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183화.
던전 안은 완전한 하나의 이세계였다. 구획의 구분도 없이, 살아 숨 쉬는 세계 그 자체였다. 정시우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던전 내부의 광경을 천천히 둘러보며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성의 플레이어들은 항상 이런 던전에서 활동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물론 개미굴과는 이런저런 면에서 상당히 다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광활한 던전은…….”
그때 케이나가 수아린의 말을 끊고 정시우에게 말했다.
[전투의 기운이 느껴진다. 주인님, 감지하고 있는가?]
“그래. 나도 마침 위치를 특정한 참이야.”
그의 생각보다도 던전이 거대하여 마리나 일행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카오스 윙을 얻으며 재차 마력 제어 능력이 탁월해진 덕에 용의 감각으로 이 던전 하나 정도는 커버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보다도 큰 것 아닐까.”
[크레센트 에이지에 이 정도라니 정말 기가 막히는군.]
“미안하지만 먼저 갈게.”
정시우는 적당한 크기로 압축되어 있던 날개를 크게 확장시켰다. 날개에는 프루타로부터 얻어 낸 바람 속성의 마력이 흐르고 있어 날카로운 기세를 머금고 있었는데, 그 자체로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방해가 되는 것들은 굳이 그가 손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모두 치워 버릴 수 있을 만큼 훌륭한 무기가!
“흡!”
정시우가 고속 비행을 개시했다. 케이나 역시 능숙하게 바이크를 조종하여 그의 뒤를 쫓았다. 아직까지 이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수아린만이 구엑, 소리를 내며 케이나를 붙잡았다.
“저 오빠는 왜 플레이어가 되자마자 날개를 저렇게 능숙하게…… 우에이극.”
[비행보다도 날개를 무기로 써먹는 대담함이 더 대단하지 않은가…….]
마치 몸집을 부풀려 스스로를 과시하는 동물처럼 날개를 한껏 크게 펼친 채, 목적지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정시우의 비행은 빈말로도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 과감하고 직선적이며, 폭력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섬세하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 내는 비행은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되리라.
[크학!]
[침입…… 키엑!]
“방금, 몬스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주인님이 기세를 발산하여 직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있구나. 더구나 마나 드레인까지 구사하고 있으니, 자신의 마나를 빨아먹는 이를 몬스터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그 결과 놈들은 저렇게 죽음으로 직접 뛰어들어, 산산이 갈리게 되는 것이다.]
정시우는 그저 일직선으로 질주하고 있을 뿐인데 그에게 날아오는 많은 몬스터들이 알아서 그의 날개와 충돌하고, 큰 데미지를 입으며 나가떨어졌다. 운이 좋은 놈들은 바로 죽어 사라지거나 비드로 화하고, 운이 없는 놈들은 굳이 두 번째의 충돌을 자처해 보다 괴로운 죽음을 맞았다.
그 무엇도 정시우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는 속도를 줄이거나 방향을 틀 필요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비행 기술은 저것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저게, 가능해……?”
하늘성의 플레이어는 비행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비로소 던전의 몬스터들과 대치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설마 비행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줄이야. 대체 여태껏 다른 플레이어들이 해온 노력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의 날개는 심장만큼이나 중요한 마력의 원천이지. 주인님은 지금 날개를 바람과 한없이 가까운 무엇인가로 만들어, 추진력을 얻는 것과 동시에 전 방위를 향한 더없이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을 가능케 한 것이다.]
“미안, 기껏 설명해 준 건 고마운데 전혀 모르겠어…….”
[어차피 그럴 줄 알았으니 괜찮다.]
케이나 역시 몬스터들이 정시우와 충돌하는 그 순간, 순식간에 전신을 난자당하는 모습을 보고 바람의 힘이 개입되어 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실 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무기를 휘둘러 적을 처리하고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강한데 점점 강해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까지. 모든 세상을 걸쳐 모든 존재가 경험하고 닦아 온 역사를 비웃는 듯한 행보로군.’
그나마 그와 적이 아니라 다행이다, 실로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날개를 크게 펼친 정시우의 속도는 아까보다도 더욱 빨라, 팬텀바이크를 최고속도로 몰고 있음에도 점차 거리 차이가 벌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기사를 자처하는 자로서 주군보다 뒤쳐지면 체면이 서질 않는다. 케이나는 질주와 관련된 스킬들을 모두 구사해 스퍼트를 더 올렸다. 오직 수아린만이 죽어났다!
“갸으아아아아아악.”
[조금만 더 힘내라, 수아린. 이제 곧 도착이다!]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케이나와 수아린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에게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 전 방위의 적을 도발하며 나아가기를 한창, 정시우는 문득 허공의 한 점에 어마어마한 수의 몬스터가 몰려 있음을 깨달았다. 마리나를 비롯한 일행의 기척은 그 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저건 이상해.’
