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화.
정시우의 던전에서의 비드 획득률은 경이로울 만큼 높다.
몬스터의 남은 체력보다 많은 데미지를 입혀 죽이는 오버킬을 할 때에 비드 드롭율이 높아지는데, 정시우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오버킬, 그것도 몬스터의 남은 체력과 마나를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의 오버킬을 달성해 버리기 때문이다.
“한때 던전 진행에 있어서의 체력과 마력 배분의 필요성을 오빠에게 진지하게 설명했던 적도 있었죠.”
“배분 말입니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용세하를 보며 수아린도 애매하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스태미나 배분, 그것이 플레이어의 필수 교양이라고 여겼던 시절이 분명 수아린에게도 있었더랬다. 물론 지금은 잊어버린 지 한참 된 일이지만 말이다.
체력과 마력 조절은 개뿔, 정시우는 이제 항상 괴력을 유지하며 던전을 싹 밀어 버리는 탱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버킬의 정도도 터무니없어, 자연히 획득 비드의 양도 터무니없었다.
“최저 레벨 250짜리 몬스터들의 비드가 수만 개…….”
이전 통합 던전에서의 수확도 실로 굉장했지만, 사실 던전을 채우고 있던 절대다수의 몬스터들은 통합 과정에서 일그러지고 이래저래 안 좋은 의미로 짬뽕이 된 허접한 혼종이었다.
후반부에 가서야 메티모아의 영향을 짙게 받은 엘리트 키메라들이 나타나 양질의 비드를 대거 확보하기는 했지만, 통합 과정에서 헥토의 이름으로 통일되어 순수한 강함을 획득한 이번 던전과는 비교하기도 민망했다.
“방어구가 필요해요.”
실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정시우도 그것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무기 쪽은 보강할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보다 레벨이 100이 더 올라도 무기를 갈아 치울 필요는 없다. 마신의 징벌은 과연 플레이어들이 하늘성에서 얻는 것이 가능은 할까, 생각이 들 만큼 터무니없는 보물이었으니까.
더욱이 이 망치는 신의 힘을 잡아먹고 성장하는 무기인지라 앞으로 더 강해지기까지 할 예정이었다.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지.’
조금만 솔직해져 볼까. 정시우는 오늘 정말 죽음을 실감했다. 카오스 스케일이 없었더라면 확실하게 죽었을 것이다.
카오스 스케일은 정시우 본인의 단련의 결과가 아닌, 수중던전의 출입권을 얻게 되며 얻은 일종의 보상의 개념이다. 중간에 일이 어긋나 카오스 스케일을 얻지 못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고, 그랬으면 정시우는 눈에 보이는 강함을 추구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끝을 맞이했을 터이다.
“아린이 말마따나 예상치 못한 사태는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나겠지…… 그러니 그래, 방어구가 필요해.”
끊임없이 미지에 도전하며 강해지기 위해선, 만약의 사태에 자신의 목숨을 붙들어 줄 방어구의 도움이 절실했다. 여태껏 제 몸뚱이 하나 믿고 달려온 정시우가 처음으로 보신을 신경 쓰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면 비드를 나눠서 바쳐 볼까요. 이 많은 비드를 한꺼번에 바칠 수도 없을 테고. 종합 성능은 떨어져도, 방어구를 얻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여러 차례 시도하는 게 역시 최고죠.”
“그러면 몇 개씩이 좋을까.”
“으음…….”
수아린은 고민하며 정시우의 위아래를 훑었다. 카오스 스케일을 해제한 지금의 정시우는 거의 반 나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래 방어구를 입고 있긴 했지만 이번 던전에서 드디어 갈기갈기 찢어져 거의 소멸했고, 이것들은 회복을 시키려 해도 더는 무리일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점프력을 높여 주는 각반은 정시우가 제법 아꼈었는데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한 방어구를 얻어 봤자 오빠에게 도움이 되진 않겠죠.”
정시우에게 위협이 될 만한 공격을 가해 오는 상대에게 B랭크의 무구로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S랭크의 무구는 바라지도 않으니 최소 A랭크,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본다면 A+랭크의 방어구가 있었으면 했다.
그들이 바라는 무구의 랭크와, 이 던전에서 얻은 비드의 질과 양으로 대충 계산을 때려 본다면.
