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화.
휴식처로 돌아온 정시우는 일단 일행을 쉬게 하고는 케이나만 대동하고 거주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케이나에게 있어서의 휴식은 베토를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았다.
“아, 주인님! 누나!”
[베토,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구나.]
“몇 년씩 자리 비운 것도 아니고 매번 전쟁터에서 귀환한 병사 같은 분위기 좀 잡지 마.”
베토는 일찍이 정시우가 33개조로 편성해 세계 각지로 보낸 유령들이 물어오는 마석들을 재료로 열심히 군룡포에 들어갈 탄환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군룡포가 나설 일이 그리 없다 보니 탄환만 쌓여 가는 중이었다.
“방어구를 만들어 줬으면 해. 소모품이어도 되니까 강력한 한 방을 막아 낼 수 있는 녀석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소모성 결계를 발동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적합하겠네요.”
제일의 대장장이와 마도사를 부모로 둔 덕일까, 베토는 병장기와 아티팩트, 마법에 빠삭했다. 정시우의 말 몇 마디만 듣고도 그가 원하는 무구의 견적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로 착수할게요, 주인님.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좋아.”
정시우는 베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대장간을 나왔다. 언제나처럼 요정상인 루타가 나타나 귀찮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의 모습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에리우 님으로부터의 전언이다, 찌.]
그 대신 모래호랑이 에리우의 부하인 사리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부정리가 끝나간다, 찌. 곧 도움을 필요로 할 일이 생겨날 것 같다, 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 찌.]
“그래. 마침 내게도 너희를 더 확실하게 도와줄 방법이 생겨난 참이야.”
[찌?]
정시우가 소울 포스의 각인이 새겨진 왼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무수한 숫자의 유령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평균 레벨 100에 달하는 유령 수만 명의 등장에 사리테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더 안 보여 줘도 된다, 찌.]
“죽여도 죽지 않는 이 녀석들이면 병력으로는 충분하겠지. 아, 강자가 필요한 상황에는 물론 내가 직접 도와줄 거야.”
[괴물이다, 찌.]
“나도 충분히 알고 있어, 찌.”
사리테는 벌벌 떨며 돌아갔다. 보다 정확히는 돌아가려다가 정시우의 손에 붙잡혀 시몬의 농사일을 돕는 처지가 되었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일까, 찌…….]
“아, 영주님 오셨군요.”
“오랜만이…… 헉.”
사리테와 함께 시몬의 집에 들른 정시우는 시몬의 부인, 모나의 배가 남산만 하게 부풀어 오른 것을 보며 기겁했다.
“일어나지 말고 쉬어. 무리하지 말고.”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보면 그랬었다. 이 거주지역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부인을 걱정하는 시몬의 얼굴을 보며 정시우는 임산부의 몸에 좋은 것이라도 챙겨다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너도 부지런히 도와라.”
[찌이…….]
그것으로 거주지역에서의 볼일은 대강 끝났다. 루타를 찾아갈까도 했지만 그녀가 정시우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더라면 대장간에서 얼쩡거리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어차피 심해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호수가 그녀의 비밀상점 곁에 있으니, 그곳에 들어가기 전 또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케이나, 너는 왜 베토랑 있지 않고 왜 나를 따라다니고 있냐.”
[주인님, 뭔가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은가.]
“잊고 있는 것?”
정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혹시 케이나를 섭섭하게 할 만한 짓이라도 했단 말인가? 생각에 빠지는 그에게 케이나가 보랏빛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그쳤다.
[주인님의 스킬에 변화가 있지 않은가, 그 말이다.]
“음…… 아.”
정시우는 그제야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깨달았다. 정시우의 스킬 가운데 케이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소울 포스 스킬밖에 없다. 그리고 그 소울 포스 스킬은 이번에 10레벨로 오르며 확실히 새로운 능력을 각성했고…….
“나 참, 진즉 말로 했으면 될 걸.”
[크흠.]
새로운 능력이란 바로 군단장 선임이다. 유령의 숫자가 군단 규모로 늘어나 정시우 혼자 컨트롤하기 힘들어지면서, 그를 대신하여 유령들을 컨트롤하고 그런 만큼 유령들로부터 영력을 얻어 본신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유령의 군단장!
케이나는 지금 물론 드래곤나이트의 육신을 갖추고 있지만, 그 근본이 되는 혼은 어디까지나 소울 포스에 종속되어 있는 만큼 얼마든지 군단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대놓고 부탁하기는 부끄러웠던 거야? 너도 귀여운 면이 있구나.”
[그, 그야 내게 군단장의 자격이 있음을 판단하는 것은 주인님이 아니던가…….]
케이나는 정시우보다는 못해도 강함에 대한 열망을 충분히 지니고 있고, 정시우보다도 민감하게 군단장이라는 말에 반응하고 있을 터였다.
그는 여전히 반짝이는 케이나의 눈을 마주하며 어깨를 으쓱하곤 피식, 웃어 버리며 손을 내밀었다. 소울 포스의 각인이 새겨진 왼손이었다.
“좋아, 비록 시간은 얼마 안 되었지만 네가 나를 위해 헌신했던 것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너를 군단장으로 임명해 주지.”
[영광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케이나가 자연스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었다. 정시우는 그녀의 맨 이마에 손바닥을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의 손등에 새겨진 각인이 케이나의 이마에도 똑같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가 부리는 모든 유령으로부터 조금씩 영력이 뽑혀 나와 케이나에게 전달되며, 순식간에 그녀의 레벨을 10 가까이 상승시키기까지 했다.
[크으으음……!]
“이 정돈 버틸 수 있지?”
[당연하지…… 않은가!]
