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로그인-173화 (173/260)

# 173

173화.

“아버지랑 만나는 게 대체 몇 년 만이지.”

정시우는 아버지에게 포션을 챙겨 주기 위해 냉장고를 점검하며 심드렁하니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수아린이 입을 헤 벌리고 감탄했다.

“포션 엄청 많네요.”

“아버지 몸에 좋은 것들로만 챙겨 가려고.”

제법 오랜만에 연 냉장고 안에는(냉장고 자체도 크기가 업그레이드되어 어지간한 업소용 냉장고를 압도하는 수준이었고, 결정적으로 내부에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었다.) 온갖 종류의 중상급 포션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도 슬슬 냉장고 용량에 한계가 오는 것 같은데 이거. ……팔까?”

“파는 것도 좋지만 이 포션을 가공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모처럼 이쪽에 포션 제조사가 있는데.”

“아.”

말이 나온 김에 그는 냉장고 안에 있던 포션을 모조리 꺼내어 거주지역의 넬에게 가져가 보여 주었다. 넬은 근 700개에 달하는 양의 포션을 보며 입이 떡 벌어졌지만,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직 제 실력이 이 포션들을 강화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행히도 성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농축시키는 연금술만은 익히고 있어요.”

“그래, 그거 좋겠다.”

마리나가 즐겨 쓰는 농축 포션. 주로 젤 형태로 농축해 긴급 상황에 빠른 회복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녀 말로는 하늘성 던전에서 솔로잉으로 높은 스코어를 기록할 때마다 생성 권한이 생기며 그때 제단에 비드를 바쳐 얻을 수 있다고는 하는데, 정시우는 처음 던전에 들어갈 때부터 사제인 수아린과 함께한 덕에 비드를 소모하여 포션을 얻는다는 발상을 떠올린 적이 애초에 없는 인간이었다.

“힐링 포션은 둘째 치고 마나 포션은 농축해 놓으면 쓸 일이 많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중독 포션을 가루로 만들어 대규모로 뭉쳐 두었다가 살포한다거나 하면 효과를 극으로 끌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 폭발 포션을 농축하여 중독 포션과 합성하면, 독이 섞인 폭발로 고레벨 몬스터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아…… 지금 오빠가 인간이 해선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어요.”

“사람한테만 안 쓰면 되지, 걱정하지 마.”

물론 김하룡과 같은 인간이 나타난다면 장담은 할 수 없다.

“좋아. 그럼 이 포션들은 잘 부탁한다, 넬.”

“맡겨 주세요, 영주님! 이 정도로 고급 포션들을 다루는 건 처음이라…… 제 능력도 많이 향상될 것 같아요!”

그로써 냉장고는 성공적으로 비워 냈다. 정시우는 힐링 포션과 스태미나 포션만 집중적으로 챙겨 인벤토리에 넣는 것으로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너희는 그냥 휴식처에서 쉬고 있어도 되는데.”

“형님께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인데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 그으럼요.”

용세하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수아린은 명백히 긴장한 기색이었다. 화장을 잘 하지 않는 그녀가 모처럼 기합을 넣어 꾸민 것도 그렇고, 대충 어떤 마음으로 나섰는지 훤히 보였다.

“일단…….”

상견례 자리가 아니라고 혼을 낼까, 아니면 그냥 귀엽다고 쓰다듬어 줄까. 고민하던 정시우는 끝내 도톰하니 찬란하게 반짝이는 수아린의 입술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입술만 좀 지우고 와라.”

“여, 역시 과했을까요?”

“응. 넌 화장 안 해도 예뻐.”

“그 말 지금 들으면 기분 미묘해지거든요!”

그렇게 그들은 심해관에 들어가기에 앞서 뜻하지 않은 외유의 형식으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전투의 피로가 있기도 하고, 일부러라도 느긋이 움직이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비행기 티켓을 이용하기로 했다. 수아린은 인천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정시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어디에 살고 계세요?”

“지금은 영국.”

“지금은 영국…….”

