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화.
“아, 정말 시우다! 너무 보고 싶었어!”
“마리나!?”
자신을 보자마자 강아지가 꼬리 흔드는 것처럼 날개를 흔들며 안기려 드는 마리나를 한 손으로 가볍게 저지하며 정시우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 왜 여기 있어?”
“나도 낯익은 얼굴인 존과 일하는 게 편하긴 하다만, 계속 존을 빌릴 수도 없어서 말이지. 그는 던전 공략을 하러 갔다. 여태껏 못 올린 레벨을 올리러 말이야.”
물론 그것은 알고 있었다. 어제 존 스미스에게도 제법 강력한 유령을 붙여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유령의 시야를 빌리니 이제 막 그가 파티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제는 바로 그의 대타로 온 녀석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신 내가 왔다는 말씀! 오빠가 점수 많이 따고 오라고 했어.”
“그야 마석거래관리소장이니까…….”
그래도 보통은 그런 음침한 속내를 직접 입 밖에 내지는 않을 것이다.
항상 머릿속이 해피한 마리나가 과연 거래소장에게 점수를 따기나 할 수 있을지 지금부터 의심이 가는 정시우였으나 딱히 그녀가 아버지에게 점수를 따든 못 따든 관심이 없었기에 그 이상은 터치하지 않기로 했다.
“정시환입니다. 잘 부탁해요, 비셋 양.”
“잘 부탁드려요, 아버님!”
그런데 놀랍게도 마리나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음!?”
“그 부분의 점수였냐!”
터치하지 않기로 했지만 도저히 태클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발전 이전에 사랑 문제라니 역시 이 남매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나 한국어 열심히 배웠어! 잘 부탁드려요 아버님!”
영어도 아니고 서툰 한국어로 그렇게 말한 마리나는 잘 했지? 하는 얼굴로 정시환을 올려다봤다. 배운 게 아니라 발음을 통째로 외운 것이 분명하다고 정시우는 생각했지만, 그것을 보며 정시환은 끝내 푸핫,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이거 만만치 않은 며느리 후보인데그래.”
“아버님!?”
수아린이 단단히 믿고 있던 동료에게 배신당한 얼굴이 되었다.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마리나와 수아린의 이마에 딱밤 한 대씩을 놓았다.
“김칫국 좀 그만 마셔라, 너희. 부끄러움은 어디에 갔냐, 부끄러움은.”
“그게 뭐야? 먹는 거야?”
“그런 건 하늘성에 놓고 리타이어했다구요!”
한국어로 말했기에 마리나가 못 알아들은 건 둘째 치고, 이 상황에서 여기에 더 있다간 수아린이 점점 대담한 말을 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워진 정시우는 서둘러 개미굴에 가기로 했다. 다만 그전에 마리나에게 당부해 두었다.
“아버지는 지금 용성 길드에 노려지고 있을 확률이 있어. 내가 보낸 문자 봤었지?”
“응. 그 인간이랑은 이제 팀 안 짤 거야. 이래 봬도 호위 업무도 제법 확실히 하는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
사실 그 부분에서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마리나는 마나와 관련된 능력과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만은 모든 플레이어 중 단연 톱을 달리는 강자, 설령 저격수가 있든 마나 능력자가 오든 당하기 전에 먼저 쏘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우리는 일하러 가자.”
“앗, 오빠 잠깐만! 아버님, 마리나보단 그래도 같은 한국인인 제가…….”
“넌 슬슬 쇄국정책 그만두라고.”
그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그때, 돌연 유령의 시야가 그의 눈에 공유되었다. 존 스미스가 팀원 구성을 완료한 모양이었다. 그 멤버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유령이 그에게 보고를 올린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정시우는 그것이 유령이 대량의 마석을 발견했을 때의 반응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냈다.
‘플레이어가 마석을 갖고 다닐 수도 있지. 인벤토리 안에든 품 안에든.’
그러나 그런 의사를 전달받은 유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몇 명인가의 플레이어들에게 차례로 시선을 집중했다.
아무리 그래도 용의 감각을 유령을 통해 발현할 수는 없어 자세히 그들을 살피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유령은 그들의 신체 내부를 투시라도 하듯이 노려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 과연.”
그는 금세 유령이 무엇을 전달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아마 이곳 영국에 와 아버지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알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 유령은, 존 스미스와 파티를 맺은 몇몇 플레이어들의 몸 안에 마석이 축적되어 있다는 보고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정말 공교롭게도 말이지…….”
