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화.
정시우는 한없이 거대한 두 개의 신전 기둥 사이를 꽉 메우고 있는 돌문의 존재와, 그 주위 풍경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요정상인은 없네.”
“섭섭하면 부르시죠.”
“아니, 됐어.”
쓸데없이 정시우가 가는 곳마다 끼어들며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요정상인 루타를 굳이 불러내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전황이 불리하면 모를까 보스 룸 앞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죽음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이번 던전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보통 이렇게 방심하고 들어가면 쓴맛을 보는 게 흔한 패턴이란 말이지…….”
“그렇죠, 오빠가 그런 말 안 하면 섭섭하죠.”
이 던전을 지나오며, 정시우는 어째서 기갑 오크들이 헥토를 그렇게까지 믿고 따르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헥토는 모든 것의 개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힘으로 삼아 버리는 폭력적인 신이고, 기갑 오크들은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스스로를 강화한 변종들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서로 어긋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실제로 마주한 그들의 능력도 그러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이…….”
[주인님,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떤가.]
정시우 못지않게 이 던전을 기이하게 여기고 있던?강적과 별로 마주하지 못해 짜증이 나 있던?케이나가 이런 말을 꺼냈다.
[어쩌면, 기갑 오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헥토를 믿는 것은 아닐까.]
“음?”
[기갑 오크들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티팩트의 힘과 자신의 육신의 부조화를, 헥토의 힘 아래에 하나로 합쳐 내고 싶어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시우는 그것이 제법 설득력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나, 여태껏 보아 온 놈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기계장치의 폭주며, 액티브 스킬이 발현하는 일들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 안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보스 몬스터가 그렇다면 어떨까.]
“그러면…… 가위바위보!”
[음!?]
정시우는 생각을 잇다 말고 번개같이 한 손을 내밀었다. 케이나가 당황하여 주먹을 내밀었다. 승자는 보를 낸 정시우였다.
“좋아, 만약 그렇다면 놈은 내가 상대하지.”
[……굉장히 얄밉군.]
똑같이 강자에 목말라 있는 처지에 이렇게 기습적으로 전투권을 챙겨 가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케이나였으나 그렇다고 주인을 이겨 먹을 수도 없었다.
수련을 할 때 실컷 괴롭히자는 다짐과 함께 뒤로 물러나는 케이나,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앞서 나가는 정시우를 보며 용세하는 그저 웃었다.
“가끔씩 형님을 보면…… 목숨이 아홉 개는 되는 것 같습니다.”
“목숨이 하나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거야.”
얼핏 심오하게도 들리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역시 개소리인 말을 지껄이며 정시우가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보스에 도전할 깜냥이 안 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용세하는 미니 사이즈로 돌아와 그의 품으로 복귀했고, 수아린은 정시우에게 축복을 걸었다. 던전에 들어와 처음으로 받는 축복이었다.
마지막으로 케이나는 미련 가득한 눈으로(투구를 쓰고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보스룸 입구를 노려보다가는 후, 힘없이 중얼거렸다.
[보스가 둘일 수도 있겠지.]
“그럼 더 박진감 넘치는 전투가 되겠지.”
[죽었다 깨어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단 뜻이로군, 주인님…….]
정시우는 마신의 징벌을 쥐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보스룸을 미련 없이 열어젖히며, 용의 감각을 확장시켜 방의 넓이, 보스의 위치와 정보를 최대한 짧은 순간 안에 파악했다.
일단, 보스는 한 마리였다. 기갑 오크였으며, 크기도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정시우와 비슷한 체구여서 그를 놀라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던전에 속박되어 있는 이상 보스 룸이 열리고 3초 동안 움직이지 못한다는 절대명제를 어길 수는 없다.
최근 들어 들어갔던 몇 개인가의 던전에서 보스가 직접 보스 룸 문을 열고 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있긴 했지만, 그런 일이 매번 일어났다간 플레이어 노릇도 못해 먹는다. 한 번만 더 일어나면 파업을 선언하리라 개인적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행히도 지금은 아닌 모양이다.
‘좋아, 날 인식했지만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어!’
이번 던전은 헥토의 능력에 의해 개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부분에서는 던전의 특징에 종속되는 부분이 있었고,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시우가 용의 감각을 활성화해 놈의 겉모습과 내부 육신이 품은 잠재력을 파악하는 그 순간 놈 또한 정시우를 알아챘지만, 눈동자조차 그를 향해 돌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아아아아아아아!”
