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화.
“백호 멋지다.”
“이건…… 정말로 뿌이급이야.”
“그러네, 정말 뿌이와 팽팽하겠어.”
“설마 뿌이와 동급의 힘을 지닌 토종 몬스터가 지구상에 또 있었다니…….”
“다들 그 뿌이라는 호칭으로 납득한 건가요? 정말?”
일행이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정시우 또한 내심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호랑이는, 비록 덩치 면에서는 거대 고래 세이락시아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나 그 몸에 품은 마나는 결코 녀석에게 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인간의 왕이여, 먼저 나의 수하들을 해하지 않은 것에 감사를 표한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왕이 아냐.”
정시우는 일단 녀석의 오해부터 바로잡기로 했다. 그러자 놈은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며 물러났다.
[그런가. 그렇다면 알겠다. 조만간 그렇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겠지.]
“수긍이 아니구만…… 언제 봤다고 날 왕이라고 부르는 거야?”
[네 존재에 대해 우리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네가 우리를 과하게 얕보는 것이다.]
정시우가 퍼뜩 고개를 들자, 백호는 앞발을 들어 던전의 최심부를 가리키며 그들에게 말했다.
[너와는 한 번 얘기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남은 이야기는 안에서 하지.]
“……좋아.”
어차피 정시우를 제외한 일행은 녀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정시우가 통역해 주자 일행은 아주 잠깐 고민하는 듯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있으니까 죽지는 않겠지.”
“어쩌면 심해관에서처럼 될지도 모르죠.”
“가 보죠, 어서.”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정시우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정시우 만능주의가 일행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었다.
자립심을 키워 주기 위해 이 망할 것들을 전부 내동댕이쳐야 할까, 정시우는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일단은 호랑이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럼 전 이만…… 찌익!]
“어딜 가, 찌?”
[자, 잠시 목 스트레칭을 했다, 찌.]
정시우의 신조는 일단 한 번 찍은 놈을 놓치지 않는다, 였다. 만약 호랑이를 따라갔다가 수틀리면 다람쥐를 희생양으로 삼아 시간을 벌고 말 것이다. 그의 강렬한 의지가 전달되었을까, 다람쥐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걱정 마라, 찌. 우리 보스는 무척 신사적이다, 찌.]
“나도 그러길 바라, 찌.”
던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마나 밀도는 더욱 높아졌는데, 그에 따라 이곳저곳에 은신해 있는 몬스터들의 수준도 높아져 갔다. 다람쥐는 슬슬 부담되는지 온몸을 뒤틀었지만 살고는 싶었는지 더 이상 도망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곳이다.]
“와오.”
“와오!”
“와오…….”
“다들 저 말버릇이 옮아 버렸어…….”
깊은 숲을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나무와 바위가 줄어들고 황금 모래사장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 끝에 순수하게 모래로만 빚어진 동굴이 보였다.
물론 평범한 모래가 아니다. 마법적인 형태로 굳어져 어지간한 충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모래…… 정시우는 그것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 모래는 너의 힘이구나? 대단한데…….”
[이 힘에서 내가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 힘의 기원은 결코 내가 아니다.]
기원이라, 또 기분 나쁘게 익숙한 단어가 나오는구만. 정시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모래동굴 안의 평평한 곳을 찾아 철퍼덕 주저앉았다.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너희가 따른다는 것이 그럼 이 힘의 기원이 되는 자냐?”
[아마도 그렇다. 확신은 없지만,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래 줄곧 하나의 존재에게 이끌림을 느끼고 있다. 그것이 나에게 모래의 힘을 준 주인님과 똑같은 존재이리라, 나는 확신하고 있다.]
거대 호랑이, 에리우는 그렇게 말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모래가 허공에서 소용돌이를 만들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만약 그것이 적을 향해 발현된다면, 마력과 물리력을 동시에 품은 그 소용돌이에 몸이 갈가리 찢기게 될 터이다.