“시우야? 안 가고 거기서 뭐하냐? 네가 뭐라고 안 해도 괴롭히지 않는다. 확실히 며느리 후보에 올려놓을 테니 걱정 마라. 물론 지금까진 아린이가 압도적인 1위다만.”
“지금 그런 문제는 어찌 되든 좋아.”
방금 말을 마리나가 알아듣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마리나를 향해 돌아섰다.
“마리나, 존 스미스가 어떤 던전에 도전하는지 알아?”
“응, 34단계 던전 중에 제일 작아서 소규모로 돌파할 수 있는 게 있거든. 얼마 전에 솔플 성공했어. 후히히.”
아무리 생각해도 마리나의 무력 기준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유리되어 있음에 분명했다. 정시우는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랑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서 존 스미스를 도와줘. 아, 가능하면 서희와 세리아도 대동해서. 용성 길드가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지금 당장 막아설 건덕지가 없어. 가능하면 존 스미스를 보호해 주면서 놈들의 꿍꿍이를 캐내 줬으면 좋겠어.”
“그 부분은 세리아 전문이니까 아마 가능할 거야. 지금 바로 갈게! ……아, 그러면 ‘아버님’은?”
아버님이라는 부분만 한국어로 발음하는 마리나. 아무래도 교육을 단단히 받은 모양이다. 정시우는 그녀의 말에 씩 웃으며 정시환 곁으로 한 걸음 옮겼다.
“내가 지킬게.”
“슈라면 확실하지. 그러면, 그렇게 됐으니까 나 가 볼게! 아버님, 안녕!”
“슈라고 부르지 마 인마, 야!”
“음, 으으음?”
빠르게 오고 간 대화 끝에 마리나가 곧장 깃털 날개를 펼치며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정시환의 얼굴 가득 물음표가 떠올랐다. 정시우는 짧게 설명해 주었다.
“용성 길드가 행동에 나섰어. 지금 존 스미스를 노리고 있어. 아버지도 노려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
“그래서 비셋 양을 보낸 거냐.”
“그게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이거든. 나는 하늘성에는 못 가니까.”
그리고 어쩌면 존 스미스에게 수작을 부리는 동시에 이쪽에도 무슨 짓인가 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성은 마리나에게 맡겨 두고, 아버지는 정시우 본인이 지키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하지만 이젠 하늘성으로 비셋 양이 갔으니 우리가 이 일에 대해 알아차렸으리라는 추측을 했겠구나. 잘 하면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까지도 들켰을 수 있단다.”
“그렇다면 남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네. 마리나를 보고 알아서 사리든가…….”
존 스미스와 함께 이쪽까지 확실하게 처리하든가. 그의 말에 정시환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나는 걱정이구나, 아들아.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과감하게 움직이게 했을까. 분명한 동기가 없는데 말이다.”
마석 섭취는 분명 금기시되어 있는 일이지만 법적으로 막을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설혹 정시환과 존 스미스가 용성 길드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도, 용성 측에서 그들에게 딱히 먼저 손을 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정반대의 이유라면 가능하지.”
“정반대의 이유……?”
“아버지가 관리하고 있는 것들.”
정시환은 단번에 그것을 알아듣고는 기가 막혀 말했다.
“설마 날 제압하여 강제적인 수단으로 마석을 확보하겠다는 거냐?”
“빙고.”
“그건 설명이 되질 않아. 지금이 근대 유럽 사회도 아니고, 나 하나 어찌한다 해서 세계 마석 흐름을 조종할 수 있으리란 구시대적인 발상을…….”
그때 정시우가 손을 뻗었다. 열린 창문 안으로 날아들던 탄환이 그가 내민 손가락에 맥없이 붙잡혔다. 이어서 세 발 더. 전부 마취탄이었다.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을 정말로 하고 있나 본데.”
“런던 시내에서, 돌아 버렸군.”
정시우는 손아귀에 잡힌 탄환을 전부 창밖으로 가볍게 튕겨 냈다. 그것으로 일단 상황이 잠잠해지자, 정시환이 설마 하며 물었다.
“되돌려 맞춘 거냐……?”
“아니, 죽였어. 마취탄이든 고무탄이든 내가 튕겼는데 죽지 않을 리가.”
“…….”
