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149화.
은신이란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다소 독특한 전투 스타일, 정찰과 암습을 숙달한 시프 계열 플레이어들의 전유물이다.
던전이 게임과 같다면야 전직할 때 ‘도적 될래요!’하고 외치기만 하면 간단하게 얻을 수 있겠지만, 하늘성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가 10단계 던전을 클리어하기까지 쌓은 업적과 기록, 그들의 마나와 특성에 기초하여 클래스를 부여하기에 도적이 되는 이의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고도로 발전된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가 적은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이유. 결국 하늘성의 플레이어 대다수는 근접 공격을 장기로 하는 클래스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의 도적이 죽어 내게 은신을 남겼단 말이지.’
은신 스킬의 묘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체내외의 기운을 상시 조절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고 다른 이들의 시야에서까지 벗어나는 능력.
그것은 크고 넓게 보면 내부를 다스리며 외부와 소통하는 용의 감각과도 맞닿아 있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시우는 낮은 레벨의 은신으로도 충분히 무수한 고수들 틈에서 자신의 몸을 감추는 것이 가능했다.
더욱이 그가 지닌 휴식처 입장 열쇠 또한 기본적으로 은신 능력을 제공하지 않던가! 그 두 가지 은신 능력의 특성이 달라, 서로의 단점을 보조하며 정시우가 보다 완벽하게 기척을 감출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이건 좀 묘한 기분인데.’
정시우는 언제 어딜 가든 사람들의 눈에 띄면 띄었지, 관심을 못 받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한창 정신없는 전장 한가운데에 대놓고 돌입해도 그 누구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지금 상황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 무관심에 익숙해져야 한다. 정시우는 지금 파괴자가 아니라, 전장의 저격수A에 불과했으니까.
“후.”
그는 은신을 유지한 채 본격적으로 전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잔챙이 몇 마리 잡아도 의미는 없다. 이 전장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어느 한쪽이 확 유리해지지 않도록 흐름을 조율해야 한다.
수백만의 전사가 대난투를 벌이는 현장을 정시우까지 포함해 고작 셋이서 조율하는 것은 지구의 바다에서 해상 몬스터들의 싸움을 컨트롤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지만, 그럼에도 정시우는 자신이 있었다.
‘일단 용의 감각을 최대로 활성화하는 거야. 은신을 유지하면서, 전장의 흐름…… 보다 정확히는 군단의 신의 힘과 화염의 신의 힘의 농도를 느낀다.’
군단의 신 뒤세느의 힘은 이미 테디베어들과 싸우며 충분히 느꼈다. 이름 모를 화염의 신의 힘 또한 뉴욕에서 용사 놀이를 하던 김하룡을 통해 이미 관찰한 바 있다.
철저하게 그 둘의 힘이 대립하는 전장에서 두 힘의 절대량을 파악하는 것은 이젠 제법 용의 감각에 익숙해진 정시우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신의 힘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농도를 비교까지 하고 있어…….”
“역시 지금은 화염의 신 쪽이 우세하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군단의 신의 세력의 핵심요소였던 레드 티베이드 부락을 정시우가 전멸시키고 성물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간 정시우가 관찰한 바 세상을 차지하기 위한 신의 힘의 개입은 점진적,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두 신이 포투포우에 한 ‘투자’의 총량은 실질적으로 비슷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 신이 똑같은 금액으로 꾸준히 적금을 붓고 있었다는 얘기.
“그런데 군단의 신의 적금을 내가 먹고 나른 거지.”
“그러니까 오빠도 일단 도둑놈이라는 인식은 있었군요.”
“그러니까 지금은…….”
정시우의 시선이 미열이 섞인 마나를 뿜어내는 인간들 쪽을 향했다. 그들 자신은 자각이 없는 모양이지만, 전투 와중에 인간들의 모습에도 조금씩 변화가 오고 있었다.
신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신과 자신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 모습이 점점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장의 열기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 열기가 식었을 때에야 서로가 변했음을 깨닫겠지만, 그때에 가선 이미 한참은 늦어 있을 터이다.
“저놈들을 족쳐 볼까.”
“저 사람들…… 그래도 아직 인간이에요. 괜찮겠어요?”
