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화.
군단의 신 뒤세느가 정시우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 적이 있다. 세상 포투포우에서의 일전, 정시우가 케나토를 죽이고 성물을 회수한 순간. 그때 그녀는 분명, 자신의 패배를 선언하면서도 다른 신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아마 그것은 당시 포투포우에서의 그녀의 적수였던 파에토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놈들은 정시우가 나타나 김하룡을 처단한 시점에서 퇴각을 결심했을 테니까.
[길이 열렸다. 이 땅에서 역사가 시작되리라.]
[그분의 명을 따르라. 이 좁디좁은 땅을 우선 완벽히 그분의 토지로 만들어야 한다.]
정시우는 하나같이 파에토의 명을 복창하며 나오는 몬스터들의 모습을 보며 궁금증에 차 물었다.
“왜 탁 트인 땅이 아니라 섬을 고른 거냐?”
[어리석은 인간, 우리가 나가기 힘든 만큼 외부에서도 들어오기 힘들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냐.]
“아, 인간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일단은 소왕국을 건설하고 보겠다는 건가.”
하긴, 지금 전 세계의 섬 중 외딴 곳은 대부분 몬스터들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제아무리 비행기가 뜨고, 플레이어들이 날 수 있다 해도 육지와 유리되었다는 환경만으로 일단 그만큼 손을 대기가 까다로운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인가. 화염의 신의 신도로 만들 인간들도 있고, 섬이라는 환경을 갖추고 있는…….”
정확히는 날개를 잃고 WPC에 집중 마크 되고 있는 김하룡이 찾아갈 수 있는 섬이 제주도 정도였던 것이겠지만 말이다. 악역이면 늘 치밀하게 일을 꾸밀 줄만 알았는데 김하룡 이놈은 어째 끝까지 어설펐다.
그는 잠시 엑스트라의 운명에 애도하곤 고개를 들었다. 마신의 징벌이 자연스럽게 크기를 늘려, 그 끝으로부터 위협적인 검은빛의 스파크를 토해 냈다.
“하지만 나를 불러들이고 만 시점에서 다 끝이야.”
[이상을 감지한 시점에서부터 이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속도와, 조금 전의 괴력에는 그야 놀랐지만…… 과연 그것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어느 누구에게든 약점이란 있다. 육신이 견뎌 내지 못할 만큼 위압적인 마나의 분출로 인한 근력 강화, 그 끝에 틈이 없을 리가 없다. 파에토는 그렇게 확신했고, 파에토의 명을 따르는 몬스터들은 그것을 믿었다.
그것이 놈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다.
“후, 그전에 네놈들이 다 끝날걸.”
[크하, 확실히 그 잡놈이 죽어 더 이상의 게이트는 열지 못하게 되었지만…… 과연 네놈이 이날을 위해 기다린 우리들을 모두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파에토 님의 정의를 이 땅에 새겨라. 모든 것을 불태우고 하얀 재로 만들어라!]
정시우는 굳이 놈들의 착각을 바로잡지 않기로 했다. 지금 게이트를 통해 나오는 몬스터들은 말 그대로 지금의 지구가 아슬아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강자들이었고, 파에토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만큼 엘리트의 비율도 높았기 때문이다.
알아서 보물이 쑥쑥 튀어나오는데 그것을 물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읏차! 케이나, 용세하! 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만 하면 돼, 못하게만!”
“그렇다면 결계를 다루는 이서희 씨를 부르는 게 낫겠네요.”
“아, 좋아. 그거야.”
[크크큭, 어리석은 인간들, 설마 우리가 네놈들의 연락 수단을 파악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느냐!]
정시우가 휘두르는 해머를 피해 물러난 몬스터 중 한 마리가 악역 포스를 뿜어내며 사악하게 웃었다.
제주도를 지배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외부와의 단절! 정시우의 유령을 끊어 낸 후 김하룡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제주도와 외부를 잇는 통신 수단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곧 몬스터들에 의해 물리적인 장벽 또한 건설될 터였다. 정시우와 그 일행을 끝장낸 후에!
“좋아, 불렀어.”
[음!? 당당하게도 거짓말을…….]
정시우는 이곳에 그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장 이서희에게 붙여 놓은 유령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던전이 아니라 밖에 있었고, 실체화하여 나타난 유령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보면 알 테고…… 자, 우린 우리끼리 시작해 볼까.”
