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화.
정시우는 기왕 영국에 온 김에 며칠 더 런던에 체류하기로 했다. 정시환이 그를 붙잡기도 했고, 사실 휴식처에 들어가기만 하면 개미굴에도 수중던전에도 들어갈 수 있으니 지상에서 어디에 머무르는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왜 영국에 와 있는 거야?”
“모든 거래소를 돌아보는 중이거든. 마석 거래는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지. 금력과 무력이 충돌하기 가장 쉬운 환경이기도 하고……. 다음은 프랑스로 가 볼까 생각 중이야.”
“세계여행이…… 그건 부럽네.”
“이 녀석이. 이래 봬도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로서 교류하지 않은 지 몇 년, 겉으로 보기엔 몰라도 정시우와 정시환은 아직 서로가 조금 어색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오랜 관계의 단절로 인한 위화감은 그리 쉽게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목숨은 무슨, 미국의 랭커들이 돌아가며 지켜 준다면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모든 랭커가 존처럼 똑부러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들아.”
“하긴 그건 그렇지만…….”
둘 다 그리 요령이 좋은 편이 아니라, 이번에 헤어지게 되면 다음 만나는 것은 또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정시우는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괜히 아버지에게 쓸데없는 말이라도 한 마디 더 붙여 보았고, 정시환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아들에게 어울려 주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11년 전, 하늘성으로 인해 어긋났던 관계의 재활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 꼬리는 얼마나 자유로운 거냐?”
“자.”
정시우는 정시환에게 굳이 자신의 꼬리를 감추지 않았다. 허공에서 흔들흔들, 정시우의 의지대로 움직이던 꼬리가 돌연 빠르게 달려들어 정시환의 몸을 휘감아 들어 올리자 그는 놀라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이 녀석이!”
“프흐.”
수아린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초딩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녀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서서히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시시덕거리며 놀 수만은 없었다. 두 사람 다 나름의 일이 있는 것이다.
“녀석, 그만 내려라. 존의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구나. 난 슬슬 출근한다만 시우 너는? 내가 괜히 붙잡아 놓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괜찮아. 나는 여기서부터도 얼마든지 던전에 갈 수 있어.”
“그 부분은 다른 플레이어랑 똑같구나…….”
정시우는 아버지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 주고는 기지개를 켰다.
거주지역을 통해 그가 목표하고 있던 수중던전에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겠지만 거기는 한 번 들어가면 하루이틀 안에는 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기껏 아버지와의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렇게 시간을 날리는 것은 조금 아쉽다.
“그럼 난 오랜만에 평범한 개미굴 던전이나 클리어해 둘까.”
한때는 왕성하게 개미굴 던전을 클리어하며 다양한 패턴의 던전을 체험했지만, 최근엔 이세계다 통합 던전이다 해서 정작 제대로 된 개미굴 던전에 들어간 적이 없다.
하늘성의 플레이어들도 높은 단계의 던전에 도전하고 있는 지금, 아직 그가 경험하지 못한 넘버링의 던전이 늘어났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고 보면 통합 던전도 어디까지나 오빠가 경험했던 넘버링의 던전에 한해 적용되는 거였죠.”
“응. 이미 대규모로 정리해 둔 만큼, 새로운 넘버링을 모두 획득해 두고 주기적으로 통합 던전을 만들어서 들어가면 개미굴 던전 정리만큼은 편하게 할 수 있겠지.”
“누가 들으면 집안 청소라도 하는 줄 알겠습니다, 형님…….”
어쨌든 나중에 다시 통합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모든 종류의 개미굴 던전을 클리어해 두는 것이 좋았다. 그가 서포터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서류가방을 챙기던 정시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굉장히 이상한 얘기를 하는구나. 나도 플레이어들의 얘기는 조금 들어 보았다만…… 역시 개미굴인가 하는 그곳은 하늘성과는 명백히 다른 시스템으로 보여.”
“하지만 둘 다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야.”
