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180화.
정시우는 설사 그를 막는 것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모두 박살 낼 기세로, 팬텀바이크를 타고 곧장 하늘로 솟구쳐 하늘성의 지척에 건설된 인공섬에 도달했다.
[인공섬에 잔류 중인 모든 플레이어 분께 알려 드립니다! 현 사태가 명확히 규명되기 전까지 던전으로의 입장은 최대한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뭐? 마리나 비셋이 던전에 들어갔다고? 지금?”
“그뿐만이 아냐. 용성 길드의 이강후와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지금 지구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들인데…… 젠장! 만약 그들이 죽는다면 대체 우리는!”
그러나 막상 도착한 인공섬에서는, 정시우가 난동을 부린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이유로 혼란이 확산되고 있었다.
“진정해, 아직 그들이 돌아오지 못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던전이…… 던전이 저렇게 되었는데!”
“이봐, 이강후뿐만 아니라 그들 그룹의 구성원들이 전부 연락이 되지 않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오늘 그들이 속한 대규모 공략 파티는 없었을 터인데!”
평소에도 상당한 숫자의 플레이어가 머무르며 하늘성에 들어가기 전까지 휴식을 취하거나, 파티를 모집하거나 하는 인공섬의 모든 구성원이 지금 진정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파티지?”
“정신 차려요, 오빠. 여기에 있는 건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그지깽깽이들 뿐이에요.”
다들 정신이 없는 와중 정시우는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것은 바로 인공섬 내에 용성 길드가 소유하고 있는 건물들을 깔끔하게 부숴 놓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용성 길드 소유 건물이 무너진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있어도 누가 저질렀는지는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다. 서로 충돌할 일이 사라졌으니 좋은 일 아니겠는가.
“집요해…….”
“자, 그럼 이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그 어떤 일이 발생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원래 목적을 완수하고야 마는 정시우의 모습에 수아린은 기가 질렸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섰다. 얼핏 들어 보니 하늘성 던전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 같은데…….
“엇, 당신은 정시우!?”
그런데 정시우가 범행현장에서 빠져나오며 재차 은신을 발휘하려던 순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그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돌아보니 동양인, 그중에서도 중국인의 모습이었기에 순간적으로 긴장한 정시우였으나 곧 그의 이목구비가 제법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하시는 모양이군! 중국의 진소운이오!”
“아, 음. 오랜만이네요.”
사실은 어디서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용성 길드의 관계자가 아닌 듯 몸에 마석의 마나가 축적된 기미도 없었을뿐더러 그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에 정시우도 경계를 풀었다.
“그런데 당신은 지하 플레이어라고 밝히지 않았소? 어째서 인공섬에…… 아, 그렇군!”
“큭!?”
역시 의심당하고 있나!? 제 발 저린 정시우가 일단 기억수정 펀치라도 한 방 먹여 둘까 생각하는데 진소운이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하늘성에서 일어난 사고를 파악하고 달려와 준 것이구려!”
“실은 그게 그렇습니다.”
정시우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주먹을 감추고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운의 말을 긍정했다. 우X르도 울고 갈 만큼 빠른 태세전환이었다.
“역시, 정의로운 마음을 지닌 당신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라 생각했소! 더욱이 당신의 연인인 마리나 비셋 양도 던전에 갇혀 있는 상황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무사히 돌아오리라 함께 기원합시다.”
정의로운 마음을 지닌 건물연쇄파괴마 정시우가 침묵한 대신, 마리나가 정시우의 연인이라는 헛소리를 들은 수아린이 매서운 눈으로 진소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수아린의 뜨거운 시선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줄줄이 말을 늘어놓았다.
“설마 갑자기 던전의 난이도가 올라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을 할 수 있었겠소! 지상의 몬스터들도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늘어나고 있다는 모양이오. 다행히도 그쪽은 어째선지 몰라도 몬스터들 사이의 세력 싸움을 시작한 모양이지만…….”
