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147화.
[주인님은 나보다 강하지 않은가. 레벨은 내가 높다 해도 그 타고난 배틀 센스와 괴력은 이미 인지를 초월한 영역의 강함이다.]
“내가 배우고 싶은 건 무수한 세월 네가 갈고닦아 온, 육체와 마력을 조화시키는 바로 그 전투 방법이야.”
[벼룩의 간을 내어 먹겠다는 것인가…… 훌륭하군.]
케이나에게 대련을 부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평소 베토와 함께 있지 않을 때면 그녀는 주로 용세하의 수련을 돕곤 했는데, 거기에 정시우가 끼어들었을 뿐이었다.
용세하와 케이나가 함께 수련을 할 때면 정시우 홀로 마나를 다루고 용의 감각을 활성화하는 수련을 하고, 둘의 수련이 끝나면 정시우와 케이나가 붙는 것.
데스나이트이던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는 일반적인 생물과는 구조가 조금 달라 피로의 축적이 덜했고, 연이은 노동에도 견딜 수 있었다.
[아마 주인님은 이게 배우고 싶은 것이겠지.]
정시우와의 첫 대련. 케이나는 마력을 빠르게 쏘아 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의 등 뒤에 도달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던 정시우는 늦지 않게 그녀가 내려친 검을 막아 낼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의 선공을 막아서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거.”
[사실 나는 아직 미숙한 수준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마나와 동화된 이들은 움직임의 선후를 구분할 필요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충은 알고 있어.”
육체의 움직임에 마나가 따르는 것도 아니고, 마나의 움직임에 육체가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 둘이 완전히 같은 영역에서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 정시우는 이미 그 감각을 용을 통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네 기술이라도 익혀 두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것 같아.”
[나는 다르게 생각하지만…… 좋다. 일단 부딪혀 보지 않겠는가.]
그전에 있었던 용세하와의 대련은 아기 손장난처럼 여겨질 만큼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둘 다 마나를 부여해 강화한 목검을 사용할 뿐이었지만 한 방 한 방 스칠 때마다 방어구가 우습게 터져 나갔다.
케이나의 뛰어난 마력 컨트롤, 용의 감각에서 비롯된 정시우의 마나 파악과 육체 능력이 조화를 이루어 겉으로 보기엔 둘이 합을 맞추어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누군가 한눈을 팔기라도 하면 목숨에 직결되는 상처를 입게 될 순간이었다.
“후, 후우…….”
[이 괴물…… 정말 터무니없는 육체구나!]
드래곤나이트로 거듭나며 가뜩이나 경지에 이르러 있었던 케이나의 마나 장악력은 수위에 이르러 있었거늘 정시우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따라잡았다.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전신의 감각으로 그녀의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파악해 반응하는 것이다!
[주인님은 천재인가!?]
“맞아!”
[과연, 정말 재수가 없군……!]
서로가 적극적으로 액티브 스킬을 구사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만, 무수히 부딪혀 서로 손상되는 와중에 아주 조금씩 그들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려 세 시간, 휴식처에서는 마나와 체력이 소모되지 않는 탓에 무한하게 공방을 주고받던 그들은 대련 시간이 끝났다는 용세하의 선언이 있은 후에야 간신히 그 자리에 멈추어 설 수 있었다.
[부여 스킬이 Lv52가 되었습니다.]
[전투질주 스킬이 Lv48이 되었습니다.]
“하.”
정시우는 숨을 헐떡이던 도중 눈앞으로 떠오르는 메시지에 웃어 버리고 말았다.
“진즉 붙을 걸 그랬네.”
[그동안은 제법 바빴으니까 말이지.]
케이나 역시 투구를 벗으며 제법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휴식처 안에서는 피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해도, 용의 위엄을 지니고 그것을 전투에 응용하는 정시우와의 대련에서는 끊임없이 압박감을 받는다. 그것만으로도 한 수 지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짧은 대련으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짧다니…….”
