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수아린은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다시 몸단장을 했다. 누가 보면 전쟁터에도 나가려는 줄 알 만큼 장렬한 기백을 풍기는 그녀의 모습이 실로 늠름하여 정시우는 다시 이마를 짚고 말았다.
“아버지가 쫄겠다 인마.”
“그래도 최대한 좋은 인상을 드리지 않으면……!”
정시우는 아버지에게 공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입국장으로 마중이 갈 것이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아버님이 직접 오시는 게 아닌가 봐요?”
“내가 어릴 때부터 나 때문에 워낙 주목을 많이 받아서, 평소엔 별로 사람 앞에 나서고 싶어 하질 않아.”
“가여우셔라.”
“PTSD도 아니고…….”
빠르게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과연 그들을 기다리던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들을 반겼다. 금발에 푸른 눈의, 조각을 깎아 놓은 듯한 미남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행을 보자마자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는 매끄러운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존 스미스입니다.”
“네네, 전 김철수라고 합니다.”
“예?”
“아뇨, 오빠. 이 사람 이름은 진짜 존 스미스예요.”
김철수?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존 스미스를 앞에 두고 수아린이 정시우에게 설명했다.
“미국에서 마리나 다음으로 유명한 랭커잖아요. 그때 세계 플레이어 대표 회의에도 참석했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마리나 바로 옆자리였어요.”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모습을 보긴 많이 봤지. 그런데 진짜 이름이 존 스미스라고?”
“물론 가짜입니다. 진짜 이름은 기밀이죠.”
그러나 적어도 그가 존 스미스로서 세계 사회에 먹히고 있는 유명 플레이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시우는 모르고 있었지만 애초에 그는 세리아와 마리나를 제외하면 알고 있는 랭커가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알고 있던 놈은 바로 얼마 전 그의 손으로 죽였다.
“……난 딱히 가명 같은 게 없어서. 알고 있겠지만 정시우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유명한 플레이어가 아버지와 함께?”
“미스터 정께선 과거 저희에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몇몇 플레이어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예우 차원에서의 경호를 행하고 있죠. 저는 그중 한 명입니다.”
저희 쪽이라니 무슨 쪽인가 생각하던 정시우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WPC?”
“아뇨. 그보다 전에 있던 일이죠. 미국 정부입니다.”
“와오.”
“자세한 얘기는 그분과 직접 나누시지요. 지금부터 모시겠습니다.”
히드로 공항이라고 시선의 주목도가 낮지는 않았다. 오히려 거물인 존 스미스가 합류해 대체 무슨 일인가 힐끗힐끗 돌아보는 사람들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존 스미스는 은근슬쩍 기세를 발산하여 사람들을 물리며 그들을 공항 지하주차장까지 안내했다.
“오.”
“아.”
그곳에 주차된 시커먼 리무진, 그 안에 정시우의 아버지 정시환이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깜짝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재회가 이루어졌다.
“오랜만이다, 아들.”
“오랜만이야, 아버지.”
정시환은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의 모습이었다. 정시우는 변함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쓴웃음이 나왔다. 지치고 초췌한 모습에 어깨라도 주물러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존 스미스가 운전석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수석의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요즘 많이 힘들지?”
“주무르지 마라. 가뜩이나 힘든 네 아빠 완전히 보내 버릴 셈이야?”
“괜찮아. 조금 아프고 나면 그다음은 시원해.”
“하지 마으가아아아아아아!”
처음부터 정시환에게는 아들의 호의를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그는 절묘한 힘 조절로 뭉친 어깨만 확실하게 풀어 버리는 아들의 마사지에 이내 기진맥진해졌다. 정말로 시원하다는 것이 가장 분했다.
“미스터 정도 아들 앞에선 꼼짝 못하시는군요.”
“왜 ‘물리’라는 단어를 빼먹는지 모르겠군, 존.”
정시환은 존 스미스에게 퉁명스레 대꾸한 후, 바짝 긴장해 있는 수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네가 아린이겠구나. 얘기는 많이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버님. 수아린이라고 해요. 올해로 스물셋이 됐어요.”
“듣던 대로 예쁘구나. 우리 시우는 복도 많지.”
“아뇨! 시우 오빠는…….”
그렇게 두 사람 간의 대화가 시작되자 용세하는 자연스레 소외되고 말았다. 그러나 용세하는 이미 그런 현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전혀 데미지를 받지 않았다. 정시우는 말없이 녀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존, 출발하게.”
“알겠습니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수아린과 대화를 마친 정시환은 흡족하게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두들겼다.
“정말 좋은 아이구나. 우리 아들이 전생에 은하계를 열 개 정도 구한 게 틀림없어.”
“예쁘고 착한 아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좋은 서포터이기도 해. 그리고 여기 세하도.”
“용세하입니다.”
“오, 그래. 자네도 있었지. 정말 반가워. 시우 때문에 자네까지 고생이 많아.”
차가 런던 시내를 달렸다. 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시우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수아린에 이어 용세하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정시환에게 물었다.
“그래서 많이 심각한 일인가 보지?”
“다짜고짜 본론으로 돌입하는구나.”
“아버지는 원래 굳이 먼 데까지 나 부르고 하는 성격 아니잖아.”
조금 쌀쌀맞게까지 들리는 그의 말에, 정시환은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녀석,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잖아. 말 참 섭섭하게 하는구나.”
