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난 폭발, 난리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거리로 나와 웅성거리던 시민들은 이내 다 무너진 호텔 앞에서 인왕처럼 버티고 선 정시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봐요,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이곳은 위험하니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피하세요.”
정시우는 그저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용의 위엄에 감히 항거할 수 있는 이는 없었고, 시민들은 그의 말이 절대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장 부산하게 대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쪽이 현명했다.
“도망쳐! 어쨌든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
“이봐, 거기 당신들도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저분 말씀에 따라! 도망치란 말이야!”
그로부터 한동안은 고요가 이어졌다. 오직 이 현장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다음 습격이 없네요.”
“없앤 거야.”
수아린의 말에 정시우가 조용히 한 마디 보탰다. 한 마디만으로 잘도 사람을 섬뜩하게 할 수 있구나, 수아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떨었다. 그녀 대신 정시환이 물었다.
“어떻게 되어 가는 거냐?”
“잡졸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있어. 그리고 지금은 그놈들로부터 위로 이어지는 선을 찾는 중이야. 이건 유령들만으로는 해결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제아무리 케이나의 원조가 있어도 수만 명 유령이 보내오는 정보를 동시에 분석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감당된다는 뜻은, 정시우가 신체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이미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극을 가할수록 더욱 성장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는 빠르게 유령들이 보내오는 적의 정보를 훑으며 이를 갈았다.
“마력 아티팩트에 군사 무기까지 다양하게도 가지고 왔네. 이 새끼들이…….”
“아, 저기…….”
수아린이 한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한데 뭉쳐 뭉게구름처럼 떠오는 유령 무리, 그 중심에 한껏 발버둥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있었다. 소리도 지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목구멍을 유령들이 틀어막아 바깥으로 소리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한 놈. 아, 두 놈.”
“으아…….”
온갖 발작을 하며 몸을 뒤트는 인간이 허공에 둥둥 떠서 날아온다니, 새벽에 봤더라면 분명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광경이다. 물론 그것에 당하는 본인들의 심정은 처참하겠지. 그들이 지금부터 당할 꼴이 더욱 처참하겠지만 말이다.
“이쪽으로.”
[알겠습니다.]
유령들이 차례차례 인간들을 붙잡아 한쪽에 내동댕이쳤다. 완벽히 무력화하고 한 놈한테 한 명씩 유령이 달라붙으니, 놈들은 기력을 잃고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정시우는 아공간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놈들이 소지하고 있던 각종 물품, 특히 화기와 아티팩트 등을 한데 담았다. 잡혀 오는 사람의 숫자가 세 자리를 넘었을 땐 슬슬 아공간 주머니가 꽉 찰 지경이 되었다. 그는 새 것을 하나 꺼내었다.
“이, 이 사람은 랭커 아니냐?”
“아, 그런가?”
어쩐지 유령이 제법 역소환 당했다 싶더니 랭커까지 동원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였다. 정시우가 부리는 유령들은 하급 언데드 던전에 나오는 유령들과는 질적으로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설령 수백이 역소환 된다고 해도, 수천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임무에 투입되기도 전에 붙잡혀 비참한 꼴을 당할 뿐이다.
[주인님, 복귀했다. 조금이라도 시내의 폭발과 관련이 있는 자들은 지금 전부 이곳에 있다.]
“그래, 케이나. 수고했어.”
정확히 286명을 잡아들인 시점에서, 통신이 제한되었던 런던 구역 전체가 [정화]되었다. 더 이상 런던에서 분탕질을 칠 수 있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놈들은 하나같이 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을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시우야, 너…….”
정시환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그 어떤 특수부대가 출동한다고 해도 이만한 숫자의 인원을 잡음 없이 잡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방금 폭발한 호텔 정도의 피해는 무수히 일어났으리라.
그런데 정시우는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다루어 그것을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처음 사건이 발생하고 고작 37분이 흘렀을 뿐인데, 케이스가 종료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지, 이제 시작인데. 아직 중요한 게 남았잖아.”
그래도 용성 측에서 최저한의 대비는 했던 모양이었다.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이 중 용성 길드와의 연결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이는 없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구별 없이 섞여 있었으며, 정시환의 납치를 위해 그들이 고용했으리라 짐작되는 랭커는 심지어 영국에서 제법 큰 규모의 길드를 이끌고 있던 남자였다.
“몸에 마석을 쌓고 있어.”
“용성과 목적을 같이 하는 동료라는 거냐?”
“어쩌면 그 외에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도 모르지…….”
정시우는 다른 이들은 놔두고 랭커를 붙들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던 그는 정시우가 그의 몸에 수백으로 겹쳐 씌어 있던 유령들을 걷어 내자 비로소 두 눈을 제대로 뜨고 움직일 수 있었다.
“오, 맙소사.”
엷게 웃고 있는 정시우와 얼굴을 마주하고 그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정시우를 상대해야 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 왜 몰랐을까 참 유감이야. 아, 여기 내 아버지야. 인사해.”
“……정시환입니다. 설마 당신이 자국의 피해를 감수하고 개인의 영달을 취할 줄은 몰랐습니다. 실망이 크군요.”
“오…… 제길.”