“그 신이 누구인지는? 네 능력 외의 다른 흔적은?”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누구도 우리를 인도해 주지 않았기에, 그분에게 이르는 길은 우리가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나.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래 동굴에까지 이르러 깨닫기는 했지만, 이곳은 심해관보다도 더욱 대책이 없다. 여기서 시스템의 흔적을 찾느니 요정상인 루타를 붙잡고 뭔가 정보를 얻어 내는 쪽이 더 빠를 정도였다.
정시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리우의 말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바로 오늘 있었던 습격에 대한 얘기였다.
[내 능력에는 단점이 있다. 모래가 적은 곳에서는 약해진다는 것이다. 능력이 불안정하여, 무수한 적이 다시 이곳을 침범해 오려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나가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적을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 놈들을 정시우가 처리했다는 것. 정시우는 이때 처음으로 녀석의 능력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지금 할 얘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역시나 곧 녀석이 물어 왔다.
[너는 우리와 그 괴물들을 다르게 보는 것이 맞지?]
“뭐, 응.”
사실 별 구분하지 않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이 사실이었다. 호랑이는 그의 긍정에 흡족하여 다시 물었다.
[그들은 우리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교화’하려 든다. 네가 들어온 입구 말고도 다른 입구를 통해 몇 번이고 괴물들이 우리의 육신과 마음을 위협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몇 번의 전투를 벌인 끝에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지금 이 지상에서 가장 그들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가 누구인지도 알았다.]
이쯤 되면 그게 누구인지 모르는 쪽이 더욱 이상하다. 정시우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 보이자 놈이 그 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들이 부르짖는 신의 이름이 인간들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고 있는 존재…… 정시우, 바로 너다. 오늘도 너는 그들이 수작을 부리는 것과 동시에 나타나 그들을 산산이 부숴 버리고 말았지.]
가만히 있던 다람쥐가 아까 그 순간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면 에리우는 딱 봐도 그렇게 생긴 것처럼 힘을 숭상하는지, 감격에 가까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녀석이 정시우를 어째서 인간의 왕이라 판단하고 있었는지 그는 이 시점에서 깨달았다.
[나는 너의 존재를 알게 되고, 네가 하고 있는 일을 깨닫고서야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나 또한 이 아이들의 왕이 되어, 그들의 신으로부터 이들을 지키고 섬겨야 할 오롯한 한 분만을 섬기리라고.]
설마 자신의 이름까지 파악하고 있었을 줄이야, 토종 몬스터들의 지능이 상상을 초월해 있다는 사실에 정시우가 새삼스레 놀라는 가운데 놈이 말을 이었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이 같다면, 우리는 협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드디어 결론이네.”
[이미 알고 있다. 우리를 적대하는 인간도 많고, 우리와 저 괴물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 또한 많다는 것도. 하지만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라면, 가뜩이나 신경 써야 할 적의 세력도 강대한데 지금 다른 인간들을 신경 쓰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 부분에서 또 정시우와 의견이 일치했다. 정시우가 고개를 주억이자니 녀석이 추가로 덧붙였다.
[너의 힘이라면 인간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는가. 두 집단이 서로 반목하지 않고 힘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면, 분명 괴물들을 보다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터이다.]
깜짝 놀랄 만큼 이상적인 계획. 에리우의 말대로만 된다면 정시우가 여태껏 보아 온 세계에서와는 달리 인간은 보다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구가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정시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호랑이의 눈에 기쁨이 어렸다. 지금 이 순간, 과거 그 어떤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몬스터와 인간의 대 외계 동맹이 건설되려는 것인가!
“하지만 세상만사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거든.”
[크우…….]
호랑이가 풀 죽어 고개를 늘어트렸다. 스스로도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것일까. 정시우는 하나하나 손을 꼽으며 녀석에게 설명해 주었다.
“첫째로, 방금 밝혔듯 나는 인간의 왕이 아냐. 따라서 내가 몬스터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겠지. 듣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완벽하지 않다는 거야.”
