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화.
지구의 모든 바닷길이 막힌 것은 정시우가 개미굴 던전의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 지상에 몬스터가 범람하게 되었을 즈음이다.
지구가 뉴 에이지에 돌입하기 이전에도 이미 던전의 몬스터들은 해상으로 풀려나고 있었고, 해상이라는 환경에 적응한 몬스터들이 바다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인간들은 바다에 쉬이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맛보기 힘든 것은 생선과 해조류 등 바다에서만 거둘 수 있는 것들이지.”
“인간 대신 몬스터들이 그걸 먹어 치우고 있다 이거지.”
지상은 그나마, 그나마 생태계 보존이 잘 된 편이다. 하지만 해상 생태계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는 전문가들도 쉬이 예측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을 알아보고자 해도 몬스터의 위협이 극심하여 차마 탐색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이상 무역길이 막히면 모든 나라가 막심한 손해를 입게 되고! 그래서 이번 남태평양 항로 개척이 제시된 것이라는 말씀이지.”
“남태평양 항로라고 해도……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나온 말일 뿐이고,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출항하여 태평양 전역을 훑고,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전부 왕복하게 됩니다. 물론 이번에 한국이 포함된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죠, 시우 님 입김이 거셌습니다만.”
“나 입김 분 적 없는데.”
정시우는 B&Y 본사 빌딩에서 자신을 맞이하며 말하는 마리나와 세리아에게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세리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했다.
“시우 님과 같은 분은 그 자리에 가만히만 있어도 타인들이 알아서 눈치를 보게 되는 법이지요. 한국은 시우 님을 지금보다 더 우대해 드려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얘 말하는 거 부담스러워.”
“새삼스럽게 부담스러워하기는.”
마리나가 낄낄 웃었다. 사실 마리나도 그에게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정시우는 그녀들에게서 눈을 떼어 저 너머, 해안에 정박한 배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무지막지하게 큰 화물선이 족히 수십 척 나열해 있는 모습이 실로 장관이었다.
아직 안전이 확보되지도 않은 상황에 대규모 화물을 운송해도 되는 것인가, 정시우는 어이가 없어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가 책임져야 할 것도 아니니 아무래도 괜찮았다.
“서희는 지금 결계 설치를 위해 돌아다니고 있어.”
“아, 그래?”
어쩐지 배에서 마력이 느껴진다 싶었다. 급진적이지는 않아도 천천히, 천천히 마도와 현대 공학이 섞이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서희가 결계 마법에 관해선 1인자라 불릴 만하다지만…… 글쎄. 지금 지구의 힘으로 그녀의 결계를 백퍼센트, 그것도 저 많은 배를 상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있었다.
“뭐야, 자세히 보니 유람선도 끼어 있잖아.”
“남들 목숨 걸고 하는 일이 구경거리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급 지옥행 익스프레스.”
마리나의 말이 섬뜩하니 무서웠다. 그녀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리며 세리아가 추가로 설명했다.
“보다 정확히는 지금 지구에 닥친 변화를 산업혁명이나 IT혁명쯤의, 인간에 의해 발전되고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하는 윗대가리들의 자기과시욕에서 비롯된 만행입니다.”
“네 말이 더 무섭거든.”
정시우는 어이가 없어 반문하며 손을 들어 머리 뒤에 깍지를 꼈다.
“위험성에 대해선 다 설명된 거지? 지금 화물 안전 보장도 힘든 판에, 플레이어들이 사람들 구하려고 제 목숨을 바칠 것 같진 않은데.”
“플레이어는 인간을 구할 의무를 짊어진 자들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더한 특권층. 던전에서 현금을 얻지 못하게 되어 국가나 기업이 그들을 부릴 기반이 마련되기는 했지만…… 글쎄요,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포투포우에서 필사적으로 인간들을 지키며 저항하던 저항자들에 비하면, 지금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정시우는 그쯤에서 사고를 멈추었다. 자기 자신도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질타가 스스로에게서 튀어나올 뻔했기 때문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그들을 가볍게 적시고 있었다. 하늘은 먹구름, 곧 태풍이 올 것만 같은 날씨였다. 정시우는 쓸데없는 복선을 싫어했지만 이번엔 정말 태풍이 한 번 제대로 몰아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우리도 가보자고. 안 그래도 해양 몬스터들에게는 갚아 줘야 할 빚이 있었으니까.”
