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화.
‘어?’
분명 자신은 하늘성에 도달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체 언제 정신을 잃은 것일까? 정시우가 정신을 차리니, 그는 실로 오랜만에 용의 형상이 되어 있었다.
용은 하늘을 날고 있지도 않았고 날개를 접고 지상에 몸을 누이지도 않았다. 그저 어두운 하늘 한가운데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용의 날개는 어마어마하구나.’
정시우는 거대한 체중과 존재감을 지닌 용을 하늘에 띄우고 있는 힘이 다름 아닌 놈의 날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개에서 비롯된 마나가 전신과 소통하며 용을 보다 빠르고, 강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계약은 완수되었다.]
정시우가 용의 힘을 새삼스레 느끼며 전율하고 있을 때, 문득 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전 세상, 혹은 그 너머까지도 퍼져 나갔다. 설마 용의 육신에 깃든 자신을 인식하고 한 말인가 해서 가슴이 철렁해진 정시우였으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지금 놈과 정시우는 하나였으니까.
[그렇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전쟁, 혹은 멸망의 시작.]
누군가 용에게 대답을 한 것일까? 필시 그랬으리라. 제아무리 용의 몸에 깃들어 있다 해도 용의 능력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누군가 지금의 정시우는 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용에게 메시지를 전송해 온 것이 분명했다.
[어떤 곳은 이미 끝나 있으리라. 어떤 곳은 끝날 때까지 시작을 감지하지 못하리라. 어떤 곳은 지나치게 빠르게 시작되며, 또 어떤 곳은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되리라.]
정시우는 용이 누구랑 대화를 나누는지 파악할 수 없었기에,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것은 그가 용의 꿈을 꿀 때 언제나 그랬듯, 용이 마나와 육신을 다루는 방식을 기억하며 용의 힘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특히 날개에 집중했다. 어떻게 해서 날개가 전신과 소통하는지, 어떻게 날개를 다루어야 하는지. 날개의 구조를 파악하고 마력이 흐르는 길을 기억했다.
[누군가는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고, 누군가는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으리라. 그 모두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니, 모든 인과는 어그러지고 운명은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가리라.]
정시우는 과연 뛰어난 재능의 보유자였다. 설혹 지구인 중 가장 마나를 잘 다루는 마리나 비셋이라 하더라도 용의 몸에는 적응하지 못해 구역질을 할 터인데, 그는 지금까지 단련한 정신력과 마나 컨트롤을 활용하여 필사적으로 놈을 따라잡고 있었으니까.
[원망은 필요 없다. 그 모두를 내가 떠받치리라. 삶도 죽음도, 가능성도. 과거와 미래마저.]
끝이 다가온다. 그 사실을 파악한 정시우는 최대한 집중하여 놈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놈을 계속 부정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이미 그는 알고 있다.
진정으로 그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오히려 지금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그 끝에 다시 그것을 초월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단언컨대.]
쩌적, 균열이 일었다. 꿈이 통째로 박살 나는 와중, 희미하게 용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내가 승리하리라.]
그것은 온 세상, 혹은 정시우의 한계가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존재가 그 순간의 파열음을 들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
그것을 마지막으로 정시우는 꿈으로부터 쫓겨나 눈을 떴다. 검고 찬란한 비늘로 뒤덮여 있던 정시우의 양쪽 어깻죽지가 찢겨 나가며, 그 안에서부터 암흑보다도 어두운 빛의 날개가 솟구쳤다.
여태껏 어디에 감추어져 있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날개가 수십 미터 이상 펼쳐졌다. 와이번의 그것보다도 웅대한, 드래곤의 그것만큼이나 강한 힘을 품은 날개였다.
[지하 플레이어 스킬, 카오스 윙(패시브)을 각성합니다. 마력에서 비롯되어 실체로 거듭난 날개가 전신의 기운을 북돋우며 몸을 보다 가볍게 만듭니다. 비행이 가능해집니다. 하늘성 던전에 입장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카오스 윙이 Lv5가 되었습니다.]
