 부끄러워하기는. 날 구하려고 엄청 무리한 주제에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거야?”
“……너 지금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지 않냐? 야, 내가 너흴 구하려고 무리한 건 너희가 그때 내 부탁을 받고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잖아. 자꾸 역사 날조할 거야?”
“착각 안 하거든요. 슈는 날 엄청 좋아하면서 어째서 자꾸 감추려고 하는 걸까.”
정시우는 망상도 이 정도면 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나는 그가 생각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배시시 웃어 버렸다. 그리고 그쯤에서 쿨하게 현실을 인정했다.
“설령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머지않은 언젠가 반드시 나한테 반하게 될 거야.”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는 사람 처음 봤어…….”
“그러니까 그때 가서 고생하지 말고 미리 나한테 점수 따 두는 게 좋을 거야. 지금은 특별 이벤트 기간이니까 보너스도 많이 붙여 줄게.”
“보너스?”
그러나 정시우는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물어본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마리나가 그에게 얼굴을 밀어붙여 키스한 것이다. 정시우는 시간이 멈추는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후우, 이건 가불.”
“어, 너…….”
마리나가 입술을 떼어 내며 천연덕스레 웃었다. 정시우는 얼떨떨해진 나머지 대꾸를 하지 못했다.
“…….”
“가, 가불까지 했으니까 나중에 점수 따러 와야 돼! 꼭!”
본인이 해 놓고도 부끄러웠던 것일까, 직후 마리나는 팔짱을 풀고 자기 얼굴을 가리며 물러나더니, 날개를 펼쳐 곧장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말았다.
[주인님을 기습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면 어딜 가서도 살아남겠군. 대단한 인재야.]
“너도 감탄하는 부분이 참 이상하다, 케이나…….”
“거기서 망치로 후려쳤어야죠! 망치로! 저건 성희롱이라구요!”
케이나와 용세하가 변함없이 안정감 넘치는 만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수아린 혼자 분노하여 날뛰었다. 세리아와 이서희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눈만 깜박이는 상황. 정시우는 가만히 생각했다.
‘적이 아닌 아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는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용의 감각을 조금 더 단련해야겠는데…….’
……역시 아직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