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142화.
“분위기 한 번 제대로 조졌네요.”
“선상 연주회라도 열면 좋을 텐데.”
“그만둬요, 저 뱃머리 무섭단 말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녜요.”
유람선은 완전히 장례식장 분위기가 되었다. 차라리 화물선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부러운 상황. 민간인들과 플레이어들 사이에 완벽히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솟아났으나 정시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는 타인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사람들 신경 쓸 시간에 우리의 적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해.”
“그 인어 사체…… 우와아.”
정시우가 객실 바닥에 철퍼덕 꺼내 놓은 인어 사체를 본 수아린이 기겁하여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럽게시리 다 내놓고 다니다니!”
“네 손가락 틈 벌어진 거 다 보인다.”
그것은 상어의 하반신과 인간 남자의 상반신을 지니고 있던 인어였는데, 가장 레벨이 높았던 탓에 죽고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던 놈이었다. 구체적으로는 220레벨 정도 되었다.
“220이면 제법 높지만…… 지금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네요.”
“그래. 지금 바다에 이런 놈들만 있다면 말이야.”
정시우는 코웃음을 치며 인어를 루팅했다. 마석은 나오지 않았다. 놈은 체내에 마나가 뭉칠 만큼 엘리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혀를 차며 수아린에게 물었다.
“물의 신, 혹은 바다의 신을 알아?”
“신에 대한 정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제한적이었다구요, 오빠. 적어도 저는 들어 본 적이 없네요.”
적의 정체를 보다 명확히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유감이었다. 그는 저녁 중으로 마리나나 세리아에게라도 상담해 보자고 마음먹으며 시체를 해치웠다.
몬스터들의 습격은 그 후로도 몇 시간 단위로 이어졌다. 첫 전투에서 느낀 것이 있는지 해표면으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바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돌진해 왔으나, 정시우를 비롯해 몬스터의 기척을 느끼는 데 재주가 있는 플레이어들이 놈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대응했다.
“인어가 주축인 모양이지?”
“나도 해상 던전에 몇 번 들어간 적은 있는데, 인어의 신에 대해선 잘 몰라.”
“하늘성인데 해상 던전이라니.”
“넌 개미굴인데 호수 있잖아.”
전투 중에 몇 번이고 마주친 마리나 역시 놈들을 다스리는 신의 정체에 대해선 난색을 표했다. 단지 그들이 한 가지 파악한 사실이 있다면, 아마도 헤데아라고 불리는 인어들의 신이 이미 지구에서 상당히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굉장히 끈질기고 집요하며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지성을 지니고 있어요. 더욱이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의 항로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시우 님, 어쩌면 이 항해의 끝이 그리 좋지 않을지도 몰라요.”
세리아는 처음부터 이 계획을 안 내켜 한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일단 플레이어만으로 구성된 선단으로 항해를 하며 바다 몬스터들을 소탕하고, 절대수가 줄어든 시점에서 비로소 무역을 재개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 그 부분에선 정시우와 생각이 일치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많고, 적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원래 사람들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걸 좋아하잖아. 그리고 언제나 그런 마인드가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지.”
정시우는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로 했다.
“화물이건 사람이건 신경 쓰지 말고 몬스터만 죽여. 나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여기 함께한 거니까!”
“과연, 역시 시우 님은 현명하십니다!”
“아아, 오빠가 애꿎은 사람을 물들이고 있어…….”
플레이어는 많았지만 그들을 습격해 오는 몬스터는 더욱 많았다. 아무리 정시우가 해머를 내리쳐 해일을 일으킨다 해도 바다 깊숙이 잠수해 돌격해 오는 몬스터들을 모두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어이 항해 이틀째에 이르러 화물선 한 척이 침수되었다. 플레이어들 몇몇이 배로 들어가 화물들을 인벤토리에 담아 나오기는 했으나 당연히 모두 건질 수는 없었다.
“정부가 원하는 것은 데이터입니다. 인간이 몬스터의 위협을 이겨 내고 무역산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고 싶은 겁니다.”
