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187화.
“언제나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판매하는 요정상인 피에스입니다! 예이!”
“이건 예상 못했는데.”
정시우는 보스 룸 근처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요정상인을 보며 살짝 아득한 표정이 되었다. 루타가 거주지역 안으로 완전히 들어앉은 이래 던전에서 요정상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요정상인이다!”
“포션, 포션을 구매해야 합니다. 스태미나 포션, 그리고 잠력폭발 포션도…….”
“손님이 많아서 좋네요, 예이!”
반면 던전의 최전선에서 분투를 벌이며 이미 여러 번 요정상인과 접촉한 경력이 있는 플레이어들은 최우선 구매 항목을 따지며 요정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요정상인은 사정 봐주지 않고 비드를 마구 뜯어 가며 그들에게 포션을 판매했다.
“포션을 부탁한다. 1회에 한해 공격력을 폭증시켜 주는 포션이 분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나!”
그러나 이변은 이강후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발생했다. 요정상인은 그를 위아래로 훑더니 저런,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손님은 자격을 잃어버리셨군요.”
“자격?”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 손님이 더욱 잘 알고 계실 거랍니다. 죄송하지만 손님께는 물건을 판매할 수가 없어요. 아마 당신의 정체를 꿰뚫어 본 다른 요정상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강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앞으로 한 발 뻗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상인, 무례하군. 나 이강후를 모욕할 셈이라면…….”
“꺄아아아아아악, 괴물이 요정 때리려고 한다! 영주님, 살려 주세요!”
그가 정말로 검을 휘두르려 하자 요정상인이 후다닥 날아와 정시우 뒤로 숨었다. 정시우는 어이가 없어 그녀를 손으로 잡아들었다.
“누가 네 영주냐, 누가. 지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잘도.”
“모든 요정상인들은 재산과 가치를 공유한답니다! 그러니까 루타의 영주님은 제 영주님이죠! 자, 귀여운 백성을 위해 어서 저 무뢰배를 처단해 주세요. 예이!”
정시우는 어이가 없었으나 일단 요정상인을 손 안에 확보했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강후에게 짧게 말했다.
“대리구매하면 되잖아. 다른 플레이어들한테는 팔 테니까.”
“으으음, 그랬다간 다른 플레이어 여러분도 향후 요정상인에게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금지되게 되니 참고하세요! 그런데 이건 근본적인 의문인데, 다른 플레이어 여러분은 왜 저 괴물과 한데 섞여 계신 거죠……? 꺄악, 또 노려본다!”
요정상인이 바짝 움츠러들어 정시우에게 달라붙었다. 그와 함께하는 다른 일행의 눈초리는 매섭게 올라갔으나 정시우는 후, 한숨을 쉴 뿐이었다. 이 던전에 들어온 이후로 전부 피곤하고 귀찮은 일뿐이다.
“큭, 요정상인…… 나중에 두고 보도록 하지.”
“나중은 없을 텐데요……. 하긴, 상상은 자유니까요! 예이!”
“그러니까 넌 왜 자꾸 쓸데없는 도발을 하냐고!”
요정상인 한 명의 출현으로 소동이 끊이지 않게 되었으나, 어쨌든 이강후를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원하는 포션이나 임시 장비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던전의 난이도가 워낙에 어려워 대체적으로 비드를 별로 얻지 못한 반면, 포션이나 장비의 가격은 던전 난이도에 맞춰 상승하는 감이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빈털터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 그래도 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면 몇 번의 레벨업은 확정이니까. 무사히 살아서만 나간다면 반드시 더욱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정시우가 부러워. 비드도 그렇고 경험치도 그렇고…….”
“던전의 메인이벤트를 혼자 쳐부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아, 그러고 보면 마리나 비셋도 있지.”
메인이벤트란 바로 몬스터의 군집을 처리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업적 면에서 보나 경험치 면에서 보나 그것 하나만으로 MVP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주님은 필요한 물건 없으신가요? 저를 보호해 주셨으니 하나는 서비스로 드릴게요! 예이!”
“보호랄 것도 없었고…… 딱히 필요한 게 없어.”