“거주지를 밝힐 수는 없으니까 런던에서 보기로 했어. 히드로 공항까지 마중 나온다는데.”

“…….”

아버님 대체 무슨 일 하시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택시 기사가 듣는 지금 굳이 물어볼 일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정시우와 수아린, 용세하를 알아본 택시 기사가 조금이라도 말을 붙여 보려고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 지금은!

“헉, 정시우다.”

“수아린 하고 용세하도 있어.”

“수아린 예쁘다.”

“정시우가 부럽다. 죽었으면.”

“죽었으면.”

“꺅, 세하 오빠!”

“세하 오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공항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부터 사람들의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그들인데, 가뜩이나 지금은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결전모드 상태 수아린의 미모가 워낙에 찬란하여 도저히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이전에 왔을 때보다는 사람이 줄어든 것 같은데.”

“저번에 비행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아 비행기 한 대가 추락했다고 해요. 이제 무슨 일이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기가 온 거죠.”

그럼에도 사업이든 가족 관계이든 비행기를 타야 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은 항공사에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방법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각 항공사는 유사시 상황에 승객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페이를 지불하고 가장 좋은 비행기 좌석을 내어주며 그것을 승객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식으로, 플레이어와 일반인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결국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플레이어들은 일반인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그 이슈의 최고봉에 있는 것이 바로 정시우였다.

“저 사람들이 타는 비행기는 무조건 안전할 텐데.”

“어디로 가는 걸까?”

이래서야 조용히 움직이는 건 다 텄다. 정시우는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서 나가기 전에는 꼭 은신을 구사하자고 마음먹으며 일행을 이끌었다.

그들이 걷는 걸음걸음을 사람들이 주목했다. 원래 주목받는 일에 익숙했던 정시우조차 이골이 날 정도였다.

“오빠는 현재 세계 공식 플레이어 랭킹 1위잖아요. 전용기를 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예요.”

아마 그의 비서를 자처하는 세리아에게 말을 해 두었더라면 정말로 전용기를 끌고 나타났을 것이다. 번거로운 것이 싫어, 그리고 잠시나마 일상의 풍경을 느끼고 싶어 아버지가 준 티켓을 이용할 뿐…… 그런데 잠깐, 랭킹?

“그런 거 누가 정했냐.”

“WPC에서요.”

참고로 그것은 뉴욕 UN 본부에서 있었던 참사, 루이노스 리자드와의 전투 당시 그의 전투력을 기반으로 작성된 랭킹이었다.

고레벨 던전의 공략이 속속 진행되며 상위권 플레이어들의 선두 경쟁이 치열해지고, 보다 강력한 무기와 방어구들을 얻게 해 주는 거대 몬스터 레이드가 활성화되면서 이젠 슬슬 그 당시의 정시우와도 해 볼 만하다는 식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랭커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몇몇이 WPC에 랭킹 갱신을 요구하고 있고, 오빠가 별 반응을 하지 않으면 아마 랭킹을 정말로 뜯어고칠 거예요. 오빠한테 연락이 분명히 왔었을 텐데요.”

“그쪽 연락은 기본적으로 무시하고 있어. 대개 귀찮고 번거로운 일들뿐이거든!”

“자랑이 아니네요, 정말.”

설령 루이노스 리자드 전투 당시의 정시우를 뛰어넘었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당시의 정시우와 지금의 정시우 사이에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스무 개 정도 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겠지만, 정시우는 가만히 숨을 쉬는 것만으로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괴력과 용의 감각 덕에 매 순간순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그치들이 정말로 나보다 강하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 귀찮은 일들은 다 맡겨 버리게.”

지금 지구에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가 긍정적이라고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실제로 무수히 많은 신들이 지구를 노리고 있고, 하늘성이니 개미굴, 심해관과 같은 것은 그놈들로부터 인류를 어떻게든 지켜 내기 위한 누군가의 발악에 불과했다.

