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화.
그 메시지는 조금 의외였다. 심해관과는 다른 장소라는 확신을 막 얻은 찰나에 이 장소를 거주지역과 이어 버릴 줄이야.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건 하늘성, 개미굴의 시스템이 아닌 자신의 고유능력과 관련된 일인 것도 같았다.
어쨌든 일일이 제주도까지 올 필요가 없어 좋은 일이기도 하니, 정시우는 기꺼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사실을 전달했더니 엘 역시 기뻐했다.
[나는 네가 언제 이곳에 오든 환영하겠다. ……슈.]
“슈?”
한 방 먹었다. 설마 애칭에 애칭으로 복수해 올 줄이야. 덩치만 커다란 이 백호 녀석이 이런 수단을 써 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정시우가 그것을 입 밖에 내버리는 바람에 일행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는 것이다. 귀여운 고양이가 애교 부리는 것을 볼 때의 표정이었다.
“슈.”
“슈…… 푸흣.”
“아냐. 아니라고 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부정하는 정시우였으나 그것은 일행을 더욱 흐뭇하게 만들 뿐! 그는 일행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재차 엘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그 계획의 첫 단계로, 우선 제주도를 비롯해 너의 영역과 닿아 있는 곳들을 완전히 정리하도록 해. 언제나 집안을 정리하고 그 다음 나라를 도모해야 하는 법이지.”
[과연, 심오함이 느껴지는 말이군. 맡겨 둬라.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곳의 우두머리가 되어 진행해 오던 일이다.]
“그동안 나는 다른 몬스터 세력의 정보를 모아 주지. 네가 다스리는 땅이 넓게 뻗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커버하지 못하는 구역도 확실히 남아 있을 테니까.”
[실로 고마운 일이다.]
정시우에게는 수천의 유령 군단이 있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정시우의 명을 받아 지구상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돌아다니는 터, 거기에 토종 몬스터 세력의 정탐을 맡긴다고 딱히 더 부담될 일도 없었다.
단지 그들의 보고를 일일이 받아 분석해야 하니 정시우의 두뇌가 더욱 고통스러워질 뿐. 귀찮아서 안 했다 뿐이지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행이 들으면 무척 재수 없어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부턴 함께 움직인다. 토종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일인 만큼 그들을 죽이기보다는 제압하여 휘하에 넣는 것을 목표로 할 거야. 분명 단순히 죽여 버리는 것보다 더 힘들겠지만, 지구 규모의 토종 몬스터들을 통합한다면 이세계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해 볼 만하겠지.”
[슈…… 너는 몬스터들을 제압만 하고 끝낼 자신이 있는가? 그렇게 무지막지한 힘을 지녔으면서?]
“어…….”
뜻밖의 예리한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정시우는 이내 누구나 지을 수 있는 미소와 함께 대꾸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다른 인간들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겠군…….]
“이 자식이?”
토종 몬스터 세력분포를 아직 완전히 파악한 것도 아니니, 정시우는 이쯤에서 다음 단계의 설명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몬스터들을 통일하고 나면, 그다음부터 우리의 동맹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거야. 인간은 결코 너를 무시할 수 없게 될 테고, 그 힘을 적으로 돌리기보단 아군으로 놔두는 쪽이 훨씬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물론 그렇겠지.]
“그다음으로, 너는 인간의 언어를 배워. 네 스스로 인간들과 소통하기 위해선 그게 최고야. 물론 너를 따르는 몬스터들 중에서 지능이 높은 녀석을 골라 따로 가르칠 필요도 있겠지.”
[음.]
그의 말에 엘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를 굉장히 존중해 주는구나.]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납득했어?”
[그렇다. 알겠다. 네가 가르쳐 준다면 열심히 배워 보겠다.]
엘이 정시우를 자신의 대변인으로 택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몬스터 집단이 자칫 정시우의 군단인 것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있었다.
정시우는 이 많은 몬스터들을 이끌기도 귀찮았고, 자신이 중간에 없어도 이들만의 힘으로 인간과 공생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인간과 직접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이다.
“그 후에야 비로소 우리 동맹의 목표인 이세계 몬스터 척살을 할 수 있게 되는 셈인데…… 이건 그때 가서 얘기하자고. 서로 준비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알겠다. 서로 간에 긴밀히 연락을 취하도록 하지.]