정시우는 날개를 얻은 후로도 잠시 하늘성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강탈은 확실하게 성공했다. 플레이어의 권한뿐만 아니라, 지금 그가 하늘성에서 얻어 올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강탈해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용의 꿈에 이어 하늘성의 기록이라니, 만약 유령들을 부리며 정신력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이쯤에서 진즉 기절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이제 와 우는 소리를 낼 수는 없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저기 저 사람, 설마…….”
“정시우가 맞아. 맙소사.”
그때쯤에는 인공섬에 모여든 인간들이 소동을 알아차리고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압도적인 마나를 뿜어내던 하늘성이 순간 고요해졌으니 그 충격이 어지간했겠는가.
“날개가 있잖아. 설마 이젠 하늘성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거야?”
“대체…… 양쪽 다 합치면 족히 수십 미터는 되겠는데. 저런 날개를 본 적이 있어……?”
“플레이어가 아니라…… 마치 몬스터를 보는 것만 같아.”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인공섬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그를 향해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속삭이기만 했다.
정시우는 꿈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용의 힘을 모두 체내로 수렴시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레 거대해진 그의 존재감을 모두 감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빠!”
[오, 맙소사.]
그보다 조금 늦게 수아린과 케이나가 탄 팬텀바이크가 하늘성 앞에 도달했다. 그들 역시 정시우의 거대한 존재감에 순간 숨이 막혔으나, 이내 그것을 이겨 내고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 후우.”
수아린이 곁으로 다가오며 그에게 치유 마법을 걸자, 정시우가 그제야 간신히 그녀에게 대답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수아린의 신성력은 그 자체로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어, 심신을 보듬고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상당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 들어와서 그래. 그래도 이제 대충 알았어. 하늘성의 구조나 역사, 그 구성원들과…… 던전의 정보까지도.”
“그거, 보통은 저 안에서 익히는 건데…….”
수아린의 시선이 하늘성 영역 내, 가장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을 향했다. 그곳은 하늘성의 대도서관으로, 플레이어 후보들이 가장 많은 교육을 받는 곳 중 하나였다. 테스트 용 던전도 보통 저 안에 있었다.
“전부 강탈했어. 그 덕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이젠 괜찮아.”
“전부 강탈하다니…….”
정말 쉽게도 말하는구나, 수아린이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니 정시우가 돌연 하늘성 끄트머리에 걸치고 있던 손을 놓아 버렸다.
그러나 그의 몸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날개를 펄럭일 것도 없이 그의 몸은 자연스레 허공에 떠 있었던 것이다.
[오오…….]
역시 꿈에서 용의 날개에 집중한 보람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비행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케이나가 그것을 보며 감탄하여 말했다.
[드래곤의 날개는 물리적인 추진 장치가 아닌 마력의 추진 장치.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마력의 순환이 빨라지며 육신을 강화하고, 비행의 힘을 부여한다고 하지…… 과연 그 말대로군.]
“어라, 그건 플레이어들이 지닌 날개랑 비슷하네요!”
“그 반대겠지.”
“반대……?”
짧게 심호흡을 한 정시우가 마력을 조절해 날개의 크기를 적당하게 줄인 뒤 그들에게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다. 수아린이 고개를 갸웃하자, 정시우가 쓰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드래곤의 날개를 본 따 만든 게 플레이어들의 날개라는 얘기야.”
“아……!”
[역시 그런가?]
수아린이 경악하는 반면 케이나는 마치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드래곤은 나의 대에는 이미 전설로만 남아 있는 존재였지. 단지 신들과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다는 얘기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성은 어디까지고 신에게 대적하는 시스템이지. 드래곤이 그것에 관여되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지 않겠는가.]
“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네요…….”
여태까지 전혀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수아린이 납득한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시우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어 버리며 가볍게 날개를 펄럭였다. 그의 몸이 부드럽게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럼 이제 친구들을 구하러 가자.”