이런 때 정시우를 대신해 귀찮은 흑막들과 겨뤄 줄 강자가 나타나 준다면 정시우 입장에서는 그 이상 고마울 일이 없었다. 맘 편히 수련과 사냥에만 몰두하게 해 준다면 언젠가 반드시 신이라도 뛰어넘을 자신이 정시우에게는 있었다.

“그런데 아마 없겠지. 뿌이도 엘도 나를 인간의 대표쯤으로 여기는 모양이고…….”

“오빠의 자만심은 이미 경지에 이르러 있네요. 이쯤 되면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질 정도예요.”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냉정히 판단하고 계신 거죠. 아, 형님. 카운터가 저기에 있군요.”

출국심사를 마쳤을 때 비행기 시간까지는 아직 4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수아린은 그중 35분을 면세점에서의 화장품 쇼핑에 소모했다. 그가 쇼핑백을 한 아름 든 수아린을 지긋이 바라보자 수아린은 볼을 붉히며 변명하듯 말했다.

“요, 요즘은 몬스터 부산물을 이용해 피부를 좋게 하는 화장품도 많이 나왔더라구요.”

“레벨 오를 때마다 피부 뽀송뽀송해지는 애가 왜 그런데 신경을 쓰는 건지…….”

“항상 지금보다 더 예뻐지고 싶은 게 여자 마음이거든요.”

정시우는 굳이 뭐라 말을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어쭙잖게 칭찬이라도 해 줬다간 구체적으로 어디가 예쁘냐며 그를 귀찮게 굴 것이 뻔했다. 그는 작게 한숨만 내쉬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비행기를 놓치지 않고 탈 수는 있었다. 스튜어디스들은 톱스타라도 본 것처럼 꺅꺅거리며 정시우 일행을 반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시우 님. 목적지까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한국에서 영국까지는 비행시간만 따져 10시간이 넘는다. 이코노미 석에서도 못 버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편한 자리가 좋았다.

몬스터의 부산물과 지구의 변화된 광물들을 연구하여 조만간 보다 빠르고 단단한 비행기를 생산할 것이라는 얘기는 들려오고 있었지만, 지구가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한 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앞으로 수년은 지나야 그 비행기를 실제로 볼 수 있게 될 터였다.

“와, 퍼스트 클래스 되게 좋네요.”

“선배님, 샤워도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들뜨는군요.”

“비행기 처음 타 본 것처럼 왜 그래?”

정시우의 말에 그들이 머쓱하니 대꾸했다.

“실은 날개 달린 이후로 비행기를 거의 탄 적이 없어서…….”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아, 그래…….”

그런데 수아린은 뭔가를 확인하더니 엥,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자리가 서로 많이 떨어져 있네요. 칸막이도 있고…….”

“그게 비싼 좌석의 제일 좋은 점인데?”

“…….”

항공사마다, 비행기마다 다르지만, 정시우의 아버지가 고른 항공사는 개인 룸인가 의심될 만큼 독립된 공간이 인상적인 좌석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수아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몸집을 작게 되돌렸다. 그녀가 입은 모든 옷이 그녀와 함께 작아지는 모습이 언제 봐도 신기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정시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수아린이 단언했다.

“오랜만에 찾은 여유인데, 같이 얘기하며 가는 게 좋아요.”

“그럼 저도…….”

“용세하 씨는 푹 쉬어요.”

“넵.”

용세하는 또 눈치 없는 짓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사라졌다. 한편 수아린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팔랑팔랑 날아와 그의 어깨 위에 앉았다.

“오빠는 비행기 언제 처음 탔어요? 퍼스트 클래스 타 본 적 있어요?”

“음…… 뭐, 응. 다섯 살 때.”

“다섯 살!?”

수아린이 좋아한다면 상관없겠지. 평소에 하늘성, 개미굴과 관련된 주제 외에는 별로 얘기를 한 적도 없고……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그녀에게 어울려 주기로 했다.

런던의 히드로 공항까지 11시간, 비행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정시우보다는 수아린에게 있어 포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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