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화.
전투가 끝나고 대강 비드 획득이 끝난 후, 정시우는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용의 감각을 발휘하여 체내에 마석을 축적하고 있는 이가 또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이강후를 제외하고는 다들 결백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정시우는 우선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마석 섭취의 위험성을 알리기로 했다. 플레이어 중 일부는 그의 말에 수긍해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강후 외에도 그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플레이어는 얼마든지 있었다.
“마석을 섭취하는 것 때문에 하늘성에 부담이 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지나친 억측 같은데.”
“종적을 감춘 사람들도 그렇지. 리타이어하는 순간을 우리가 포착하지 못했을 뿐일 겁니다.”
“더욱이, 인간을 벗어났다고 한다면 그건…….”
그건 마석을 섭취한 플레이어보다 정시우가 더하지 않은가. 누군가 그런 말을 하려다 간신히 참았지만, 그들의 감정을 읽어 낸 정시우는 어렵지 않게 플레이어들의 의사를 파악했다.
과연 전신이 비늘로 뒤덮인 지금 정시우의 모습을 본다면 그가 마석 섭취의 위험성을 경고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씁, 어쩔 수 없지.”
정시우는 자신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설득을 하는 것은 그쯤에서 관두기로 했다. 애초에 여기에 그가 자원봉사나 하늘성 플레이어들의 건전한 생활 지도 캠페인을 하기 위해 들어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마리나 일행이 무사하면 그걸로 족했다.
“다들 오빠를 무서워하고 있어서 그래요. 지금 오빠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 거예요. 실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그땐 깨닫겠죠. 물론 피해는 감수해야겠지만…….”
“그래, 그렇겠지.”
수아린의 말에 정시우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오스 윙을 각성하고, 자신의 마나를 다루는 방법을 깨닫고 그 자신도 조금 들떠 오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각성 이전에도 다른 이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힘을 지니고 있던 자신이 아닌가. 일대 마나를 장악하고 몬스터들을 상대하던 그의 모습에 다른 이들이 겁을 먹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알려 줘, 시우. 나도 그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바뀌겠지.”
“그래, 너라면 가능하겠다.”
“사람들이 마리나까지 무서워하게 될 뿐이니 그만둬욧.”
그러나 마리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이것은 정시우 옆에서 당당히 서 있기 위한 그녀만의 투쟁이었다!
“좋아, 그럼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볼까. 마법도 아니고 딱히 요령이 필요한 것도 아니야. 마나 컨트롤에서 시작해서, 주위 마나를 끌어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
정시우는 마리나가 기운을 차렸다는 것에 만족해 용에게서 얻어 낸 자신만의 노하우를 대방출했다. 그런데 그 옆에서 가만히 그것을 듣고 있던 이서희가 음? 하고 감탄사를 발했다.
“그거 내가 결계를 다루는 방식하고 조금 비슷한 것 같아.”
“그래?”
“결계는 결국 국소 영역에 한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마나의 파장을 만들어 내는 힘이거든. 그걸 보다 넓고 옅게 펼치면 아까 시우가 보여줬던 영역과 비슷하게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이서희는 그로부터 얼마 걸리지 않아 마나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마나의 절대량과 마나의 질에서 차이가 나기에 정시우와 같은 위압감은 발휘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성공은 성공이었다.
정시우가 꿈을 통해 몇 번이나 용의 힘을 체감한 끝에 발휘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정말 대단한데……?”
“시우 네가 쉽게 알려 줬으니까. 그래도 이거, 공격 용도라면 몰라도 결계를 다루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네. 내 마나량이 늘어나면 광범위 영역에 쉽게 결계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어서 좋겠지만.”
기껏 기운을 내려던 참에 갑자기 튀어나온 이서희가 자신을 제치고 기술에 성공하고, 나아가 정시우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듯하자 그것을 보는 마리나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나도…… 나도 할 거야. 나도 시우랑 할 거야!”
“중간에 들어갈 말 생략하지 마라.”
“아, 불붙었다.”
“일단 이 던전은 나가서 연습해라, 마리나.”
던전에 나타나는 몬스터의 대부분을 이미 해치웠기 때문일까? 그 뒤의 던전 탐색은 굉장히 순조롭게 이어졌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던전의 보스 룸을 탐색해 직선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함정과 남은 얼마 안 되는 몬스터를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는 것. 신속한 던전 공략의 교본과 같은 움직이었다. 단, 재미는 없었다.