영국의 랭커, 와이어트 베이커는 자신의 표적이었던 인물의 정체를 깨닫는 그 순간 자신의 목숨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완벽히 속았다고 이강후를 저주하면서도 그는 조심스레 변명했다.
“미안, 당신의 아버지인 줄은 정말 몰랐어. 동양인은 잘 구별하지 못한단 말이야.”
“불행한 일이지. 던전도 아닌 현실에서, 우리 플레이어들끼리 서로의 목숨을 위협해야 한다는 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베이커는 정시우의 함축적인 말을 듣는 그 순간, 어쩌면 자신은 죽어서도 편안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공식석상에서 정시우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던 김하룡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그놈은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베이커의 몸이 으스스 떨렸다.
정시우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넌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아직 네가 지킬 수 있는 것들이 남았다고 생각해. 네가 하려던 것, 네가 아는 것을 모두 발설할 수만 있다면…… 너만으로 끝내 주지.”
“미안하지만 그건…….”
“그 반대의 경우엔, 피해가 어디까지 커질지 나도 짐작할 수가 없네.”
그는 기밀유지를 위해 분명 용성 길드와 서로 많은 것을 주고받았으리라. 어느 정도 서로의 약점도 잡고 있을 것이다. 물론 정시우에겐 그런 일들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만약 네가 말 안 해도 상관없어.”
정시우는 조용히 말을 마무리했다.
“결국 난 알게 될 거거든.”
“……후.”
그 말을 들은 베이커는 모든 망설임을 날려 버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보상으로 그는 약속받았던 대로 깨끗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죽음 이후에 남은 것은 정시우의 마음대로겠지만 말이다.
“아버지, 받아요.”
“이건…… 알겠다. 하지만.”
상황을 정리한 후, 정시우는 아공간 주머니를 아버지에게 맡겼다. 용성 길드와의 연결점을 찾아내기엔 충분한 자료였다. 그러나 정시환은 그것을 받아들면서도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 이걸로 상황을 진전시키는 것은 무리다, 시우야. 모두 분석하고 놈들을 몰아붙이기에 충분한 증거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선 조금의 시간이 걸려. 더욱이 그때쯤이면 놈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얼마든지 마련하고도 남을 거다.”
“그런 건 처음부터 필요 없었어, 아버지. 내가 설득해야 하는 건 나 자신뿐이야.”
“시우야.”
정시우는 더 이상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한 유령들을 모두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보내고는, 팬텀바이크를 꺼내어 시동을 걸고 올라탔다.
“세하, 아버지 확실히 보호해라.”
“맡겨만 주시죠.”
[주인님의 명을 확실히 수행하겠습니다!]
방금 확보한 랭커의 유령을 비롯한 최정예 유령들을 용세하 곁에 붙여 놓았으니, 설령 이강후 본인이 급습해 온다 해도 안전하리라. 물론 이강후 본인에게는 그럴 여유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는 불안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에게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할게. 아버지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조금은 더 문명이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힘내 볼게.”
“네 걱정을 하고 있는 거다, 녀석아. 자만하다가 당하지 않게 조심해라. 상대는 거대한 세력이란 말이야.”
제아무리 유령 군단을 부린다고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 적어도 마석 관리거래소장인 정시환이 조사하며 파악한 용성은 그런 집단이었다. 좁은 한국 땅 안에서 제 잘난 맛에 설치던 김하룡 따위와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명심할게.”
정시우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짓는 아버지에게 일단 그렇게 말해 두었다. 물론 그도 자만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헥토의 강림체에 혼쭐이 난 적도 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학습능력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 정시환이 본 정시우는 그저 유령 군단을 다루었을 뿐이다. 설령 정시우가 힘을 쓰는 모습을 보았다 해도 그냥 역시 우리 아들은 강하구나, 하고 생각하며 넘어가겠지만, 그것은 정시환이 힘의 크기를 인식하지 못해서일 뿐 정시우의 힘이 별 것 없는 것이어서가 아니다.
[큰 주인님은 세상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는군. 나를 포함한 군단 모두가 덤벼도 주인님을 어쩌지 못할 텐데.]
“시끄러, 이 녀석아.”
아버지가 듣지 못해 다행이다. 정시우는 품 안에 수아린을, 뒷좌석에는 케이나를 앉히고 바이크를 발진시켰다. 정시환은 그 자리에 남아 아들의 뒷모습을 보다가는, 후우, 하고 제정신을 차리며 용세하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세하야. 저 처자도 내 며느리 후보일까?”
“음…… 그, 글쎄요.”
“이렇게 참한 며느리 후보가 많다니, 아들이 정말 멀리 가 버린 기분이 드는구만…….”
“그 감상을 느끼시는 포인트가 묘하군요…….”
막막하고 어두운 상황 앞에 현실도피하기를 잠시, 정시환은 용세하를 대동하고 곧장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착수했다.
통신 차단 사태를 해결하고 곧장 영국과 미국 정부, 그리고 WPC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 어떻게든 그의 아들이 저지르고 있는 대규모 폭력 사태를 정당화시켜야만 했으니까.
그로부터 45분이 지났을 때쯤, 정시우는 용성 길드의 본부가 위치한 중국 북경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