그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정시우 본인이 마나 드레인을 비롯한 여러 수단으로 최대한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몰려오는 몬스터의 숫자는 던전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상공에는 던전의 중추를 담당하는 엘리트 몬스터만 족히 열 마리 이상 몰려 있었다. 일반 몬스터를 포함한다면 던전 전력의 족히 절반 이상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티의 탱킹을 담당하는 이들이 일부러 저만 한 숫자를 끌어들였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던전 내부에 퍼져 있던 몬스터들이 일행을 먼저 감지하고 몰려들었다고? 저 파티에 속한 랭커만 몇인데 그렇게 허술하게 행동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던전의 팽창 과정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고 봐야 했다.
‘이미 몇 명 리타이어한 것 같은데…….’
그때 마침 몬스터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찌그러진 구체의 틈바구니에서 마나가 폭발했다. 분명 마리나의 마나였다. 아직까지는 기운을 잃지 않고 저항을 하고 있는 모양. 잘도 레벨 300에 근접하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용맹하게 분투하고 있었다.
“하!”
정시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날개를 펼쳐 솟구쳤다. 그의 갑작스러운 접근을 눈치챈 몬스터들은 피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구체의 외부 표면을 구성하고 있던 놈들부터 그를 향해 차례로 돌아서며 코웃음을 쳤다.
하긴, 제아무리 강한 플레이어라 해도 수만 마리 몬스터의 군집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소수의 몬스터를 유인하여 다수의 플레이어로 상대하는 것, 그것이 플레이어들이 인식하고 있는 던전 공략의 기본이었으며 몬스터들이 이해하고 있는 인간의 방식이기도 했다.
“흡!”
[쿠엑!?]
물론 정시우에게 있어 던전 공략이란, 언제나 쾌속으로 질주하며 상대 가능한 최대한 많은 숫자의 몬스터를 단신으로 압도적으로 쓸어버리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설령 난이도가 38단계로 급등하여, 대다수의 몬스터의 레벨이 280을 넘기는 지금 상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대화 대! 강타!”
돌진에 이은 그의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빨랐다.
돌진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비행하며 마신의 징벌을 꺼내 든 정시우는 어렵지 않게 해머를 지금 자신에게 가능한 최대 사이즈로 거대화하여, 조각을 하는 조각사처럼 해머를 휘둘러 외부에서부터 몬스터들을 긁어냈다.
[쿠아아아아악!]
[피, 피해라! 인간이 아니다!]
[용! 용이다!]
검푸른 스파크를 흩날리며 휘둘러진 해머는 무수한 비행 몬스터들이 저마다 장기 자랑하듯 내보이는 다종다양한 스킬들을 싸그리 무시하며 놈들을 분쇄했다. 정면으로 얻어맞은 놈은 깔끔하게 죽었고, 타격을 조금이나마 덜 받은 몬스터들도 날 힘을 잃고 추락했다.
심지어 타격 전이의 효과가 일대 몬스터들을 추가로 타격하기까지! 단 한 번의 공격에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이 무력화되었으니, 몬스터들이 겁에 질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쿠이이이이이! 이 세상은 뭔가 잘못되었다!]
[프, 프루타 님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결코 크레센트 에이지에 걸맞는 힘이 아니야!]
“오, 그거 참 반가운 이름인데그래.”
물론 정시우는 이 던전에 관여되어 있는 것이 프루타라는 사실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놈 때문에 그의 친구들이 던전에 갇히고, 또 그놈의 힘 때문에 자신이 이 던전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넌 어떤 신의 심복이냐! 분명 인간들 틈에 잠복하여 활약하고 있는 다른 신의 첩자렷다!]
[그 힘으로 보아선 혹시 헥토……? 아니, 저자에게서 프루타 님의 힘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은데…….]
몬스터들이 당황하여 헛소리를 마구 지껄여 댔다. 그 소동은 당연히 군집의 내부로도 전해져, 물샐 틈 없이 완벽했던 몬스터들의 포위망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의식을 방해하다니 어떤 놈이냐. ……음? 저, 저 인간은…….]
외부 몬스터들을 통솔하던 엘리트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였다. 벌새 낙원이라는 던전의 이름에 걸맞게 등에 무척 빠르게 흔들리는 날개를 달고 있으며, 번쩍이는 깃털에 뒤덮인 몸 곳곳에 기분 나쁘게 딸각거리는 부리가 수십 개 돋아난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몬스터!
정시우는 놈을 본 순간 이 군집의 정체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단순히 대량의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것뿐만 아니야. 중심이 되는 엘리트 몇몇을 두고 몬스터들의 마력을 집중시켜 집단의 힘을 증가시키고, 보다 견고하게 만들고 있어. 저것 자체로 이미 하나의 마법진이 완성된 거야.’
그리고 그 마력을 다른 방향으로 뿜어낼 수도 있겠지. 아마 놈이 말한 의식이라는 데에 집단의 힘으로 형성된 마나를 쓰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정시우에게도 어느 정도는 익숙한 것이다. 이전 이세계의 전장에서 보았던, 신의 힘에 의한 인간의 세뇌, 혹은 변이. 어느 쪽이든 불쾌하기 짝이 없다.