“이렇게 우중충한 던전 탐색은 처음이야…….”
[정말 지구의 인간들이란 겁쟁이들뿐이군.]
평범한 던전 플레이였더라면 던전 이곳저곳에 숨은 신비와 보상을 탐색했겠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들은 이 던전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이상으로 정시우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케이나는 다른 인간들에게서 일찌감치 기대를 거두고는 정시우에게 돌아서며 물었다.
[그나저나 주인님, 모습을 감추었다는 플레이어들은 찾았는가? 아까부터 감각을 확장하고 있는 것은 그들을 찾기 위해서가 아닌가.]
“네 말마따나 아까부터 찾아보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완전히 숨어 버린 것 같아.”
[던전 안에 숨었다는 말인가.]
케이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정시우 일행과는 반대편에서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을 통솔하여 앞으로 날아가고 있는 이강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정시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우리 손으로 그들을 끝장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만약 완전히 인간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한다면, 우리가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해도 그들은 던전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 던전에 남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냥 던전 안에 놔두면 되지.”
[하지만 그들은 몬스터가 아니다. 던전 안에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위험한 변수가 될 거야. 아까 주인님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늘성을 좀먹는 벌레란 그런 것들을 이르는 것이다.]
그때였다. 정시우의 감각에 묘한 것이 걸려들었다. 인간도, 몬스터도, 무생물도 아닌, 실로 거부감이 드는 기척이 셋…… 아니나 다를까 그가 고개를 들던 순간 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자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저거 사라졌던 플레이어들 아냐?”
“몬스터 놈들의 둥지에 묶여 있다! 다행히도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아!”
아아, 어쩜 이렇게 배드엔딩에 가까운 대사만 골라 내뱉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시우가 참혹하게 인상을 구기는 가운데 케이나가 그와는 대조되게 웃었다.
[설마 저쪽에서 먼저 나타나 줄 줄이야. 다행히도 우리 선에서 처리할 수 있겠군!]
“오빠, 얘 속이 시커매요.”
“원조 데스나이트잖아. 새삼스러운 소리하지 마.”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날개를 펄럭였다. 시야를 강화하니 저 멀리 초대형 새둥지 안에 굴러다니는 실 뭉치 같은 것들이 보였다.
바깥으로 머리털이나 다리만 빼꼼 나와 있지만 아까 사라진 플레이어들이라는 사실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일행에게 물었다.
“저놈들…… 아직 플레이어이기는 할까?”
[아니라는 데 내 애검을 걸지.]
“그 애검 내가 준 거잖아, 인마.”
직접 놈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지금 자신이 나서도 의심을 살 뿐. 지금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눈으로 확인하고, 대처하도록 놔두기로 했다. 그 정도도 못 해낸다면 저들에겐 플레이어의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
“전부 실 뭉치 같은 것에 묶여 있어. 안 다치도록 조심스럽게 긁어내 보자고.”
“무사해서 다행이다. 상처를 입었다면 어서 치유를…… 음?”
[마나…….]
전조는 전혀 없었다. 용의 감각도 정시우에게 전혀 경고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반응이 조금 늦고 말았다.
“시몬!? 큭,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시모오오오오오온!”
[마나. 마나다. 마나를 내놔라.]
앞장서서 플레이어들의 안전을 확인하던 검사의 머리가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실 뭉치로부터 빠져나온 플레이어…… 더는 플레이어라 부를 수 없게 된 괴물이, 자신이 죽인 플레이어의 육신을 붙잡아 팔을 뜯어 먹었다. 플레이어들은 그 모습을 보며 경직되었다.
“시몬을, 플레이어를…… 먹는다고……?”
“이,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큭, 크힛. 마나, 마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 첫째는 놈들의 무력이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화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놈들에게 당한 플레이어들이 리타이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미친, 내 마나가 빨려 나가고 있어! 다 뒤로 물러서! 물러나라고!”
“미스터 정의 말이 맞았어……. 제길, 어째서!”
[마나 흡인력…… 마나 드레인이다! 리타이어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고 먹고 있는 거야!]
던전에서 죽음을 맞이한 플레이어는 사체의 손상 없이 너덜너덜해진 날개와 함께 리타이어한다. 그런데 지금 그 기본 전제가 어긋나 버린 것이다.