“……하긴, 그도 그렇지.”
그들 부자의 사이는 원래 무척 좋았다. 어릴 적 정시우는 종종 아버지의 일터에 따라가기도 했고, 자신과는 다른 방면으로, 다른 방법으로, 하지만 활기에 넘치는 사회생활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시우가 플레이어가 되지 못해 점차로 자신감을 잃어 갈 때쯤 반대로 아버지의 일이 점점 바빠졌고, 자연스레 부자간의 접점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정시환은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시기가 정말 절묘했단 말이지…….’
하늘성의 대두와 함께 무척 바빠진 아버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기어이 WPC에 한자리 차지한 어머니.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한 가지 추론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 제법 예전부터 하늘성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단다. 미국에서 한 가지 요청을 받은 시점에서부터 말이야.”
그게 무엇일지도 정시우는 익히 예측할 수 있었다. 바로 던전에서의 달러 드롭과 관련된 일이리라.
“혹시 하늘성을 만든 사람과 접촉했다거나.”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일이 벌어졌으니 문제지. 담배 좀 피워도 괜찮을까, 얘들아?”
“네.”
“물론이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득해지는지, 정시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운전을 하던 존 스미스가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여 주었다.
“불…….”
“아, 화염의 신과 관련된 힘은 아닙니다. 마법이죠.”
정시우가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존 스미스가 다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설마 김하룡을 팼듯이 자신도 두들겨 패기라도 할 줄 알았던 것일까, 정시우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 정돈 알아요. 당신에게서 신의 힘이 전혀 안 느껴지거든요. 만약 날 숨길 만큼 대단한 능력자였으면 이미 지구는 끝장난 셈이고.”
“역시 그것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으시군요…….”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잘난 척 쩌는구나.”
“잘난 척이 아니라 실제로 잘난 거지.”
정시우는 코웃음을 치며 아버지에게 그다음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후우, 한숨과 함께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일들을 해야 했는지 굳이 입에 다 담지는 않으마.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테고…… 그것은 초자연적인 힘과 억지로부터 사회를 지키기 위한 경제인들의 공동 투쟁이었지.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만약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세 배만 되었어도 세계 경제는 끝장이 났을 거야.”
정시우는 아버지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생각해 보면 달러 드롭이 멈춘 시기가 플레이어들이 폭증한 시기와도 묘하게 겹쳤다.
하늘성을 만든 자는 실로 교묘한 설계를 했던 놈이구나, 정시우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미국 대통령과 하늘성 설계자 사이의 담합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
“자국 화폐 가치를 추락시키려는 자와 담합? 끔찍한 소리지. 미국 대통령들은 높은 단계의 던전들이 클리어될 때마다 비명을 내질렀어. 보다 많은 달러가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게 될 테니까 말이다.”
“기본 화폐 단위를 바꿔 보려는 시도는…… 아, 됐어. 말 안 해도 돼.”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가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정시우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어쨌든 이제 던전에서 더는 달러를 얻지 못하게 되며 다들 한시름 덜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과 비슷한 타이밍에 귀신같이 새로이 부상한 화폐 때문에 새로 골머리를 썩기 시작했지.”
“마석?”
“빙고.”
지상에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지구가 실시간으로 변모하면서 몬스터들의 부산물, 그중에서도 특히 마석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당장 B&Y는 마석을 활용하여 공간이동 게이트를 만들어 내기도 했고, 그들과 세계 유수 기업의 협력 하에 탄생한 인공섬 또한 마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 핵심이 되는 마석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지사, 누구나가 마석을 보다 안전하고 확실하게 거래할 수 있는 방법을 원했다. 결과 탄생한 것이 마석 거래소, 단언컨대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핫한 플레이스였다.
“그리고 달러 폭락을 진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을 인정받아, 네 애비가 세계 마석 거래소의 소장을 맡게 되었단다.”
“…….”
“…….”
정시우의 뺨을 향해 꽂히는 수아린과 용세하의 시선이 실로 따가웠다. 마석 거래소의 소장이라니, 듣기도 처음 들었지만 이건 뭐 거의 지금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 중 한 명이 아닌가!
“미국 거래소도 아니고.”
“미국 거래소도 총괄하고는 있다만, 세계 거래소가 본직이야. 그렇지, 얼마 전에 B&Y의 대표 되는 사람도 인사를 하러 왔었는데…….”
그 부분에서 정시환은 수아린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혹시 남자도 꼬시냐?”
“아버지 나랑 아웅다웅 한 번 해 볼래?”
“아니면 됐다. 시우 애비라는 말에 어찌나 좋아하며 아부를 하던지 깜짝 놀랐지 뭐냐.”
그것은 아마 에단 비셋 본인보다는 마리나 비셋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두 남매 모두 망상이 지나친 인물이다. 지금쯤 정시우와 마리나 사이에 나올 셋째 아이의 이름을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시계탑을 올려다보며 정시우가 다시 아버지를 독촉했다.
“그 거래소에서 뭔가 문제가 생긴 거지?”
“정확히는, 거래소에서 분석한 마석의 흐름에 문제가 있어. 그러니까…… 애비가 모르는 사이 네가 하늘성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여서 말이다, 우선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정시환이 뒤돌아 아들과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 어린 형용하기 힘든 감정에 정시우마저 움찔하게 될 정도였다.
그의 입이 열렸다. 상상치도 못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혹시…… 마석을, 먹는 사람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