강자들의 전투를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용세하가 중얼거리는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케이나가 말했다.
[주인님, 주인님은 아무래도 나의 마나 테크닉을 익히지 못할 것 같다.]
“아, 왜.”
[간단하다. 주인님의 육체는 너무 뛰어난 것이다.]
케이나는 다 부러진 목검을 마나로 깔끔하게 없애 버리며 설명했다.
[나는 육체의 움직임에 한계를 느껴 마나를 수련했다. 그 결과 마나의 움직임에 육체를 뒤따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인님은 어떤가? 타고난 육신이 뛰어나도 너무 뛰어나다. 본능의 영역에서 육신이 움직이니 마나는 그것을 뒤따를 수밖에.]
“하지만 육체만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이 있잖아.”
기형적인 각도로 움직이거나, 허공에 뜨거나, 도저히 불가능한 틈 너머에서 나타나거나 하는 일이 그렇다.
케이나의 육체가 선행한 마나를 쫓아 움직이는 그 짧은 한순간, 명백하게 그녀의 육체는 물리의 영역을 벗어난다. 마치 뱀파이어가 안개화하여 벽 너머 공간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기분이다.
[그렇다. 권능이라 부르기엔 미약하나 육체가 마나를 닮아 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지. 그러나 이건 그것이다. 쥐가 어떻게든 작은 구멍에 몸을 밀어 넣으려다 보니 익힌 재주지. 하지만 주인님, 호랑이가 작은 구멍에 몸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없지.”
[하지만 호랑이는 구멍 자체를 부숴 버릴 수는 있을 것이다. 주인님의 육체와 마나는 바로 그런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보다 쉽고 간단한 방법을 익혀 버린 육신이, 그보다 효율도 떨어지고 귀찮은 방법을 익힐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방금, 굉장히 비비 꼬아서 무식하게 힘만 세다는 욕을 한 것처럼 들렸는데 아닌가. 쥐와 호랑이라는 단순 비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 녀석 분명 방금 욕했다! 시선도 외면하고 있잖아!
[그러니 뭐어, 그리 걱정은 마라. 육체와 마나의 조화를 위해 굳이 두 가지 길을 모두 걸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마나가 육체를 따르든, 육체가 마나를 따르든 종래에 둘이 일치되기만 하면 길은 열릴 것이다. 주인님은 주인님의 방식을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나보다는 확실히 빠르게 방법을 찾을 것이다.]
“끄응…….”
[반면 용세하, 너는 나와 같은 쥐다. 그러니 내 방식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따라와라.]
“여, 열심히 할게…….”
케이나가 쥐라면 자신은 쥐며느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과연 가능할까. 용세하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은 공방을 보며 잔뜩 풀이 죽어 있었으나 자신을 똑바로 보며 말해 오는 케이나의 눈앞에서 차마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형님?”
정시우는 그런 용세하를 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녀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넌 빠르게 강해졌어. 태평양에서도 이전 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르고 영리하게 움직였고. 거리는 확실히, 그것도 빠르게 좁혀지고 있으니까 걱정 마. 이미 어지간한 랭커 수준이니까.”
“다른 플레이어들을 보면 자신감이 생기려다가도 형님을 볼 때마다 그것이 주기적으로 수그러듭니다만…… 형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힘내 보겠습니다.”
용세하는 기운을 내어 웃었다. 정시우는 녀석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세리아와 녀석의 데이트 자리를 마련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둘을 케이나가 은은한 미소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더 흘렀다. 한겨울의 와중에 해가 바뀌어, 정시우는 일행과 함께 제야의 종소리도 들으러 나갔다. 이서희와 사귀던 때에나 하던 일인데 아무래도 새 식구가 늘어나니 행사 참여에 대한 압박이 들어온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그냥 넘긴 벌이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 정말 몰랐다니까.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렇다. 정시우는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에 던전을 클리어하느라 그 대형 이벤트를 완벽하게 스킵했고, 내심 정시우와의 첫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고 있던 수아린이 완벽하게 삐지는 바람에 그것을 달래 주기 위해 이 오밤중에 나온 것이었다.