그 사실을 파악한 정시우는 곧장 크루얼 차지를 발동하여 놈에게 돌진했다. 단 0.01초도 낭비할 시간은 없다. 최단시간에 놈에게 도달해 최강의 공격을 먹이기 위해, 전신의 신경을 집중하며 마나와 육신의 조화를 꿈꾸었다.
보스 룸 또한 여태껏 나타났던 광대한 신전의 모습에 비해선 그리 넓지 않아, 1초를 수십 개로 쪼개어 만들어진 한 프레임 안에 놈의 눈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한순간 머릿속으로 바둑의 경우의 수처럼 무한한 움직임의 가능성이 정립되어……!
“카하!”
그가 내민 망치, 마신의 징벌의 충격이 한 점에 응축되어 폭발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표적을 대상으로 삼아 펼쳐지는 크루얼 차지와 타고난 괴력, 강타의 조화는 실로 끔찍하여, 순간적으로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만큼 터무니없는 파괴력을 낳았다. 함께한 일행이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크핫!]
그러나 놀랍게도 놈은 그의 공격에 반응했다. 3초 동안 움직이지 못한다는 룰을 어기지는 못해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반응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놈이 지닌 방어형 패시브 스킬의 효과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 패시브 스킬이 문제였다.
“뭐?”
[큭…… 카악!]
정시우의 공격을 완전히 흘려 내지 못한 기갑 오크가 비명과 함께 입에서 피를 토해 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도 정시우는 충분히 놀라웠다. 방금 자신이 보았던 광경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케이나가 옳았을지도 몰라.’
그의 망치가 놈의 머리통을 부수려던 바로 그 순간, 놈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기계장치가 타격에 반응하여 부풀어 오르는 것을 정시우는 똑똑히 목격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여태껏 이 던전에서 조우한 기갑 오크 중에는 방어적인 성향의 기계장치를 탑재하고 나타난 놈들도 많았으니까.
문제는 그것이 지나치게 유연하며, 강력하고, 단단하다는 점이었다. 절반의 파괴만으로 정시우의 기습 공격을 막아 낼 만큼!
“흐!”
물론 결과가 놀랍다 뿐이지 그런 가능성도 충분히 상정하고 있었던 정시우는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하면서도 몸은 분주히 놀려 제2, 제3의 타격을 가했다.
허공중에서 자신의 타격으로 인한 반동까지 이용해 몸을 몇 번이고 뒤집으며 해머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으나, 더욱 놀라운 것은 반밖에 남지 않은 방어 장치로 끊임없이 그의 공격을 막아 내는 기계장치였다.
‘이래서야 3초가 의미가 없잖아. 설마 움직이지 못하는 육신 대신 기계장치를 조종하다니 반칙 아냐!?’
대체 누가 반칙을 저지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3초의 시간이 기어이 깔끔하게 흘러, 놈이 몸의 자유를 되찾았다.
[쥐새끼 같은 놈이!]
그 순간 정시우의 해머가 놈에게 직격했을 때와 비슷한 파괴음이 울려 퍼졌다. 놈의 복부에서 솟구친 거대한 기계팔이 순식간에 정시우의 몸통을 쳐 날린 것!
용의 감각으로 그 움직임을 읽어 내는 것까지는 성공한 정시우였으나 하필 놈에게 타격을 가하던 타이밍이었기에 완전히 피해 낼 수는 없었고, 끝내 놈의 공격에 살짝 스쳐 맞은 것만으로 허공에 붕 떠오르고 말았다.
“칵!”
[칫, 몸뚱이가 더럽게 단단하군……!]
피격 순간 카오스 스케일을 발동했음에도 온몸의 장기가 쏠리는 것만 같은 역겨운 통증이 일었다. 실로 오랜만의 충격이었다.
[주인님!]
“아니…… 내가 한다!”
그러나 조금 전의 기갑 오크가 그러했듯 피를 토해 내면서도 정시우의 입가에는 맑은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놈을 기습하지 않고 만전으로 붙었어도 괜찮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건 진짜야!”
[헥토 님께서 이르시는구나, 너 또한 진짜라고. 하지만 방금 네가 보인, 그 전사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기습이 나를 의심케 한다!]
기갑 오크가 그를 성토하며 허공으로 몸을 따라 날렸다. 분명 마나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한 기계장치를 유지하고 움직이려면 그야 놈의 육신이 생성해내는 마나를 전부 쏟아붓지 않고선 불가능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이동속도는 액티브 스킬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 만큼 빨랐다. 정시우가 허공에서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 때에는 이미 놈이 자신의 팔을 변화시켜 만들어 낸 예리한 전투 도끼가 그의 몸을 이등분하기 직전이었다.