포션은 아버지한테 주고도 차고 넘치도록 남는다. 더욱이 수아린의 치유 능력과 버프 능력만으로도 어지간한 상황은 헤쳐 나갈 수 있다.
“후훗, 필요한 게 있으실 텐데요. 손님한테 필요한 물건을 직접 제시하는 것도 요정상인의 임무! 자, 조금만 기다려 보시지요.”
그러나 요정상인 피에스는 그의 말에 흐흠, 하고 묘한 표정을 짓더니 주섬주섬 허공을 뒤져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었다.
“이 상품은 영주님의 자격이 갖추어지는 때, 비싼 가격에 팔려고 루타가 준비해 놓았던 건데…… 제가 영주님께 점수를 따고 싶으니 지금 몰래 드려 버리죠! 예이!”
“나중에 너희 엄청 싸울 것 같은데.”
“전 오늘만 사는 요정이랍니다, 예이!”
정시우는 한없이 펑키한 요정 피에스로부터 상품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손거울이었는데, 얼핏 아무런 마나도 지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마나를 받아들이지 않잖아. 마나가 없는 게 아니라, 마나에 영향을 받지 않는 터무니없는 귀물이야. 이거 대체 뭐하는 물건이야……?”
“……영주님, 지구가 답답하시죠? 인간들도 답답하고요.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아마 가장 답답하시겠죠.”
요정이 문득 내뱉은 말에 정시우의 표정이 흔들렸다. 요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이 너무 빨리 성장하시는 바람에, 신들은 보다 신중하게 지구 점령 작전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지상에 이세계로 통하는 워프 게이트를 남기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기도 하고, 영주님이 아닌 다른 인간들을 먼저 공략하고 있기도 하고요.”
“너…….”
정시우는 뭐라 반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확실히 그렇다. 뒤세느와 파에토의 종속들이 난동을 피웠던 이세계, 포투포우에서의 일전 이래 정시우는 마땅히 이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워프 게이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 그의 꼬리로 이세계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정작 그 접속이 가능한 장소가 없어서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껏 영주님이 올바르게 성장하셨는데, 이대론 세상이 성장하여 더 많은 신들이 더 위험한 힘을 지니고 이곳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그때까지는 수중 던전이 그나마 영주님의 마음에 드는 전장이 되어 주겠지만…… 이대론 도저히, 영주님의 계획을 달성하실 수가 없지요. 지금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대단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과오의 반복이 되어 버려요.”
정시우는 자신의 용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전 루타와 얘기했을 때부터 느끼던 것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확실해졌다. 이 녀석들, 분명히 자신과, 적어도 용과 관련이 있는 존재들이다.
“너……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이제부턴 그런 고민도 끝! 더 이상 상황에 휘둘리기만 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상품은 반격을 위한 상품입니다! 영주님은 이미 이 아티팩트의 발동에 필요한 자격요건을 충분히 갖추셨으니, 남은 것은 실행입니다.”
자, 하고 말하며 요정상인은 손거울을 그의 품에 맡겼다. 그리고 한 발짝 물러서며 손을 튕겨 좌판을 완전히 거두었다.
“우리는 지구가 풀 에이지…… 적어도 하프 에이지에 이르렀을 때에야 영주님께서 날개를 되찾게 되시리라 생각했는데, 기분 좋은 오산이었어요. 루타보다 먼저 힘을 되찾으신 영주님을 뵙게 되어 정말 기뻤답니다. 그러면 영주님, 나중에 뵙게 되는 그날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길.”
“야, 잠깐…….”
그러나 피에스는 자기 할 말만 마치고 깔끔하게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정시우는 나중에 녀석을 만나면 반드시 꿀밤을 한 대 먹여 주리라 다짐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손거울에 시선을 주었다. 자연스레 그의 망막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추적자의 자물쇠]
[랭크 ? SS+]
[신의 적대자가 남긴 차원전이의 유물. 신의 기운을 주입하면 그 신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갈 수 있다. 상위 세계로 가기 위해선 하위 세계를 먼저 찾아가, 그 세계에서 신의 흔적을 부수어야 한다.]