“물론 지구를 이계로부터 보호하는 1차적인 저지선이라는 점에서는 목적이 같아 보인다만, 아무리 봐도 후자가 상급자용 코스잖냐. 그건 다른 이가 만들었거나, 설혹 같은 이가 만들었더라도 처음부터 다른 대상을 지정해 두고 만든 시스템일 확률이 커.”
아버지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정시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그 역시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문장으로 정리된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묘했던 것이다.
“그 대상이 나라는 것 또한 사전에 상정해 둔 시스템일까?”
“혹은, 너에 준하는 초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던 것일 수도 있겠지. ……아.”
그 부분에서 정시환의 표정이 묘해졌다.
“과연, 확실히 두 시스템을 만든 사람, 혹은 존재는 동일인물이거나 서로 관계가 크겠어.”
“아버지, 지금의 대화에서 뭔가 건진 부분이 있었어?”
“그래. 그도 그럴 것이 처음 하늘성이 나타난 때, 네가 플레이어로 선택되지 않았잖니.”
“그게 무슨…… 그런가?”
정시우도 머리는 그리 나쁘지 않아, 아버지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바로 캐치해 냈다.
“확실히…… 나는 내가 플레이어가 되지 못했을 때, 선정 기준이 완전한 랜덤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중에 보니 플레이어가 되는 사람들은 확실히 일반인에 비해 뛰어난 면이 있었지.”
“즉 플레이어의 선정 기준은 랜덤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처럼 신체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이가 선택을 못 받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하늘성이 아닌 개미굴에 입장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는 얘기지.”
대충 그럴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확신하고 나니 영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정시우의 반응이 좋지 않자 정시환은 이 녀석 또 난리 피우려나, 하는 생각에 긴장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들며 가벼운 한숨을 뱉을 뿐이었다.
“이게 다 내가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얘기가 그렇게 되니?”
“그러니까 더 강해지면 돼.”
아들이 내놓은 무식한 결론에 정시환은 끝내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어디까지나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온 웃음이었다.
“그렇지, 너는 네 스스로가 답답한 것을 참지 못하니까 말이야.”
정시우는 스스로를 존중하는 만큼 타인을 존중한다. 그들과 교류해야 할 부분에 한해서는 그들에게 맞추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워낙에 특별했던 만큼 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른 누군가가, 혹은 상황이, 그를 압박한다면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부자유에 익숙하지 못한 맹수가, 감옥을 버텨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능력으로 어찌도 할 수 없는 하늘성과 개미굴, 이계의 존재들. 그는 분명 그것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때까지 끊임없이 힘을 추구할 터였다.
“그래도 이젠 조금 자유로워졌어. 앞으로는 더 자유로워지겠지. ……그럼 다녀오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가방의 내용물을 모두 챙긴 것을 확인한 정시우는 꼬리로 그를 밀어 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들이 조금 자유로워졌다는 부분이 걷잡을 수 없이 두려운 정시환이었으나 그는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럼 저녁에 보자. 볼 수 있지?”
“당연하지.”
아버지가 존 스미스의 차에 타는 것까지 지켜본 정시우는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러면 우리도 가 볼까.”
“네. 저도 몸이 찌뿌드드하던 참입니다.”
“용세하 씨, 시우 오빠한테 몸이 적응해 버렸군요…….”
“오해를 살 만한 표현은 자제해 주시죠, 선배님…….”
그들은 곧장 휴식처로 향해, 그곳에서 다시 개미굴 던전으로 들어갔다.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기이한 일이 일어나서야 몸이 버틸 수가 없다. 그 던전의 대부분은 그가 통합 던전을 클리어한 이후로 새로 생긴 허접한 던전이었다.
그렇게 정시우는 고작 3시간 만에 38개의 던전을 클리어했다.
[던전 클리어]
[소요 시간 3분 14초]
“음, 여태까지는 별생각을 안 했는데…….”
정시우는 방금 클리어한 던전의 클리어 시간이 3분에 근접한 것을 보며(넘버링은 200에 근접하는 던전이었다.) 퍼뜩 떠올린 한 가지 생각을 입에 담았다.