“이 이상 화물에 손해를 입혀선 안 돼. 전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어.”
그러나 사흘째에 화물선 세 척이 성대하게 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게 되었을 때는 그 누구도 더 이상 본전 얘기를 꺼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인간이 세운 야심찬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마리나가 그 사실을 전해 오자 정시우는 훗, 뻐기듯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유람선 쪽은 첫날 저녁부터 이렇게 우중충한 분위기였는데.”
“자랑이다.”
그렇게 캘리포니아에서 뉴질랜드로 가는 바닷길의 정확히 중간 즈음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 번 인어를 위시한 해상 몬스터의 대대적인 공격이 그들을 덮쳐 왔다.
[우리의 제국은 인간에게 내어주지 않는다!]
[동포들이여, 인간들에게 헤데아 님의 공포를 새겨 주자!]
문제는 그 규모였다. 거듭된 습격과 화물선 침수에 인간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다는 것을 예측이나 한 것처럼 기회는 이때다 하고 까마득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몰려온 것이다.
“이게 뭐야…….”
정시우는 저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우글거리는 해상 몬스터들을 보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규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용의 감각이 그에게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지상에 나타나는 몬스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저력을 지닌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 안에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는 수준의 강자가 있음을!
[저건…… 루이노스 리자드의 성체 이상이군.]
“말은 참 쉽다.”
[그 정도 강함이라면 나와 주인님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이 인간들 중에도 몇몇은 눈에 띄는 강함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 않은가.]
마리나와 세리아를 일컫는 것이리라. 정시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일행을 모두 불렀다. 수아린에 용세하, 마리나와 세리아, 그리고 이서희까지. 일행은 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해했다.
“시우야, 정말 이곳을 비워도 괜찮을까? 저만한 숫자와 충돌한다면 분명 이 선단은…….”
“괜찮아. 저놈 못 막으면 어차피 전멸이야.”
최악의 경우라도 날개가 있는 플레이어들은 도망칠 수 있겠지만 인간들은 싸그리 침수다. 한 천 년쯤 후에 화물선의 화물들과 함께 고대 문명의 흔적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럼 가자.”
날개가 있는 플레이어들은 날았고, 케이나만은 정시우의 뒷자리에 탔다. 그들이 선단을 이탈하여 특정한 곳을 목표로 돌진하기 시작하자 해상 몬스터들이 제각기 물 위로 고개를 내밀어 공격을 가해 왔다.
[대장이 도망친다!]
[저놈만은 죽여야 해!]
그동안 목숨 걸고 싸워 온 주제에 정시우의 성격을 모르다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정시우는 해일을 일으켜 자신을 공격해 오는 인어들에게 크리티컬 불릿으로 대답해 주며 바이크의 속도를 올렸다.
“잠깐만, 해일?”
“오…… 맙소사. 오빠, 뒤를 보세요.”
뒤로 고개를 돌리니 인어들이 떼로 몰려와 해일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과연 해상 몬스터임을 실감하게 하는 엄청난 규모의 공격에 지척에 있던 화물선 두 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시작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저 자식들 나 따라 하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인어 수만 명이 모여야 만들어 낼 수 있는 해일을 오빠 혼자서 만들어 냈다는 게 놀라운데요…….”
수아린은 인어들의 대공습에 우왕좌왕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을 보며 짧게 묵념했다. 이젠 몇 척이나 살아서 갈까, 는 무슨 가기는 할까가 문제였다.
정시우는 유람선이나 화물선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버리고 바이크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으나,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인간의 대장이 탈주한다!]
[비겁한 자, 저자의 목을 따라!]
“이 새끼들 아까부터 왜 이래? 왜 멀쩡한 사람한테 누명을 씌우는 거지?”
인어와 그들이 이끄는 몬스터들이 아까부터 두 부류로 갈려, 한 부류는 선단을 공격했고 한 부류는 죽자 사자 정시우만을 따라오고 있었다. 정시우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놈들의 단어 선정이었다.