“최소 20분의 1…… 욕심을 부려 본다면 10분의 1까지는 바쳐야 납득 가능한 성능의 무구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것만으로 돼? 너무 적지 않아?”
“비드의 총량이 너무 많은 것뿐이에요.”
비드를 20분의 1로 나누어 스무 번 시도하느냐, 10분의 1로 나누어 열 번 시도하느냐. 정시우는 후자를 택해 곧장 시행에 옮겼다.
그러나 아무래도 정시우는 무기의 신에게 축복이라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오, A++랭크의 화염대검! 정말 대단한 성능입니다!”
“필요 없어.”
“A+랭크의 라운드실드네요.”
“나한테 방패 쓸 틈이 어딨냐. 이건 세하 너 해라.”
[이건 뭐지? 음? A+++랭크의 돌격용 랜스가 아닌가.]
“A+++랭크의 무기가 또 나왔습니다! 오오오, 철편 채찍!”
총 다섯 번 시도한 결과 방패 하나를 빼놓고 전부 무기만 튀어나와, 방패와 랜스는 용세하에게, 대검과 채찍, 투척용 단검 세트는 케이나에게 돌아갔다.
물론 일행이 강해지면 정시우로서도 좋은 일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원하는 것은 정시우에게 필요한 방어구가 아닌가! 이쯤 되자 정시우의 머릿속에 있는 스위치가 딸깍 올라갔다.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 이거지.”
“아, 위험하다.”
수아린이 말리기 직전, 정시우가 남은 비드의 반쯤을 단숨에 제단에 털어 버렸다. 무려 기갑 오크 만부장의 비드가 포함된 대량의 비드가 제단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며 하나로 융합되는가 싶더니…… 끝내 하나의 지팡이가 되었다.
[전장의 전투성녀]
[랭크 ? A+++]
[공격력 ? 2,500 ? 4,000]
[숙련도 ? 0/20,000]
[속성 ? 1. 신성 A++]
[옵션 ? 1. 모든 신성 마법에 전투력 강화 효과 추가 2. ???]
[스스로 전장의 선두에 서, 모든 아군을 보듬으며 승리를 거두는 자의 지팡이.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신념이 조화를 이루어 탄생한 역작.]
“…….”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서도 단연 훌륭한 물건이로군. 실로 걸작이다.]
“정말 걸작이긴 한데…….”
정시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게 대체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탄생했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 제가 추측해 보건대…….”
“아냐, 추측하지 마.”
[핵심이 되는 것은 기갑 오크의 특성, 그리고 헥토의 힘이로군. 생체와 기계라는 상반된 개념이 전투와 치유라는 개념으로 치환되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지팡이인 것이다! 물론 대체 어째서 개념이 치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그럴듯하게 말해 봤자 정시우의 분노가 증폭될 뿐이었다. 그는 단지 방어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왜!
끝내 그는 패잔병처럼 너덜너덜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수아린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당연히 수아린이 리타이어 이전에 쓰던 지팡이보다 훨씬 좋은 성능의 무구였다.
“자, 잘 쓸게요. 이것만 있으면 오빠를 더욱 강하게 해 줄 수 있겠네요!”
“기쁜 일이긴 한데 순순히 기뻐할 수가 없어…….”
그는 한숨을 쉬며 남은 비드를 둘러보았다. 나눈다면 두 번, 혹은 세 번까진 시도를 해 볼 수 있겠지만 이쯤 되니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정시우가 자신에게 맞는 방어구를 얻지 못하는 운명일 뿐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런데 오빠, 이 예쁜 보석은 뭐예요?”
“아, 이거.”
수아린이 가리킨 것은 실로 아름답게 가공되어, 어둡게 빛을 반사하는 흑색의 다이아몬드. 헥토의 강림체를 부수고 놈의 비드와 함께 획득한 보상이었다. 회수는 즉각 했지만 직후 던전 클리어로 인해 정신이 없어지는 바람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옵션을 확인하지 않았었지.”
단순히 보석일 가능성도 있지만, 어쩌면 이전 통합 던전에서 얻었던 흑요의 월석처럼 제단에 비드와 함께 바쳐 특정한 성능의 무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해 주는 특수한 아티팩트일지도 모른다.
심상치 않은 마력을 뿜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확실하리라. 정시우는 짙은 기대를 품고 보석의 정보를 열람했다.