“어떻게 지구가 멸망하지 않은 채 새해가 밝았네요……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시우 님.”
“시우,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아, 시우야.”
종각에는 무시무시한 인파가 모여 있었으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그 인파를 물리치고 일행과 합류했다. 정시우는 일행과 덕담을 주고받으며(이서희와는 서로 살짝 미묘한 기분이 되었지만) 신년을 맞이했다.
“아, 벌써 34단계 던전이 클리어 됐다고? 31단계 던전 다음에 32단계 클리어하기까지 제법 걸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들 초조해졌거든. 무리하다 죽어 나가지만 않는다면, 되게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서희, 시우한테 말할 거 있지?”
마리나의 재촉에 따스한 캔커피를 마시던 이서희가 한 손만 들어 브이자를 그렸다. 무척 귀여웠다.
“나 이번 최초 클리어 명단에 이름 올렸어.”
“대단한데.”
실은 녀석들에게 유령을 붙여 두고 있었기에 다 알고 있었지만 정시우는 완전히 모르겠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이서희는 아직까지 레벨로는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하지만 능력의 특수성을 인정받고, 마리나, 세리아와 함께 34단계 클리어의 주축이 되어 활약했다.
그 레벨 차이도 이대로만 하면 완벽히 따라잡게 될 터, 다른 이들이 보면 재능빨이라며 욕하겠지만 정시우에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요정상인과 만났어.”
“어…….”
그건 확실히 대형 뉴스였다. 던전 안에까지는 유령이 들어갈 수 없어 던전 진입 전후의 사정은 알아도 내부 정보는 얻지 못했던 것이다.
“루타와는 다른 녀석인데, 시종 모르겠는 소리를 하면서 물건을 팔려는 건 같아. 어쨌든 그 녀석 덕에 보스 몬스터를 여유롭게 잡을 수 있었던 건 사실이고…….”
“이강후는 요정상인을 조금 거세게 몰아붙이다가 거래 영구정지를 먹었고.”
쌤통이라며 웃는 마리나. 아무래도 은근한 데이트 권유가 계속해서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세리아와 더블로 말이다.
“번개나 더블로 맞고 죽었으면…….”
“뭐 하나 꼬투리 잡으면 말해. 패 줄 테니까.”
“고마워!”
일행은 진지하게 얘기를 주고받는 마리나와 정시우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런데 이대로 일행을 끌고 맥주라도 한잔 걸치러 가려 했던 정시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으음…….”
“뭐야, 설마 또 무슨 일 일어났나? 우린 전화 안 왔는데?”
모이기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통에 오늘은 어지간한 일을 처리하고 왔는데! 마리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래도 휴식처에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다음에 또 놀자.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나도 갈래!”
“나중에. 알겠지?”
“우으으.”
마리나의 어리광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부드럽지만 엄격한 거절이었다. 마리나가 차마 더 부탁하지 못하고 쭈그러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세리아는 어째서 에단 비셋이 정시우를 마리나의 짝으로 점찍었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고 말았다.
“또 뭐길래…… 급한 일은 아니잖아요.”
“아직 포투포우의 전면전이 심화된 것도 아닐 텐데요, 형님.”
“그렇지.”
물론 그쪽 세상에도 유령을 몇 남겨 두고 오긴 했다. 그쪽 세상은 확실히 이제라도 곧 터져 버릴 만큼 긴장감이 심해진 상황이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애초에 정시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휴식처와 관련된 일이었다.
“베토가 드디어 완성한 모양이야.”
마리나 일행과 헤어져 휴식처로의 문을 열며 정시우가 하는 말에, 수아린은 잠시 그게 무슨 말인가를 생각했다.
“헉!?”
그리고 떠올렸다.
요 몇 달간 베토가 연구하던 것의 정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