[전사는 준비되지 않은 자를 공격하지 않는다! 너는 실격이다!]
“아우, 어쩐지 느그 부하들은 참된 전사더라 그지?”
[죽어라!]
곧 죽어도 말로는 지지 않는 정시우의 대꾸에 놈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도끼를 휘둘러 왔다.
그러나 전투 도끼가 그려내는 섬뜩하고 치밀한 궤적에 그대로 반 토막이 날 것 같았던 정시우는, 다음 순간 전신을 순환하는 전투질주를 극성으로 활성화하여 허공에서 자신의 몸을 옆으로 쳐 날리는 것으로 놈의 공격을 깔끔하게 피해 냈다.
“하!”
[설마 방금 마나로 육신을 이끈 것인가!]
[잔재주를!]
물론 정시우가 방금 보인 회피 동작은 케이나의 세련된 스킬과는 많이 달랐다.
케이나의 스킬이 마나와 육체를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다루어 자연스럽게 이끌었다면, 정시우는 단지 전투질주에 무식하게 마나를 쏟아부어 원래 불가능해야 할 터인 육신의 움직임을 마나를 더해 현실로 이끌어 낸 셈이었으니까.
[무식한 낭비, 무식한 운용…… 그것은 전사는커녕 인간의 방식조차 아니구나!]
“개소리를.”
간단히 말하면 당겨서 여는 문을 밀어서 열어 버린 셈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초월적인 육체를 가진 정시우에게는 어쩌면 그 방식이 더욱 잘 어울릴는지도 모른다.
“전사니 뭐니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를 어떻게 부르든 알 바 아냐.”
정시우는 바닥에 무리 없이 착지하여 해머를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분명 많은 양의 마나를 소모해 공격하고, 끔찍한 공격을 막아 내느라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양의 마나를 소모했음에도 지금 그의 전신에는 마나가 끓어넘치고 있었다.
용의 감각으로 세상과 교류하며 받아들이는 압도적인 양의 마나, 그것이 실시간으로 증폭되며 그의 전신을 강화하고 있기까지 했다.
“덤벼라. 내가 생각하는 나를 네 몸에 새겨 주지.”
“어우, 오그라들어.”
[잘도 거창한 헛소리를……!]
정시우와 비슷한, 오크로서는 턱없이 작은 체구 안에 무시무시한 힘을 감춘 기갑 오크가 그의 위치를 포착하는 즉시 아까와 같은 폭발적인 가속으로 그를 덮쳐들었지만 정시우는 아까처럼 맥없이 놈에게 당해 주지 않았다.
“너와 기계장치의 동화율이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헥토의 위대함, 그 편린을 조금이나마 알아보겠느냐!]
허공에서 정시우의 해머와 기갑 오크의 도끼가 부딪혀 다시 한 차례 폭음을 냈다. 그것이 한 차례, 다시 한 차례 반복되며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소름이 끼치는 끔찍한 힘과 속도의 공방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시우는 점차로 놈을 파악해 나갔다.
‘재밌어. 정말 재밌단 말이지.’
거력이 담긴 도끼를 받아쳐 내면서도 정시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더 이상 육신과 별개로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높은 동화율, 숨 쉬듯 자연스레 육신의 일부가 되어 움직이며 공방의 전환을 자유로이 이루는 모습까지.
실로 케이나의 말이 옳았다. 불완전한 존재인 기갑 오크들은 헥토와 만나 비로소 완전해질 가능성을 얻은 것이다.
지금 정시우의 눈앞에 있는 이 자그마한 체구의 기갑 오크가 바로 그 증거다.
“아니, 기갑 오크라고 부르면 섭섭하려나.”
[음?]
정시우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기라도 하려는 듯한 기세로 거세게 내질러지는 도끼를 망치로 크게 휘둘러 쳐 내며 카오스 스케일을 활성화하여 전신을 단단히 뒤덮었다.
흡사 검붉은 비늘 갑주를 장착한 것만 같은 위용, 그것은 자신의 전력을 끌어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안 그래? 헥토.”
정시우가 툭 내던진 말에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놀랍게도 그의 적은 그를 향해 마주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 겉모습과는 안 어울리게 눈치가 빠르구나, 인간이여.]
그렇다. 그의 적은 기갑 오크가 아니다.
헥토의 강림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