[흑룡의 역린]
[랭크 ? SS+]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먼 과거 몇몇 세상에만 모습을 나타냈다고 전해지는 드래곤, 그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블랙 드래곤의 역린의 일부.
지나치게 오랜 세월이 흐르며 변질을 겪고 떨어져 나와 힘이 많이 소실되었지만, 그럼에도 공격성이 높으며 짙은 마력을 품고 있어 무기의 재료로서는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음?”
정시우는 아티팩트의 정보를 확인하고는 잠시 눈을 비볐다. 일단 랭크가 생전 처음 보는 SS랭크에 이르러 있다는 점은 필사적으로 무시한다고 쳐도, 아무리 봐도 그냥 흑색의 다이아몬드인데 이게 드래곤의 비늘이라니?
더구나 드래곤은 또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정시우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썩 마음에 드는 가설은 아니었다.
“헥토 그 새끼, 아까 나를 동포라고 불렀는데…….”
[그런가, 헥토는 드래곤 출신의 신이었구나!]
케이나가 정시우 대신 결론을 냈다. 오늘따라 이 녀석이 묘하게 적극적이다.
[그리고 주인님을 동포라고 불렀다는 것은, 어쩌면 그 무식한 힘과 강탈의 능력은 고대 드래곤 종족의 전유물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난 인간이다.”
[새삼스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주인님. 뭐하면 내 정보를 다시 열람해 보겠는가?]
“아니, 됐어…….”
정시우는 정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케이나에게 알밤을 한 대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정황이 모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사실이 가장 분했다.
“그 문제는 차치하고, 어쨌든 이건 지금 의미가 없어.”
그렇다. 중요한 것은 지금 정시우에게 방어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다이아몬드, 흑룡의 역린은 방어구가 아니라 무기의 재료.
설령 이 보석을 제단에 바쳐 아티팩트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 결과물은 방어구가 아니라 무기일 것이다.
“그러면 이건 베토에게 말해서 마신의 징벌을 강화하는 데 쓸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주인님.]
케이나가 또다시 태클을 걸었다.
[베토는 물론 훌륭한 마도 대장장이이지만, 아무리 그 아이가 대단하다 해도 아직 SS랭크의 물건을 가공하는 재주는 없다.]
“그러면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데?”
[20년…… 우리 베토는 불세출의 천재이니 10년 만에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
케이나의 무한한 동생사랑 필터를 거쳐도 10년이라니. 좌절하는 정시우에게 수아린이 제안했다.
“오빠, 어차피 방어구가 나올지 무기가 나올지 알 수도 없는데 이쯤에서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요? 더욱이 제 지팡이만 봐도 전투와 치유라는 성질을 한 데 섞어 놨잖아요. 어쩌면 무기와 방어구의 특성이 결합된 아티팩트가 나올지도 몰라요!”
“헥토와 기갑 오크의 특성을 믿어 보라 이거지…….”
마지막 남은 비드 더미, 확실히 그 안에는 방금 그가 필사의 전투를 벌였던 적, 헥토의 강림체의 비드가 포함되어 있다.
헥토의 힘은 물론 기갑 오크 군단장의 힘까지도 품고 있는 절정의 비드. 그것과 흑룡의 역린이 결합된다면 어쩌면, 어쩌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불러올지도 몰랐다.
“좋아. 해 보자고.”
사실은 이제 더 신경 쓰기가 귀찮아졌다. 정시우는 이것저것 다 내려놓은 표정으로 모든 비드와 흑룡의 역린을 냅다 제단에 던졌다. 그 순간 검게 물든 빛이 제단에서 솟구쳐 공동을 가득 채웠다. 이대로 마신이 강림한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내가 되게 사악한 짓을 벌이고 있는 것 같은 비주얼인데.”
“괜히 저까지 불길해지니까 그런 말 하지 마요.”
그들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검은 빛 무리가 이내 그리 크지 않은 아티팩트의 형태로 형상화되어, 깔끔하게 그 안으로 흡수되었다. 마나 한 톨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빛을 전부 집어삼켜, 끝내 제 정체를 드러낸다!
“엥.”
“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시우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완갑(腕甲, Vambrace)이잖아!”
절반 이하…… 아니, 대략 10분의 1 규모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