[네놈…… 정말 인간이냐? 어찌 인간의 몸에 저런 끔찍한 힘이…… 모두 마법진을 수호하라!]
[쿠윽, 우리는 이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프루타 님, 우리를 거두소서!]
‘역시, 엘리트를 일반 몬스터들이 감싸는구나……. 저 마법진에 있어 단점이 있다면, 역할을 맡은 엘리트 몬스터는 활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며, 결국 놈이 뚫리게 되면 마법진이 힘을 잃고 해체된다는 거지.’
[주인님!]
정시우가 짧은 고찰을 마치고 다시 망치를 들 때쯤, 적절한 타이밍에 케이나가 탄 팬텀바이크가 그를 따라잡았다. 그녀 역시 전투를 예감하고 있던 것인지, 이미 대검을 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케이나, 저놈을 꿰뚫을 거야. 길을 만들어 줘.”
[참 쉽게도 말하는군…… 알겠다. 바로 따라오도록.]
저 군집을 구성하고 있는 몬스터 중 누구 한 마리 가벼이 여길 놈이 없었다. 애초에 정시우가 망치질 한 번으로 수천 마리를 무력화시킨 것이 기적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케이나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순순히 대검을 들어 전방을 조준했다. 메티모아의 키메라처럼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엘리트 몬스터가 아닌, 놈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눈을 빛냈다.
[수아린, 방어막을 부탁한다. 그냥 뚫기는 힘들어 보이는군.]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어.”
[좋아, 지금!]
수아린의 실드 마법이 활성화된 바로 그 순간, 케이나가 정시우보다 먼저 돌진했다!
[큭, 막아라!]
그것과 때를 맞추어 엘리트 몬스터가 목소리를 높여 몬스터들을 조종했다. 원과 비슷한 구체를 이루고 있던 군집의 일부가 엘리트의 명에 따라 형태를 변환시키며 케이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마치 해일이 닥쳐오는 것만 같은 위압감을 주었으나,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대검의 날을 세웠다.
그 위로 수아린의 축복을 받아 강화된 오러가 눈부신 빛을 내며 흘렀다.
[주인님에게 직접 임명받은 군단장의 힘이다. 보여 주마!]
케이나에게는 거대한 병기로 적군을 모두 쓸어버리는 괴력 같은 것은 없다. 수아린과 같은 치유력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무수한 세월 기사로서 갈고 닦은 검술과, 훌륭한 탈 것이 전제가 되었을 때 발휘되는 차지에 대해서만은 일가견이 있었다.
[흐오오오오오오오오!]
그녀의 돌진 스킬이 발휘되며 그녀는 물론 팬텀바이크까지도 검은빛에 감싸였다. 검은 혜성이 하늘을 향해 쏟아지는 것만 같은 압도적인 광경!
바이크는 그대로 속도를 높여 몬스터의 해일과 정면에서 맞닥뜨렸다. 그녀가 앞으로 쭉 내뻗은 대검의 날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몬스터 무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흐오오오오오오!]
“흡!”
순간순간 끔찍한 압력을 맞닥뜨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외려 속도를 높여 나아가는 케이나, 그리고 날개를 활짝 펼치며 그녀의 뒤를 따르는 정시우!
그의 손에 들린 해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가 발산하는 마나를 모두 응축하며 끔찍한 파괴력을 발휘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 더는 무리다. 물러나겠다!]
“그걸로 충분해!”
몬스터의 해일을 4분의 3쯤 돌파했을 때 기어이 케이나의 힘과 수아린의 방어막이 효력을 다하고 말았지만, 목적은 전부 완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시우는 힘없이 뒤로 물러나는 케이나를 제치고 질주했다.
남은 놈들은 망치로 부술 필요도 없이 그의 날개에서부터 비롯되는 바람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찢어 버릴 수 있었다.
[큭, 고작 둘의 힘으로 이 군집을……!]
케이나 덕분에 얼마 남지 않은 몬스터 무리를 손쉽게 돌파하고 나아간 끝, 그곳에 군집의 ‘외핵’ 역할을 하고 있던 엘리트 몬스터의 모습이 있었다.
마지막 발악일까? 놈의 몸 곳곳에서 솟아난 부리가 순간 전부 크게 벌어지며 바람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마탄을 쏘아 냈지만, 그 정도 파괴력으로는 정시우를 단 한순간도 지체시킬 수 없었다.
정시우는 크루얼 차지의 궤적을 날개로서 보다 완벽하게 구성하며, 궤적의 끝에 이른 순간 있는 힘껏 해머를 내질렀다.
[합성 스킬, 카오스 크루얼 차지(액티브)를 익혔습니다. 카오스 크루얼 차지 스킬이 Lv5가 되었습니다.]
[크하아아아악!]
그의 필살기의 애칭이 C2에서 C3로 진화하는 순간.
그의 해머에 얻어맞은 엘리트 몬스터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