[인간 주제에 거짓 기만을…… 죽여 주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몬스터들도 겁을 먹고 움츠린 한라산 깊은 산골.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진 숲을 모두 부수고 불태우며 몬스터들은 한 명의 인간의 목을 따기 위해 덤벼들었다.
정시우는 그 모두를 거대화한 마신의 징벌로 쓸어버리며, 부디 대형 화재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시우!”
“시우 님, 늦었습니다!”
그로부터 30분 후 이서희와 마리나, 세리아가 그의 부름을 받고 도착했다.
“미안해, 시우야! 많이 늦었지!”
[뭣!?]
“아니, 완전 안 늦었어.”
이서희만 있으면 됐는데, 생각해 보니 요즘 이 셋이 같이 다니고 있었지. 정시우는 어째서 이서희에게만 대표로 연락을 했냐는 듯 추궁하는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는 마리나와 세리아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떻게 원군을……! 유령인가!]
[놈은 세트나크의 종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레벨 250에 달하는 플레임 미노타우르스가 정시우가 휘두른 해머를 피해 펄쩍 뛰어 물러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놈은 어떻게 이 긴 시간 동안 괴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그건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한테나 물어봐라! 거대화 대!”
[크학!]
정시우는 도망치는 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만나는 적이 처음 만난 강적보다 더 짜증나기 때문이다.
미노타우르스는 거대화한 망치에 얻어맞는 순간 육편으로 흩어져 붉은 비로 화했고, 그의 스킬 타격 전이가 발동하여 그것의 15%에 달하는(스킬 레벨이 올라 퍼센티지가 성장했다.) 데미지를 주위 20m 이내의 몬스터들에게 전달했다.
충격파에라도 얻어맞은 듯 일제히 뒤로 물러나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실로 웃겼다.
“뭐해, 안 덤빌 거야?”
정시우는 슬레지 해머를 거대화 ? 중 상태로 만들어 회수하며 히죽 웃었다.
그가 제주도에 도착하고부터 두 번째로 발동된 괴력이 그의 전신을 휘돌며 끔찍한 힘을 내고 있었다. 그가 중간에 패널티를 겪었다는 사실을 괴물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렇기에…….
[우리는 저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파, 파에토 님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신다! 놈은 언젠가 한계를 맞이할 터!]
[하지만 그 한계라는 것은…… 크학!]
정시우는 약한 소리를 하는 놈들부터 차례대로 머리를 으깨 주었다. 근접 전투 요원인 케이나와 용세하에 이어 원거리 전투 요원인 마리나와 세리아까지 합류했으니 그들의 진형에 빈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전장을 바꾸어야 해.]
[지금 이 자리는 우리가 물러나야…… 큭!?]
물론 도주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정시우가 이서희를 부른 것은 몬스터들을 더욱 빠르게 몰아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몬스터들이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흡……!”
이서희가 양팔을 펼치고, 투명하게 달빛을 반사하는 날개를 쫙 펼치며 마력을 사방에 확산시켰다. 그녀의 날개를 닮아 투명한 유리 결정처럼 반짝이는 마나의 결계가 일대를 감싸며, 동시에 그 안에 있는 몬스터 전원에게 압력을 가했다.
“배틀 필드!”
“결계 이름 멋지잖아!?”
이서희는 마리나와 이서희, 두 랭커와 함께 정신없이 하늘성 던전을 클리어하며 몸에 익힌 각종 결계들을 펼쳐 한라산 산자락 하나를 완전히 외부와 유리된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파에토의 종속들이 제주도를 외부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던 것처럼, 지금은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갇혀 버리고 만 것이다.
“흡…… 흐아아아아아!”
드디어 완성된 링 안에서 정시우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슬레지 해머가 달빛을 받아 반짝일 때마다 몬스터들이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튕겨 났고, 여태껏 수련장을 향해서만 발산되었던 폭력이 사방으로 폭발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이서희 일행이 오기 전부터 이미 30분 이상 날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체력과 마력의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끔찍한 수준의 괴력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레벨이 올랐습니다.]
[타격 전이 스킬이 Lv7이 되었습니다. 스킬의 유효 범위가 30m로 확장됩니다.]
“좋아, 이제 몇 마리 안 남았네.”
[이, 괴물 같으니……!]
뒤세느가 정시우에게 패배를 선언한 것은 그가 아직 괴력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혼자 케나토를 감당하지 못해 용세하의 힘까지 빌렸을 때의 일이다.