그 말을 듣는 정시우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뭐가 어째? 던전의 난이도가 올라가? 정시우가 겪은 바, 던전의 난이도가 오르는 일은 거기에 신의 힘이 관련되었을 때, 혹은 플레이어의 유령이 폭주할 때뿐이었다.
하늘성 던전에는 플레이어의 유령이 나타나는 일이 없을 테니, 남는 경우의 수는 신의 힘뿐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정시우는 조금 늦게 진소운의 뒷말을 알아듣고는 반문했다.
“잠깐, 지상의 몬스터도 늘고 있다고요?”
“몰랐소? 몬스터 군집 지역에선 지금 수배 이상으로 늘어난 몬스터들이 지들끼리 전쟁을 시작하는 바람에 대피령이 떨어지고 난리도 아니오.”
던전의 난이도가 오르는 것도 모자라 지상의 몬스터의 숫자까지 늘어난다니? 지독히도 운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 그 두 가지를 연결해 보니 문득 한 가지 떠오르는 가능성이 있었다.
‘파에토였던가, 분명 지구의 수준이 낮아 자신이 지닌 힘과 권속을 제대로 보낼 수 없다는 말을 했었지. 그렇다는 것은 즉, 지금 지구가 성장하고 있다……?’
그것을 떠올린 순간 정시우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된다!
하늘성 던전이 갑자기 난이도가 오른 것이 아니라, 각 신들이 던전에 보다 많고 강한 병력을 보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라면? 지구의 마나 밀도가 높아져 보다 많은 몬스터들이 생겨났을 뿐이라면?
‘몬스터들 사이의 전쟁이라면 당연히 엘이 이끄는 몬스터와 그를 거부하는 몬스터 사이의 전쟁이겠지. 녀석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겠어…….’
그는 급한 대로 지상에 퍼져 있는 자신의 부하 유령들에게 엘과 합류해 움직이라는 지령을 전달했다. 전원 만만치 않은 마력과 특수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 엘에게 적잖이 도움이 되어 줄 터였다.
일단 응급조치를 취한 정시우는 재차 진소운에게 보다 자세한 사정을 캐물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역시 많은 사실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분명 34단계 소규모 던전이었던 것이, 단숨에 38단계 대형 던전으로 변했다는 얘기를 들었소. 마리나 비셋과 세리아 윌슨, 결계술사인 이서희에 존 스미스로 구성된 드림팀이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과연 그들이 한데 있다고 해도 잘 헤쳐 나올 수 있을지……. 더욱이 이강후 역시 어떤 던전에 들어갔는지 몰라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고. 참 걱정이오.”
“그렇군요. 고마워요.”
물론 이강후의 안위 따위는 알 바가 아니지만, 역시나 그도 마리나, 세리아와 같은 던전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한 가지 긍정적인 일이 있다면 적어도 던전의 난이도가 올라 그가 정시우의 친구들에게 헛짓거리를 할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인데…….
‘실수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처리하려고 존 스미스를 보호하라는 부탁을 했던 거였는데. 그런 걸 걱정할 게 아니라 그냥 억지로라도 그를 빠져나오게 했어야 했어…….’
“역시 걱정이 많이 되는 모양이로군. 내가 괜한 얘기를 한 것이 아닐까 모르겠어.”
“아니, 아닙니다. 저도 저 나름 움직여 볼게요. 당신도 조심해요.”
그는 진소운과 적당히 작별인사를 나누고 물러나왔다. 그때 마침 그의 귓가에,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의 귓가에도 동일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가 익히 예상하고 있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지구가 ‘크레센트’로 진화하는 중입니다.]
[던전 관리 오류 발생. 플레이어들의 임의 방출이 불가능합니다. 추가로 던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됩니다.]
역시나 정시우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다. 주위 마나의 농도가 조금씩 진해지는 것도 느껴졌다. 몬스터들이 강화되는 것과 동시에 플레이어들 또한 조금씩 강해지리라!
“크레센트라니, 혹시 달에 비유하는 건가.”
“처음이 뉴 에이지였죠. 뉴 문에 이어 크레센트, 틀림없네요. 그렇게 되면 다음은 하프 에이지쯤 되려나요.”