“이거 클리어 시간을 엄청 줄여도 뭔가 하나 나올 것 같은데.”
“저도 오빠가 슬슬 또 그런 발상을 하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죠.”
수아린이 점심으로 챙겨 온 샌드위치를 그에게 건네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정시우가 그것을 받아 우물거리며 뭐라 반론하려던 그때, 그의 눈앞으로 이전 한 번 보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특수 업적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영광의 마라토너가 될 뻔했는데 아쉽군요!]
“거봐.”
“그러게요…….”
부자유니 뭐니 떠들어도, 그를 이 개미굴에 떠밀어 넣은 장본인과 정시우는 제법 마음이 맞는 것이 아닐까, 수아린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 몫의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벌써부터 몸이 달아 샌드위치를 씹지도 않고 삼키는 정시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한가로운 점심 식사는 물 건너간 것 같았다.
“그런 고로 도와줘, 케이나.”
[나보고 페이스메이커라도 하라는 것인가?]
“아니, 같이 달려야지. 네가 왼쪽, 내가 오른쪽이다. 세하랑 아린이는 죽지 않은 놈들 정리.”
그렇게 해서 원래 비전투 멤버인 수아린에게까지 마총을 들게 한 정시우는 분노의 질주 포메이션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기껏 마음을 다잡고 들어선 던전은 바로 27단계 던전을 토대로 생성된 던전이었다.
[개미굴 에이리어 #76 치명거미의 그물]
[클리어 제한 시간 ? 10:15:00:00]
[앗, 드디어 여기에 사람이……!]
“아, 텄다.”
던전에 들어선 순간 떠오르는 메시지에 정시우는 그들에게 반갑게 다가오는 유령도 무시하고 실망감에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일단 이 포메이션을 시험하긴 해야지.”
“이 단순무식한 포메이션에 시험의 필요성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아, 이 사람들한테는 내가 안 보이나 봐…….]
“아, 그래그래. 옛다 관심.”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과 불안을 품기 시작하는 유령을 뒤늦게 달래 준 정시우 일행은 마음을 다잡고 곧장 던전 안으로 돌진했다.
분명 날개가 달린 쪽은 용세하와 수아린인데, 바이크를 탄 케이나와 바이크도 타지 않은 정시우의 돌진이 얼마나 빨랐는지 있는 힘껏 날개를 파닥여야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계속 달렸을까, 문득 고개를 든 수아린의 눈에 거대한 철제문이 보였다.
“앗, 저거 보스 룸 문…….”
“으랏차!”
“아아아아아!”
[쿠아아아아아아!]
[던전 클리어]
[소요 시간 47분 33초]
“…….”
분명 보스 룸 안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괴물이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는 본 것 같았는데 그다음 순간 방 안에는 작은 비드 하나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수아린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그 옆으로 날아온 플레이어의 유령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날 무참히 짓밟았던 거대 거미를 그렇게 쉽게…….]
“아, 거미였구나…….”
“으음, 아직 이걸론 안 되겠어.”
정시우는 속도를 좀 더 빠르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시우와 케이나의 돌파력으로 전방을 부수고, 남은 잔해를 용세하와 수아린이 처리한다는 작전에 부족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몬스터의 저항을 줄이고 스무스하게 돌진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되면 유령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나.”
“이쯤에서 그 말이 나올 것 같았죠…….”
그날, 정시우는 기어이 #136 개미굴 던전을 2분 29초 만에 클리어하며 특수 업적 [서브 3]를 달성, 민첩 10 스탯과 전투질주 스킬 레벨 2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한 가지 보상이 더 있었다.
[전투질주 스킬의 속성 진화가 가능해집니다.]
[특수 업적을 하나 더 달성하면 가능성의 확장과 방향성의 제시가 가능해집니다. 보다 빠르게, 바람보다도 빠르게 달려 보세요.]
“이게 대체 뭐라는 거야.”
정시우는 그것을 별것 아니라 생각하며 가볍게 넘겨 버렸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
그로부터 사흘 후, 정시환의 보디가드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