“이 전장에 이른 시점에서 저들은 이미 인간이 아냐. 설령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몬스터일 뿐. 그랜드캐니언에서 루이오스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날뛰던 엠퍼러 길드원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지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세계의 구석에 숨어 있는 극소수의 저항자들과 그들에 의해 보호받는 인간들뿐이다. 아마 이 전쟁의 승패가 갈리고 나면, 승자의 세력에 의해 그들도 같이 물들거나, 파괴될 뿐이다.
‘그들을 구하겠다느니 하는 숭고한 사명 같은 건 없어. 단지 신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이들을 정리하고, 그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며…… 신의 힘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기를 바랄 뿐이지.’
그와 동시에 자신의 강화를 이룬다. 이 모든 일을 위해, 정시우는 적어도 겉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미 일본의 오타루나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에서 한 번쯤 치렀던 일이지만, 그에게도 부담감이 없지는 않았다.
“미안해요, 오빠. 쓸데없이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아니, 괜찮아. 오히려 스스로 짚고 넘어가는 쪽이 더 편해.”
정시우는 화염의 신에게 축복받은 엘리트들의 위치를 탐색하며 양날이 서 있는 검을 고쳐 쥐었다. 양산형이기는 하지만 마도 대장장이로서 특출 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베토가 만들어 낸 것. 내구도와 예기만은 최상급이었다.
“잘 숨어 있어.”
“이젠 저도 제법 익숙해졌다구요.”
수아린과 전투 전 의례처럼 말을 주고받은 직후 정시우는 곧장 돌진했다. 벌써 유지해 온 지도 몇 달이 넘은 전투질주의 마나는, 그가 의지를 곧추세우는 것만으로 그의 육신을 포탄처럼 튕겨 낸다!
만약 그가 전투질주를 유지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이 순간 은신이 풀렸을 터이나 몇 달간의 수련은 과연 유효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쏜살같이 움직인 정시우가 칼끝에 마나를 집중해 강타를 발현하자, 그 궤적의 끝에 있던 인간의 목이 허공으로 날았다.
그 목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흉악하게 뒤틀린 근육 줄기와 붉게 물든 뼛조각, 반쯤 불에 타고 있는 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증거였다.
“다, 단장님!?”
“단장님이 죽었다!”
처음부터 지휘관급을 노려 행동하고 있었으니 혼란이 야기되는 것도 당연한 일. 순간적으로 은신이 풀린 정시우는 빠르게 놈의 목을 낚아채어 다시 무수한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를 아군이라 인식한 군단의 신의 종속들은 그를 쫓지 않고, 지휘관의 복수를 하려는 화염의 신의 종속들은 군단의 신의 종속들에 가로막히니 실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석이 있네.”
자신이 만들어 낸 혼란 속에서 재차 은신을 하는 데 성공한 정시우는 인간에게서 나온 크고 붉은 마석을 회수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개인의 감상은 모두 뒤로 미루어 두는 것이 좋다. 지금 전장에서, 한가롭게 신을 저주하고 있을 시간은 없는 것이다.
“후.”
“크학!?”
“이, 이곳에서도 당했다!”
한 번 성공하고 나자 정시우의 시도는 보다 과감해지고, 민첩해졌다. 무수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마나의 기세와 흐름을 타고 은밀하게 움직이며, 어느 한순간 독사처럼 칼을 뻗어 내 목표로 한 인물의 목숨을 취하는 것.
마나를 품고 암살행에 나서는 그의 움직임에는 여태까지의 그에게는 없었던 미학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카악!”
“이, 이곳에서 또!”
허공에서 무수하게 겹치는 마나의 실 가닥가닥 사이로 몸을 날리며, 보다 짙은 마나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칼을 휘두른다!
단순한 몸놀림뿐만이 아니라 외부의 다종다양한 마나의 분석과 그에 따른 마나 운용이 필요했기에 용의 감각을 수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놈을 죽여! 제일 먼저 놈을!”
전장에 실력이 뛰어난 암살자가 있다는 것은 금방 화염의 신 세력 전체로 퍼져, 그들을 경계하게 하느라 2차적으로 큰 피해를 양산하기까지 이르렀다. 군단의 신 세력에서는 언제 우리가 암살자를 키웠던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할 정도!