“아, 그리고 해상 몬스터 쪽에는 연줄이 있으니 나중에 그들도 소개시켜 줄게.”
[오, 그들도 현명한 선택을 내렸는가. 아군이 늘어난다면 좋은 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녀석들은 정시우를 신의 화신쯤으로 여기는 구석이 강했지만 눈앞의 이 녀석까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면 곤란했기에 그는 굳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대충의 논의가 끝났다. 정시우는 엘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돌아서려다가는, 아까 녀석의 능력을 본 순간 떠올린 것이 있어 그것을 입에 담았다.
“모래를 다루는 네 능력 말인데.”
[다시 보여 줄까?]
이 녀석, 서로의 목적이 같다고는 해도 조금 지나치게 친근하지 않은가. 그 사실에 의문을 품은 정시우였으나 나쁠 것도 없으니 굳이 그 사실에는 터치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보여 줄 수 있을까?”
[얼마든지.]
힘자랑하기 좋아하는 성격인 것은 정시우와 별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엘은 제법 뿌듯한 표정으로 앞발을 들어 바닥을 거세게 내리쳤다.
그 순간, 녀석을 중심으로 지름 50미터 정도의 원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바닥에 모래의 선이 달린 직후 그 라인을 따라 수백, 수천 개의 모래로 빚어진 창이 솟구쳤다. 그 어마어마한 위용과 무지막지한 마나량에 마리나가 본능적으로 감탄사를 토해 낼 정도였다.
“굉장해…… 스케일이 우리랑은 달라! 아, 시우랑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마력으론 이런 짓 못한다.”
하지만 이 기술…… 아마도 엘이 타고났을 ‘고유능력’의 구조와 그 발현 방식에 대해서만은 충분히 깨달았다. 그 덕에 녀석이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고…….
정시우는 굉장히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거 모래가 없는 곳에서도 쓸 수 있는 거잖아.”
[나는 모래에서 태어난 모래호랑이다. 모래가 아닌 것을 다룰 수는 없다.]
“음, 어폐가 있었네. 정확히 말하면, 뭐가 됐든 모래를 만들 수 있는 곳에서는 쓸 수 있을 거야.”
[모래를 만들 수 있는 곳?]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지능을 보여 줬으면서 왜 이제 와 고개를 갸웃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잘게 갈린 모래 입자들을 매만지며 설명했다.
“돌을 부숴서 모래로 만들면 되잖아.”
[돌을 부수면 모래가 되는가!?]
이 녀석 글렀다. 그는 씁, 혀를 차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가, 거세게 모래 바닥을 내리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괴력을 유지하고 있기에, 별개로 마나를 부여하지 않아도 주먹이 발하는 파괴력은 가히 끔찍한 수준!
모래바닥이 재차 성대하게 솟구쳤다. 그냥 솟구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발한 파괴력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모래 입자들은 그 짧은 순간 한층 곱게 갈려 분해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미 다들 알고는 있었지만, 실로 인지의 영역을 초월한 황당한 능력이었다.
“봤지? 모래도 더 작아질 수 있어. 그러니 돌은 그냥 큰 모래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무식한 정리가 있을 수가.”
[과연, 그런 것이었는가!]
“설득 당했잖아!?”
일행은 어이없어했지만 엘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바위를 모래로 만드는 것부터 가르쳐 줄 요량이었지만 엘에겐 방금 정시우가 보여 준 퍼포먼스만으로도 충분한 모양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겠다. 과연, 네 말대로라면 나는 지상 어디에서든 내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겠군!]
“그렇지. 참고로 포장도로나 건물이라고 해도 속에는 대부분 돌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부숴 모래로 만들면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오오오오오! 너는 정말 나의 세계를 한꺼번에 많이 넓혀 주는구나!]
[넓히는 게 아니라 찢어 버리는 것 같다, 찌.]
“어쨌든 넓어졌으면 됐, 찌.”
정시우의 무식한 이론에 끝내 납득한 엘은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이 새로 깨달은 것을 시험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역시,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힘을 깨달을 때의 흥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지. 정시우는 성장한 제자를 보는 스승처럼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천천히 이것저것 시험해 보라고. 그러면 다음엔 서로 발전된 상태에서 보자.”