“설마 던전 정보를 알아냈다는 게…….”
“따라와.”
정시우가 재차 날개를 펄럭인 순간 그의 모습이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단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솟구쳤을 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케이나가 당황하며 스로틀을 당겼다.
[뒤쳐지지 않게 가자!]
“끄야아아아아아아악!”
수아린이 한창 나이 처녀가 절대로 내선 안 될 소리를 내며 케이나의 허리를 꼭 붙잡았다. 케이나는 데스나이트 시절부터 숙달해 온 스킬의 힘을 최대로 발휘하여 팬텀바이크의 성능을 끌어 올렸다!
“후, 어마어마한데.”
익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바람의 질주 스킬은 카오스 윙과 궁합이 굉장히 잘 맞는 스킬이었다. 카오스 윙에서 샘솟는 마나를 전부 바람의 질주 스킬로 발현하니, 뛰어난 동체시력을 지닌 정시우마저 겁이 날 만큼 빠른 속도가 나왔던 것이다.
‘바람의 힘, 그리고 바람마저 거스르는 힘. 두 힘이 완전히 조화되는 순간이 기대되네.’
짧은 상념의 끝에 정시우가 날갯짓을 멈추었다. 하늘성으로부터 이어진 하늘 길의 끝, 그곳에 실로 거대한 부유섬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정시우가 목표했던 지점이었다.
[38단계 던전 : 벌새의 낙원]
[플레이어 32명 입장. 현재 진입 불가]
“아무리 자세히 봐도 소규모 던전은 아닌데.”
[그 정돈 슬쩍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시우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수아린과, 팬텀바이크를 붙잡고 태연하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케이나가 있었다. 과연 팬텀바이크와 정시우 이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케이나다운 속도였다.
[그보다도 이건 정말 터무니없군. 이런 던전은 들어 본 적이 없어. 이걸 하늘성이라고 불러도 믿겠어.]
던전은 본디 일종의 아공간으로, 겉에서 보이는 모습은 던전의 일부, 혹은 던전이 일부러 보여 주는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던전의 외관을 보면 대충은 견적이 나오는 법이었다.
크레센트로의 성장 과정에서 신들이 지구에 가할 수 있는 위협이 더해지면서 기존에 있던 던전의 무력 구도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리라.
[그래도 차이가 너무 심해.]
“지금 지구상에 나타난 던전 가운데에선 이 던전이 가장 난이도가 높고, 넓은 모양이야. 그리고 그건 던전에 입장한 랭커들과도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마리나 비셋과 세리아 윌슨, 이서희에 이강후, 존 스미스까지. 이들이 모여 있는 던전이라면 신의 집중표적이 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설령 이곳에 어떤 신이 수작을 부렸다 한들 지금의 정시우는 코웃음을 치며 처리할 자신이 있었지만…….
“어라.”
카오스 테일에 카오스 스케일, 거기에 카오스 윙까지 발현한 덕에 용의 감각이 극도로 활성화되어 있던 정시우는 던전의 내부에서 약동하는 신의 힘을 감지하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로 공교롭게도…….
“하, 이거 재밌네.”
“우와, 오빠 얼굴 너무 무서워요…….”
비늘로 뒤덮인 정시우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자 수아린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고 말았다. 정시우는 씩 웃으며 던전의 입구에 손을 얹었다. 그의 고유능력과 하늘성의 시스템이 충돌하며 섬뜩한 빛이 파직거리기를 잠시, 곧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의 공간이 열렸다.
[진입 가능]
“자, 가자. 여기 말고도 처리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으니까 말이지.”
“네.”
[난 어디까지라도 주인님과 함께할 뿐이다.]
정시우가 던전 안으로 몸을 날리자 케이나와 수아린이 탄 팬텀바이크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던전이 그들을 받아들인 직후 공간의 틈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이미 지옥의 연회는 시작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