“저놈, 저 특징 없는 칼을 쥐고 있는…….”
“잡았다 요놈!”
“흥, 함부로 내 등 뒤에 서지 마라.”
“크학!?”
경황이 없는 중에 마나 컨트롤을 실수하여 모습을 들키거나 한 일도 몇 번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보탬이 되어 그는 결국 전투 두 시간 만에 용의 감각을 3레벨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은신 레벨은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은신 스킬이 Lv35가 되었습니다.]
[은신 스킬이 Lv36이 되었습니다.]
“이야, 다른 스킬들도 은신처럼만 빨리 성장하면 좋겠다.”
“태클 안 걸 거예요. 아시겠죠?”
정시우의 활약은 실제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엘리트들을 연달아 참살한 그의 활약으로 전장 곳곳에서 지휘가 더뎌지거나 집단의 움직임이 어긋나는 일이 발생하여 끔찍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어느 한순간 군단의 신의 세력이 전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정시우는 그것을 느끼며 흡족하게 웃었다.
“좋았어. 다들 잘 하고 있는 모양이군.”
“오빠 혼자 이뤄 낸 성과 같기는 하지만요…….”
실제로 정시우와 마찬가지로 군단의 신의 종속인 체 하며 화염의 신의 종속들을 무차별로 쓸어버린 케이나의 활약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 용세하가 그 반대편에서 활약하긴 했지만, 아무리 많이 성장했다고 해도 정시우와 케이나 둘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턴 세하에게 힘을 보태 볼까.”
“오빠 진짜 나빠 보인다.”
정시우는 그 순간부로 반전했다. 그러나 똑같이 장검을 다루면 티가 날 터, 그는 총 없는 저격수가 되어 군단의 신의 종속들을 향해 크리티컬 불릿을 쏘아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장기인 근접공격 강타보다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 레벨 200의 플레이어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마나와 그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마나 회복력을 바탕으로 열 손가락을 이용해 크리티컬 불릿을 연사해 대니 어지간한 이는 죽지 않을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악!”
“마, 마탄! 마탄을 보유한 자가 있크억!”
만약 개틀링이 있었다면 보다 화려한 무대를 만들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열 손가락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은신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금처럼 두다다 쏘아 내고 쏙 숨어 버리는 쪽이 좋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개틀링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현대화기는 어때요?”
차라리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상대였더라면 현대 화기가 잘 먹혔을지도 모른다.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는 아직 몸에 품은 마나도 그리 많지 않고, 방어구의 수준도 낮아 현대화기에 대한 저항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거듭 말하듯, 이 세계의 인간들은 이미 겉만 인간이고 내부는 완벽하게 변질된 상태. 그 육체 곳곳에 신의 마력이 깃들어 그들을 강화하고 있으니 마나가 섞이지 않은 단순한 물리력으로는 파괴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생명력 또한 질겨져 어지간한 내부 장기 파괴나 혈액 손실, 골절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도 현대 화기가 잘 먹히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반면 정시우가 쏘아 내는 크리티컬 불릿은 마나로 강화된 그들의 피부와 근육을 손쉽게 뚫어버리며 파괴하고, 내부에 박혀 그들의 마나를 흩트려 엉클어트린다. 쏘아 내는 모습만이 비슷하고 실탄과는 육체의 파괴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크리티컬 불릿도 조금 성장시켜서 가고 싶네.”
“잡았다.”
정시우가 또 한 명의 엘리트를 다섯 발의 크리티컬 불릿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돌아선 순간, 그의 복부에 장검을 찌르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물론 케이나와의 대련으로 마나와 육신의 일치 속도가 한층 빨라진 정시우는 용의 감각으로 어렵지 않게 그것을 피해 낼 수 있었다.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에 놀라기는 했으나, 그 공격을 해 온 이의 정체를 감안한다면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긴 했다.
“이런.”
정시우는 그의 눈앞에서 분노를 발산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일찍 만나 버렸네.”
“그분께서 알려 주신 것이다…… 네놈이 바로 나의 것을 훔쳐 간 쥐새끼라고!”
정시우의 능청과는 달리 남자는 분노를 올곧게 폭주시키며 사납게 기세를 피워 올렸다.
군단의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이, 케나토와 조우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