[알겠다. 다음에 만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다.]
양측에게 있어 실로 유익한 순간이었다. 만약 정시우가 아니라 다른 이가 엘과 소통하는 능력을 지녔더라면 이렇게 스무스하게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 어느 쪽이 동물이고 어느 쪽이 인간인지 알 수 없는 무식하고 우직한 둘이었기에 동맹이 순조로이 성사될 수 있었다.
“그러면 가보자. 여기서 할 일은 모두 마무리된 셈이니까.”
“나 루타가 만든 쿠키 먹어 보고 싶어.”
“그래그래, 거주지역으로 가자고.”
정시우는 엘과 나눠야 할 모든 정보를 나누고 작별한 후, 일행을 끌고 거주지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죽상을 지은 채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다람쥐였다.
“뭐냐, 너.”
[내 이름은 사리테다, 찌.]
“자기소개 할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 찌.”
[에리우 님께서 날 당신 담당 전령으로 임명하셨다, 찌…….]
본인도 무척 괴로운 표정이었기에 정시우는 굳이 녀석을 더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그가 몬스터를 끌고 돌아오자 마침 그 주위에서 약초를 채집하고 있던 볼트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정시우는 빠르게 그를 안심시켰다.
“잘 봐, 볼트. 자,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우로 취침.”
[찌, 찌. 찌이.]
정시우는 군대 시절 유격 조교의 경험을 되살려 다람쥐를 굴렸다. 역시 눈치가 빨라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다람쥐! 볼트는 빠르게 다람쥐의 무해함을 인식했다.
“몬스터를 길들이시다니 역시 대단하시군요, 영주님.”
“그래, 혹시 얘 도움이 필요하거나 그러면 부려 먹고 해.”
“알겠습니다. 힘이 좋아 보이니 시몬 부부도 좋아할 겁니다.”
[내가 농사나 하려고 끌려온 건 아닌데, 찌…….]
“너만 믿는다, 찌.”
[역시 보스는 동맹의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찌.]
그러나 한낱 졸개로서 보스의 지시를 거스를 수는 없는 바, 다람쥐 사리테는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정시우는 내친 김에 농장에 들러 녀석을 시몬 부부에게 맡긴 후, 베토에게 들러 탄환의 생산 정도를 확인한 후 그에게 달라붙는 녀석과 조금 놀아 주고는 거주지역을 나오기로 했다.
“악마! 변태! 쿠키 강도!”
“집세 대신이야, 집세.”
물론 중간에 루타의 비밀상점을 털었기 때문에 일행의 손에는 갓 구워 낸 쿠키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정시우는 쿠키를 우적우적 씹으며 살짝 미련이 남는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았으나, 곧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수중던전은 할 일을 다 끝내 놓고 가야지.”
[주인님은 지금 또다시 통합던전에 들어갈 셈이군.]
“빙고.”
수중던전은 심해관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 평범한 던전과 같은 곳은 아닐 터였다.
모름지기 미지에 몸을 던지기 전에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놓아야 하는 법이고, 정시우는 그 사전 준비 단계로 통합던전에서의 수련을 마음먹은 것이다.
“그 공간을 평범한 수련의 장소라고 생각하는 오빠의 발상이 감탄스러울 뿐이에요.”
“나도 가고 싶어!”
“너흰 집에 가 이제.”
정시우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녀석들에게 차를 내어주며 조금은 느긋이 시간을 보내게 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고 김하룡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려면 세리아나 마리나나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바빠질 터, 그것을 익히 예측할 수 있었기에 여유시간을 준 것이다.
“우우, 그럼 나중에 봐. 몬스터들이랑 싸울 때 꼭 불러 줘야 해.”
“네가 싫다고 해도 넌 이미 동맹의 일원이야. 무를 수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나중에 봐, 시우야!”
마리나 일행이 떠나갔다. 요즘 계속 같이하다 보니 이젠 셋이 나란히 선 뒷모습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시우는 그 사실에 새삼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며 돌아섰다.
“자, 그럼 우린 통합던전에 들어가 볼까.”
제주도에서는 불완전연소였다.
아직 미지근한 몸을 다시 불태우러 갈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