지금 놈들이 구사하고 있는 능력은 단순한 마나 드레인이 아닐 것이다. 놈들은 플레이어의 기준으로도 몬스터의 기준으로도 기이하고 이질적인, 권능이라 불러 마땅한 능력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도 ‘하늘성의 시스템을 침해하는’ 능력에.
“마석 섭취만으로 저렇게까지 된다고?”
[그럴 리가. 단지 조건이…… 조건이 조금 특수했다. 주인님도 알고 있지 않은가. 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 던전, 크레센트 에이지로의 진입…… 놈들이 다소 특수한 개체로 거듭난다 해도 무리는 없어. 마석은 그런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괜히 금기가 아니야.]
마석은 몬스터에게서 비롯되는 것. 몬스터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마석의 섭취로 인한 인간, 플레이어의 변이도 그 가능성을 점치기 힘들 만큼 무한했다. 지금 저놈들은 마나에 대한 탐욕을 그대로 능력으로 구현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너희들, 정신 차려라!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마나……!]
실 뭉치에서 완전히 풀려난 괴물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던 플레이어의 날개는 흉물스러운 괴물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숨기고 있지만, 원래 그들을 부하로 부리고 있던 이강후가 화들짝 놀라 다가갔으나 놈들은 마석을 섭취하여 강대한 마나를 축적한 이강후를 보고 군침을 흘리며 덤벼들 뿐이었다.
“병신 같은 것들, 고작 그 정도 마나도 컨트롤하지 못해 이런 흉한 꼴이냐!”
그러나 이강후는 역시 변변한 플레이어들과는 격이 달랐다. 세 마리의 괴물이 동시에 마나 드레인을 구사하여 그의 몸을 칭칭 얽매고, 그를 산 채로 뜯어 먹기 위해 덤벼드는 와중에도 그는 빠르게 검을 휘둘러 놈들의 몸을 단호하게 베어 냈다!
“어리석고 모자란 것! 내가 하늘을 대신해 친히 단죄하겠다!”
“누가 보면 정말 마석과는 관련 없는 사람인 줄 알겠네.”
정시우는 이강후가 정의의 사도인 것마냥 용감한 대사를 내뱉으며 괴물들을 도륙하는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그래도 굳이 정시우의 손을 더럽힐 필요 없이 저들 손에서 끝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이대로 던전을 나갈 때까지 저자가 본 모습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음……? 이, 이게 무슨. 크학!?”
괴물들을 참혹하게 도륙한 이강후가 끝장나는 폼을 잡으며 돌아서던 순간, 그가 해치운 괴물들의 몸뚱이가 믹서기에 넣고 갈아 버린 것처럼 흉물스레 뒤틀리며…… 이강후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이강후의 전신에 축적된 마석의 기운이 놈들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케이나 네가 불길한 말을 하니까!”
[내 탓이란 말인가!?]
정시우가 애꿎은 케이나 탓을 하며 망치를 쥐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괴물들의 살덩이에 파묻혔던 이강후가 멀쩡한 모습으로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크하아아아아! 나는 지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는 전혀 괴물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강후라는 강자를 적으로 돌려야 하는 것인가 걱정했던 플레이어들이 그의 멀쩡한 모습을 보며 환호했다.
“이, 이강후…….”
“오오오오오! 이강후가 괴물의 힘을 이겨 냈어!”
“우리 인간은 지지 않는다! 이 던전도 인간의 힘으로 이겨 낼 수 있어! 반드시!”
이강후가 완전히 플레이어들의 중심이 된 순간이었다. 반면 그와 당장 싸울 준비를 했던 정시우는 뻘쭘해져 해머를 집어넣었다. 수아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거 완전히 주인공인데요, 오빠?”
“그러게.”
정시우가 고개를 끄덕이곤 덧붙여 말했다.
“이대로 던전을 나갈 때까지 저놈이 본 모습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지금 케이나랑 똑같은 말 하고 있잖아욧!”
“아니, 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정시우는 용의 감각을 돋워 놈의 전신을 훑었다. 인간으로서 승리했다는 쾌감에 도취되어 있는지, 이강후는 정시우의 시선도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양팔을 들어 올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뭐, 기다려 봐. 이미 늦었으니까.”
“케이나 같아서 기분 나빠요…….”
[그래도 주인님보다는 내가 낫지 않은가!]
“너희 둘 다 나중에 각오해라.”
남은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은 곧 던전 보스 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