단순히 레벨이 오른 것뿐 아니라 그녀의 스킬과 마력에도 막대한 변화가 닥쳐와, 케이나는 실로 오랜만에 겪는 영육의 급격한 진화에 고통을 느껴야 했다.
물론 고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군단장의 직위를 상징하는 소울 포스의 각인이 그녀의 이마에 완전히 자리 잡고, 정시우의 손등에서 빛을 발하던 각인 또한 진정했다. 직위 수여가 완벽히 끝난 것이다.
[군단장의 자격에 합당한 이를 골라 군단장의 위에 앉혔습니다. 모든 유령을 통솔하기에 마땅한 능력을 갖춘 군단장이 앞으로 당신을 도와 유령들을 최강의 군단으로 키워 낼 것입니다.]
[소울 포스 스킬이 Lv11이 되었습니다. 영력을 보다 자연스레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소울 포스 스킬이 또 성장했다! 하긴, 케이나는 레벨로만 따지면 정시우를 압도하는 수준이니 이런 메시지들이 나열되는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없지. 정시우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실은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사정이 숨어 있었다.
군단장이란 유령의 주인과 긴밀히 연결되는 특별한 존재다. 둘의 연결이 깊어지는 과정에서 그녀가 살아오며, 그리고 언데드로 지내며 쌓은 무수한 세월의 기록과 경험이 정시우에게도 간접적으로나마 전달된 것!
그 결과로서 소울 포스 스킬 자체를 보다 향상시키고, 유령들의 수준을 높이며, 마지막으로 정시우의 영력 컨트롤 능력마저 키워 버린 것이다.
[굉장하군. 주인님은 이런 부담감을 계속 지고 버텨 온 것인가?]
한편 케이나 또한 정시우와 더불어 유령 군단을 감당하게 되며 순간이나마 머리가 지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무식한 줄만 알았던 주인의 의외의 면모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시우는 놀라며 감탄하는 케이나를 향해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부담이 오게 된 지는 얼마 안 됐거든…… 그보다, 너를 군단장으로 뽑았으니 이젠 가능할 것 같다.”
[무엇이? 아…… 설마?]
“그래.”
정시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각인 안에 잠들어 있던 32,154구의 유령이 전부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주인님!]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굉장히 넓은 곳이구나!]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주인님!]
“일단.”
정시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선언했다.
“100명씩 헤쳐 모여.”
[이 무식한 주인님 같으니…….]
유령들은 순식간에 깍두기 54명이 포함된 321개 조를 이루어 정시우와 케이나의 눈앞에 정렬했다.
이미 바깥에서 활동하며 레벨을 올리고 있는 33개 조에 비하면 전체적인 수준이 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평균 레벨 100을 달성하고 있는 만큼 어디 가서 픽 죽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는 지금부터 지구 전역으로 퍼져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마석을 수거해 오게 된다. 그 와중에 다른 신의 파편을 발견하게 되면 재깍재깍 내게 보고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지휘관이 한 명 늘어 통솔력도 높아진 것일까, 유령들은 조를 짠 것만큼이나 신속한 속도로 출동했다. 321무리로 흩어져 지상으로 뛰쳐나가는 통에 정시우와 케이나는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휘청거려야 했다.
[이건…… 적응하기까지가 제법 힘들겠군.]
“바로 심해관에 가려고 했는데 역시 무리겠어. 신체 점검이나 하면서 괴력 스킬 수련해야겠네.”
[그 부분에서 쉰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놀랍다.]
케이나는 지금 이 순간도 외부로 뛰쳐나간 유령들로부터 미처 차단하지 못하는 정보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군단장이 되며 능력이 향상된 만큼 짊어져야 하는 짐도 확실한 법. 그래도 이것에 적응되면 군단장으로서 또 다른 능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되리라. 어쨌든 그녀의 주군을 도와 다양하게 성장할 방법을 얻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케이나였다.
[하지만…… 군단장이 되고서야 소울 포스의 진정한 힘을 깨닫게 되었다. 유령들이 성장을 거듭하는 만큼 주인님도 계속해서 성장하겠지. 그 영력은 실시간으로 불어나고 있을 터이다.]
“그리고 세트나크에게서 비롯된 능력이지. 세트나크 놈이 얼마나 강할지 생각해 보면 진저리가 쳐질 뿐이야.”
더욱이 힘의 신 헥토는 그런 세트나크와 비견될 힘을 갖추고 있다. 두 신의 공통점이라면 자신의 힘을 보다 효과적으로 불리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 어디 그 두 신만 그렇겠는가. 다른 신들 중에도 헥토와 세트나크에 비견될 만한 힘을 지닌 이들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더욱 빠르게 강해져야지. 놈들을 꺾기 위해선…….”
[주인님은 정말 대단하군. 자신의 힘에 도취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신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발전 욕구를 키우다니. 보통 인간은…… 아니, 제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그렇게 서슴없이 신을 뛰어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케이나는 과거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만나고 겪어 온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 인간은 신들의 거대한 힘을 느낀 순간 굴복하거나, 외면하게 마련이었으니까.
“그게 더 편할지도 모르지. 이 성격 탓에 나도 여태 많이 피곤했으니까.”
[자각은 하고 있으니 다행이군.]
“하지만 원래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 어쩔 수가 없어. 그리고 누가 내 머리 위에 있는 것도 짜증나고 말이지.”
그는 굉장히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내 머리 위에 있을 수 있는 건 우리 엄마뿐이야.”
[거기서 또 어머니께는 굽히는 모습이 실로 귀엽군.]
“시끄러.”
그는 케이나의 말에 흥, 코웃음을 쳐 준 후 그녀를 베토와 함께 쉬도록 보냈다. 그리곤 오랜만에 부모님께 전화나 한 통 할까 생각하며 휴식처로 복귀했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아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예상외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