[세상의 진화가 너무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군. 세상을 이루는 개체들의 발전에 의해 그 시기가 앞당겨지는 일도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다.]
그렇다. 여기서 케이나만은 뉴 에이지 이후의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정시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나 때문이 아닐까? 내가 지하 플레이어로서 너무 빨리 성장해서…….”
[물론 주인님이 신에 비견되는 가능성을 지닌 자라는 사실만은 인정하는 바이다만, 주인님 혼자서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만은 그쯤 해 두는 게 좋겠어. 주인님은 이 세상에 비하면 한없이 작디작은 존재일 뿐이야.]
“역시 그렇겠지……?”
얼핏 비꼬는 것처럼 들리긴 했지만, 결국 네 탓이 아니라는 뜻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정시우는 그녀의 말에 웃어 버렸지만, 이내 다시 한숨이 나왔다.
“세상이 이렇게나 뒤집어졌는데, 이제 겨우 초승달이라…….”
만약 보름달이라도 뜨게 되면 그땐 달에서 신이란 놈들이 직접 지구로 하강이라도 해 오는 것일까. 이전 루타가 풀 에이지에서 공수해 온 물건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으니, 그때까지 신들로부터 살아남는 세상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지만…….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좀 더 인공섬을 둘러보았으나, 유의미한 정보는 획득할 수 없었다. 하늘성의 플레이어들도 던전으로의 진입이 막혀 구조대를 편성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늘성…….”
그는 저 너머에 떠 있는 거대한 성을 바라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하늘성, 처음 생겨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손을 허락하지 않았던 장소.
자신의 부탁을 받아 던전에 들어간 마리나 일행을 어떻게든 구하고 싶어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진소운의 말마따나 그녀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하.”
“오빠…….”
제아무리 개미굴 던전을 클리어하고 이세계에까지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하늘성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니. 가뜩이나 이강후에게 한 방 먹어 짜증이 나 있던 상황에 겹쳐 그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올랐다.
“어?”
그때, 그를 걱정스레 살피던 수아린이 문득 놀라 말했다.
“오빠, 저절로 카오스 스케일이 발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오스 스케일이 그의 전신을 뒤덮으며 자연스레 같이 모습을 드러낸 마룡의 완갑이 어두운 빛을 뿌려 내고 있었다. 그것의 정보를 살핀 정시우는 지금 히스테릭 게이지가 터무니없는 기세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엔 게이지가 잘 오르지 않아 여태껏 한 번도 특수옵션인 애시드 스트라이크를 시험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게이지가 50을 가볍게 돌파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정시우의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얘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용의 감각 스킬이 Lv7이 되었습니다.]
[카오스 테일 스킬이 Lv6이 되었습니다.]
[카오스 스케일 스킬이 Lv7이 되었습니다.]
정시우가 지하 플레이어로 거듭난 이래 몇 가지 일을 겪으면서 짐작하고 마룡의 완갑의 옵션을 히스테릭 게이지로 발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확신한 대로, 용의 능력이란 분노로 인해 쉬이 각성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용의 능력이 각성해서 뭐 어쩔 것인가. 그래 봤자 비늘과 꼬리가 단단해지고, 감각이 보다 예민해지는 정도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던 정시우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깐만, 이거…….”
용의 감각이 단기간에 두 번이나 연거푸 성장하며 정시우의 마나를 느끼는 감각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달했다.
그 결과 여태까지 불가능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모르는 신의 파편이라 해도 그 안에 담긴 힘을 쉬이 간파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
그래서, 그 사실로 바뀌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빠?”
“……어쩌면.”
정시우는 지금 자신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신의 파편, 프루타의 파편을 꺼내어 한 손에 쥐며 눈을 빛냈다.
이전까지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그 안에 감도는 싸늘한 [바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투질주 스킬의 속성 진화가 가능해집니다.]
그와 함께 이전 던전에서 특수 업적을 달성하고 보았던 메시지를 떠올리며, 정시우의 눈빛이 맹렬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지상의 용이 날아오를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