정시환은 그 말을 들으며 아들이 법이나 도덕과는 관련이 없는 세계로 가 버렸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내뱉다니…… 그러나 정시우는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리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저격만 해 대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걸 이제 슬슬 깨달았을 테고, 그렇다고 대대적으로 움직였다간 아버지가 노려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마석을 쉽게 움직일 수 없게 될 테고…… 어떻게 나오려나? 설마 민간인까지 끌어들이지는 않겠지.”
“난 일단 경찰과 정부에 연락을 해 두마.”
그러나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의 말에 제대로 움직이려 하기보다 말도 안 된다며 일축하는 관계자의 말을 듣고 전화를 끊은 정시환의 안색이 굳었다.
“이런 바보 같은.”
“설마 윗선이 다 넘어가진 않았을 거 아냐. 연락되는 사람 없어?”
“기다려 보거라.”
미국이었다면 대통령까지도 직통으로 가능했지만 영국에선 불가능했다. 그러나 정시환이 미국을 통해 영국 지도부에 접촉하려던 때 갑자기 통신이 끊겼다.
“……통신이 되지 않는구나.”
“그래, 그걸로 모두 파악했어.”
놈들은 무른 생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장을 볼 생각으로, 런던 일부 구역의 이동과 통신을 폐쇄하면서까지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대대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거 재밌게 됐는데그래…….”
“거참 살벌한 말이구나.”
“세하야, 아버지 업어라. 네가 보호해 줘.”
“예, 형님.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세하는 곧장 정시환을 업고는, 정시우와 함께 성장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얻게 되었으나 여태까지는 쓸 필요가 없었던 탱킹 스킬들을 발현했다.
그것은 바로 주위 적의 공격까지 모두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자기희생형 스킬! 이제 최소한 용세하가 죽기 전에는 정시환이 다치지 않을 터였다.
“나가자.”
그들이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린 순간, 만화처럼 그들이 있던 호텔이 폭발했다. 마력을 이용한 폭탄이 아니어서 정시우도 폭발 직전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이런……!”
“영화도 아니고! 그 자식 미쳤어요!”
만약 그대로 당했으면 일반인인 정시환은 꼼짝없이 죽었겠지만, 이 정도는 대비했으리라 생각한 것처럼 보였다. 단 그 과정에서 정시환의 보호 태세가 흔들리기를 노렸던 것이겠지.
“……그래, 민간인 피해도 감수한다 이거지.”
그리고 그것은 제대로 역효과를 냈다. 정시우는 언제나, 싸움에 관계없는 이가 휘말리는 것이 끔찍하도록 싫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평소 자신이 선호하지 않는 전투 스타일이라 할지라도 거침없이 택할 만큼은, 말이다.
“전원 집합.”
손등의 각인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 순간 그의 의지가 그가 부리는 모든 수족에게 전해져, 그 모두를 그의 눈앞으로 불러내기에 이르렀다.
[소울 포스 스킬이 Lv12가 되었습니다.]
[주인님!?]
가장 먼저 거주지역에서 베토와 잘 지내고 있던 케이나가 불려 나왔다. 그녀 역시 어디까지나 정시우에게 속한 혼에서 비롯된 존재! 여태까지는 불가능했지만, 그의 의지가 그녀를 곧장 그의 곁으로 소환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주인님!]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주인님!]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세계 곳곳으로 퍼져 있던 수만 명의 유령이 일제히 그의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워낙 많은 숫자의 혼이 겹치고 겹쳐 주위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정시환은 그것을 보며 기가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의 적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전부 붙잡아.”
혼의 주인이 선언했다.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알겠습니다.]
케이나를 포함해 수만의 유령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시우는 폭발로 완전히 날아간 호텔 아래 혹여나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한 후, 사망자의 잔해만을 발견한 후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용의 감각 스킬이 Lv6이 되었습니다.]
[용의 위엄 스킬이 Lv12가 되었습니다.]
[괴력 스킬이 Lv10이 되었습니다.]
분노가 유형화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은 그의 모습에 수아린조차 겁을 먹고 말을 걸지 못했다. 정시우 또한 그들과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세계가 언제까지고 문명의 겉모습을 유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무력과 마력으로 지배되는 세상, 힘이 곧 법이 되는 세상이.
과연 그 세상에서 그 누가 정시우 위에 설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코웃음을 치며 인벤토리에서 해머를 꺼내어 쥐었다.
지금부터는 처벌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