[그런가…….]
“둘째로, 너도 인지하고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세계의 몬스터와 지구에서 태어난 몬스터를 잘 구분하지 못해. 덤으로, 나처럼 몬스터와 소통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데 동맹을 이루기가 쉬울까?”
[확실히 그렇군.]
“마지막 셋째. 이게 제일 중요한데.”
정시우는 강맹한 녀석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 또한 지구상 모든 몬스터의 왕이 된 것은 아냐. 결코 모든 토종 몬스터를 대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거지. 적어도 아직은. ……그렇지?”
[……그렇다.]
놈은 그 사실을 깨끗이 인정했다.
[이 던전은 지구상의 여러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는 그들의 왕으로 인정받으며, 섬겨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구의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 나도 이 게이트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니 장담은 못하지만, 아마 그럴 거야. 그러니 너의 그 거창한 동맹 계획은 결코 당장 실현할 수는 없는 거지.”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인간, 이계의 괴물들과 삼파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는가?]
“하지만 생각해 봐, 엘.”
[엘?]
정시우는 멋대로 녀석에게 애칭을 붙이며 말했다. 안 좋은 소식을 늘어놓았으니 이젠 긍정적인 얘기를 해 줄 차례가 아니겠는가.
“적어도 우리 둘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있어.”
[그, 그렇다.]
“그러니 당장 우리끼리는 동맹을 맺을 수 있으리라고 봐.”
[우리끼리……?]
우리끼리. 실로 달콤한 울림이다. 소속감을 부여하고 비밀을 공유하며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기 칠 때 흔히 쓰는 수법이지만 에리우…… 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다.
[우리끼리…… 괜찮은 느낌이군.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는다. 아주 마음에 든다.]
“그래. 당장 지구상 모든 몬스터와 인간의 동맹을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끼리는 뜻을 함께할 수 있다는 얘기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면 인간들과 너희 몬스터들이 마찰을 일으킬 일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테고. 잘 하면 협력도 할 수 있을 테고.”
[동의한다. 그래, 모래로 성을 쌓듯 한 발짝씩 나아가면 되겠군.]
정시우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좋아, 그럼 동맹을 맺자.”
[좋다.]
인간과 호랑이가 서로의 손과 앞발을 가볍게 붙잡았다. 소규모 동맹이 결성된 순간이었다.
[보스가 길들여지는 느낌이 드는데, 찌.]
“넌 조용히 해, 찌.”
그 순간부로 정시우는 본격적으로 엘과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논의를 개시했다. 일단 엘이 다스리는 몬스터들이 인간을 피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간단한 행동 요령을 주입시키고, 인간을 이용하여 이계의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오빠,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얘네까지 적으로 돌리는 것보단 이세계의 몬스터들만 상대하는 게 낫지.”
지금 정시우의 목표는 인간과 몬스터가 상생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최대한 서로의 손해를 줄이며 결과적으로 ‘이계의 몬스터’를 몰아내는 것! 그 과정에서 인간과 몬스터가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끼리는 철저하게 동맹을 유지하는 것. 이것을 위해 서로를 위한 간단한 인사 방법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겠지. 동맹의 멤버가 늘어났을 때에도 좋을 거야.”
[훌륭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문제.”
세부 사항은 나중에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지금 녀석의 의사를 묻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엘, 너는 정말로 몬스터의 왕이 될 생각이 있냐?”
[몬스터의, 왕…….]
이 던전의 왕이 아닌, 지구상 모든 몬스터의 왕. 녀석의 타고난 능력이나 몸집으로 미루어 해상 몬스터까지 모두 지배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육지의 몬스터를 규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그것에…… 도움을 주겠다는 뜻인가?]
“그 눈빛을 보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겠어.”
정시우가 히죽 웃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엘 또한 히죽 웃었다.
그 순간 정시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거주지역을 통해 에리우의 지배지역, 사막의 낙원에 입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