그때 이미 하급의 세계 수준에서는 그를 이겨 낼 수 없을 것이라 했는데, 지금 정시우는 그 순간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그 어떤 신이라 할지언정 지금의 지구에서는 정시우를 넘어설 수 없으리라.
당장 괴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속도와 힘이 1.5배 가까이 늘어나, 전반적인 스킬이 종전의 배 이상 데미지를 낼 수 있었으니까!
[네놈은 혹시…… 이미 헥토의 신도인 것인가!]
“그런 이름을 가진 신은 몰라!”
[그렇지도 않은데 어떻게…… 칵!]
정시우는 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해머를 내려쳤다. 레벨이 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리라. 놈은 마석 하나 간신히 남기곤 산산조각으로 터져 사망했다. 정시우는 해머를 회수하며 중얼거렸다.
“괴력 스킬을 유지하니 단점이 하나 있긴 있네. 여간 몸뚱이가 단단하지 않고는 사체가 안 남아.”
“그리고 주위가 온통 더러워진다는 단점도 있죠.”
정시우가 터트린 몬스터를 마지막으로 더는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가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이트가 완벽히 닫혀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파에토 역시 패배를 인정하고 튀었다는 뜻이다.
“쳇, 뒤쫓아 갈 수도 없게 뒤 막는 것 봐. 그래도 명색이 신이라고 아예 배운 게 없는 건 아닌가 보네.”
“시우, 너 대체 뭘 했기에 그렇게 강해진…… 아니, 됐어.”
정시우가 게이트의 흔적을 살피며 혼잣말로 욕을 내뱉던 중, 몬스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권총을 거둔 마리나가 정시우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다 말고 그만두었다. 이유를 들어 봤자 괜히 그녀만 더 허무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신들의 의도는 차치하고 게이트의 발생만은 그들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겼는데, 신의 힘을 주입받은 이들의 육신이 매개가 되어 발생하는 것이었다니…… 충격이군요.”
반면 세리아는 남 얘기가 아닌 만큼 제주도에 어떻게 해서 이런 사단이 일어났는지, 거기에 더욱 크게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통해 곧 WPC 전체에 이 사실이 알려질 것이고, 신의 힘을 지닌 이들을 어떤 식으로 경계하고 취급해야 하는지 지침은 될 수 있겠지.
“엇, 그런데 통신이…….”
“지금 막혀 있어. 아마 곧 신의 영향력이 완전히 가셔 통신도 가능하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정시우는 다급히 통신을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당황하는 세리아의 모습을 보며 킥 웃고는 기지개를 켰다. 스킬 수련 중에 뛰쳐나오느라 제법 정신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후우, 그래도 확실히 좋은 경험이 됐어. 신들이 게이트를 어떻게 여는지, 게이트 중에서도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게이트를 조작해 만들어 내는지…….”
아직 파에토에 한정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신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침공하려 하는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면 그들을 어떻게 막을지 전략을 수립하는 것도 손쉬운 일이 된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그가 그간 숙련한 괴력 스킬을 충분히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전히 후유증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면 적어도 패널티 상태일 때 적에게 기습을 먹어 곤란한 지경에 빠질 일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선 것이다. 그것을 더 늦기 전에 깨닫게 해 주었으니 파에토에겐 약간의 감사의 마음마저 생겼다.
“조오아써, 이제 스킬 수련은 던전을 돌면서도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시우가 저렇게 강해진 게 스킬 때문이라고?”
그사이 수아린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은 마리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정시우를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 끔찍한 고통과 후유증을 그냥 단단한 신체 하나 믿고 버티면서 스킬을 계속 구사해서 레벨을 올렸다니…… 누가 들으면 고위 몬스터들만 갖고 있다는 초월재생 스킬이라도 가진 줄 알겠다.”
“초월재생은 무슨,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스킬까지 필요하겠냐. 버티다 죽으면 죽는 거고 안 죽으면 강해지는 거지.”
“…….”
정시우가 타고난 강인한 신체는 대체 어느 영역에 이르러 있단 말인가. 말만 들어도 끔찍한 후유증을 맨몸으로 버텨 낸다는 말에 아연해진 마리나였으나, 듣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저기…… 시우야.”
그렇게 침묵에 빠져 있던 일행을, 이서희의 뜻하지 않은 목소리가 깨웠다.
“몬스터들이 바깥에서 구경하고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