“이건…….”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상에 남은 흔적도 아니고, 신의 힘을 주입하는 것으로 그 신의 자취를 더듬어 찾아갈 수 있다니. 터무니없는 아티팩트임에 확실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의 정시우만이 다룰 수 있는 아티팩트이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모든 힘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하나의 힘이 다양한 힘으로 분화될 수 있음을 안다. 따라서 신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 지나지 않고, 그들의 힘을 그대로 구사할 수도 있게 되었지.’
이전이었더라면 이 아티팩트를 사용하기 위해 신의 파편을 직접 소모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람의 질주 스킬을 만들어 내고 카오스 윙을 각성한 지금은 정시우 자신이 흡수했거나 아티팩트로 만든 신의 힘이라면 즉석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했다.
마신의 징벌에 깃든 뇌신 라이아와 염신 파에토, 혼돈의 신 메티모아의 힘. 군멸포에 깃든 군단의 신 뒤세느의 힘. 자신이 직접 흡수하여 스킬로 만든 언데드의 신 세트나크, 바람의 신 프루타의 힘까지.
‘결국 다른 신의 힘이기에 변환 효율이 좋지 않아 전투에 써먹는 건 무리지만, 이걸로 놈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에 갈 수 있다면.’
정시우는 시험 삼아 마신의 징벌을 이루고 있는 메티모아의 힘을 인위로 만들어 내어 손거울에 주입해 보았다.
그러자 모든 종류의 마나를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던 손거울이 그것을 넙죽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곧 바닷물처럼 표면이 일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더 시험해 보지 않아도 이것을 통해 메티모아의 지배를 받는 세상으로 갈 수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티팩트에 대해 완벽히 파악한 정시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걸로 이긴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겠죠.”
“승리에의 강한 확신을 표현한 거야.”
정시우는 마나를 거두어 손거울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고는 인벤토리에 그것을 보관해 두었다. 그가 요정상인에게 선물을 받는 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물건 같은데, 저걸 공짜로 받다니.”
“저 많은 여자들로도 만족을 못하고 요정들까지…….”
“요정을 꼬시면 원래 판매하는 상품을 공짜로 받을 수도 있는 건가. 역시 난 놈이야…….”
“어쩌면 요정상인이 이강후에게 상품을 팔지 않겠다고 한 것도 정시우의 지시가 아닐까?”
“사람이 아니야. 분명해.”
“이 자식들이.”
정시우가 눈을 부라리자 그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상품을 선물 받은 정시우와는 달리 거래조차 거절당한 이강후가 형용하지 못할 분노를 담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돌려 전방을 향했다.
“이 던전은 우리 인간의 순수한 힘만으로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어. 아까 잔뜩 활약했으니 보스전은 우리에게 양보해 줄 수 있겠지?”
“오, 부디 네 마음대로 해.”
정시우는 원래 이 던전 공략에 끼어든 입장이다. 물론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플레이어가 공평한 죽음을 맞이했겠지만, 이제 와서 저들 스스로의 힘으로 던전을 진행하기를 원한다면 정시우가 굳이 앞으로 나설 마음까지는 없었다.
“후.”
정시우가 별 말 없이 물러나자 이강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보스 룸의 문 앞으로 다가섰다.
“이길 수 있겠지……?”
“아무리 던전 난이도가 올랐어도, 우리의 전력도 만만치 않아. 보스 정도는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거야. 이강후가 있잖아!”
그를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래도 불안한지 정시우를 뒤돌아보았지만, 이내 이강후에게 합류했다. 끔찍한 괴물로 변한 플레이어들을 단신으로 처단한 이강후의 무력을 믿었기에.
“그러면 열겠습니다. 3초 안에 어떻게든 많은 공격을 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잠깐만. 뭐라고? 정시우는 이강후가 내뱉은 말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와서 이게 무슨 멍청한 판단이란 말인가!
“기다려 봐, 이미 던전 구성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시점에 보스가 3초 룰에 갇혀 있을 리가…….”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닿기 전 보스 룸의 문이 열렸다. 플레이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보스를 향해 쇄도했고, 다음 순간 보스의 스킬이 작렬해 그들을 휩쓸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