[도망자!]
[도망자가 간다!]
“내가 지들 보스한테 돌격해 주는 걸 모르나?”
“그냥 오빠를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생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주인님.]
그의 서포터들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던 가운데, 조용히 전투의 순간을 기다리던 케이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혹시 저들은 지금 우리가 잡으려 하는 몬스터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 아닐까?]
“뭐……?”
정시우가 반박하려던 바로 그 순간,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지점 부근에서 실로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았다.
마나를 품고 빠르게 회전하며 치솟는 물기둥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인어들의 몸이 잔혹하게 찢기고 갈리는 모습에 수아린은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터무니없이 강대한 마력, 마법이라고 불러 마땅할 힘!
“아, 그렇구나.”
정시우는 그 장면을 보며 깨달았다. 심해로부터 거대한, 아주 거대한 괴물이 입을 벌리며 부상하여 수천 마리의 인어를 한꺼번에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인어들이 저마다 비명과 분노의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 생생하게 그들의 귓가를 두드렸다.
“케이나의 말이 맞았어. 서로 아군이 아니었구나.”
[쿠아아아아아아아아!]
어딘가 고래를 닮은 거대 괴물이 함성을 지르자, 놈의 마나가 대규모 마법이 되어 바다를 움직였다. 인어들이 일으켰던 해일 따위는 우습게 보일 만큼 높이 치솟은 수십 개의 물기둥이 바다 위에서 믹서기처럼 회전을 일으켜 사방의 인어들을 갈아 버렸다.
그것과 함께.
[놈들을 죽여.]
[우리의 바다에서 놈들을 몰아내.]
[헤데아…… 엿 먹어라!]
거대 고래와 함께 여태껏 모습을 감추고 있던 바다 괴물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들을 공격하려던 인어들과 해상 몬스터들이 놈들의 타격에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일행은 아주 잠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두 눈만 끔벅였다.
“지금 이게…….”
“대체?”
정시우와는 달리 일행은 인어들의 말도, 고래 괴물들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나 그들의 말을 모두 해석할 수 있는 정시우만이 상황을 명백하게 파악했다.
처음 그는 두 몬스터 무리가 아군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인어들은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고, 심해 몬스터들은 기척을 완벽에 가깝게 감추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은 인간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어들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오히려 케이나와 정시우가 사기에 가까운 감지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미리 알아챌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그들이 심해 몬스터들을 쫓아온 바람에 놈들이 자극을 받아 빨리 움직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신에게 저항하는 이들은 인간뿐만이 아니었던 거야.”
그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놈들은 적의 적이야.”
“너무 간단해졌어요!”
정시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해상전이 재미없어서 따분해하던 찰나였는데, 설마 몬스터와 몬스터의 격돌을 보게 될 줄이야! 그의 사고가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고래 괴물은 분명 강적이고 그에게 상당한 즐거움을 안겨 줄 터였으나, 그는 지금은 잠시 전투에의 욕망을 억누르기로 했다.
“놈들이 우리 아군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용해 먹을 수 있겠지.”
[몬스터와의 임시 동맹인가. 아직 신에게 지배당하지 않은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군.]
케이나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사실 나머지 일행은 그리 재밌지 않았다. 최종적으로는 이세계에서 넘어온 몬스터들뿐만이 아니라 지구에서 발생한 몬스터들과도 싸워야 할 터인데, 벌써 저 고래만큼 강대한 적이 탄생했다는 사실에 앞날이 컴컴하게 느껴진 터였다.
“그러면 싸워 보자고! 인어들 중에 강한 놈들을 저 고래한테 던져 주면 둘 다 약화시키고 일석이조 아닐까?”
[주인님, 저기 적당한 놈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뒷일 따위 걱정하지 않는 정시우는 팬텀바이크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인어들에게로 질주했다. 그의 한 손에 들린 슬레지 해머가 빛을 토해 내며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해상 최대 규모의 삼파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