“빚?”
“그냥 잡고 싶다고 혼자서 생각한 것뿐이면서.”
정시우의 말에 수아린이 태클을 걸었다. 정시우는 그것을 무시했다.
[배에는 처음 타 보는군. 저 너머가 바다인가…….]
“이 여자 데려왔어!?”
정시우의 뒤를 담담하게 따르는 흑갑주의 기사, 케이나의 모습을 확인한 마리나가 기겁하며 외쳤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녀들만은 케이나의 정체를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정시우는 굳이 그녀의 존재를 감출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케이나가 그녀답지 않게 살짝 들떠 보이는 것이,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육지의 인간이었다. 따라서 생선도 먹어 본 적이 없다.]
“지금 지구 꼴을 보면 당분간 못 먹을 테니 미리 미안하다는 말을 해 둘게.”
바로 얼마 전에 휴식처에서 연어구이를 먹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다가 미처 이 꼴이 나기 전 쇼핑해 둔 것으로 실은 당시 그들의 운이 무척 좋았던 셈이었다.
정시우는 그때 먹었던 연어의 맛을 되새겨 보며 힘차게 발을 내뻗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앞으로 그들의 식탁 위로 다시 연어가 올라올 수 있을지 없을지가 모두 지금 그들의 행보에 달려 있었다.
그 시작은 제법 괜찮았다.
“모든 배에 결계가 설치되어 있어. 봐, 플레이어들이 여기에 마나를 불어넣으면…….”
결계 담당자 이서희가 소형 아티팩트의 기능을 설명하며 정시우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그것을 나누어 주고 다녔다.
플레이어들의 마나를 빨아들여 가동하는 결계와, 그것을 보조하는 마나 흡수, 증폭기. 비록 얼마 쓰지 못하는 소모품이지만 이번 항해에 한해서는 역할을 톡톡히 발휘할 터였다.
“아, 출항하네.”
“평소에 날아다니기만 하다가 배 위에 있으려니까 지겨운걸.”
미국 주도로 진행하는 일이 뭐 하나 크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번 일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컸다. 레벨 200을 넘기는 플레이어 5천 명이 참가한 이번 캠페인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 항로에 끼어 있는 나라들은 더했다.
“이번 항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유럽 항로에서도 비슷한 캠페인이 생기겠지.”
“그래도 무역 규모는 앞으로 차차 줄어들 수밖에 없을 거야.”
배가 뜨지 못하게 된 이후로 각국은 인벤토리라는 넓은 아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이용해 무역을 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력을 지닌 플레이어들이 해야 할 일은 그것 외에도 많고 많았다. 도저히 이전의 규모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지금도 봐, 수천 명 규모의 플레이어가 달라붙어야 겨우 가능한 일이잖아. 한 번 배를 띄울 때마다 이 많은 플레이어들을 동원할 거야? 저얼대로 불가능하지.”
사람들은 아마 인간이 다니는 길을 확보해 그 경로에 있는 몬스터의 숫자를 줄여 놓는다면 적은 플레이어들만을 데리고도 무역길을 틀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몬스터를 동물처럼 취급하는 책임자들의 발상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그것마저 실패한다면 앞으로 해상무역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바다의 몬스터들은 강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끝없는 가능성이, 끔찍한 잠재력이 있다고 말이지. 우리 세상은 멸망할 때까지 끝내 바다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지…….]
“아직 지구의 몬스터들은 그렇게 강하지 않으니까 안심해.”
이세계에서 넘어온 몬스터들이 많다지만 그들 대부분은 바다에 적응하지 못해 죽었을 것이다. 지구가 뉴 에이지를 겪은 이후부터는 지구에서도 자체적으로 몬스터를 생산하고는 있지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그리 강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정시우의 말에 케이나는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 표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대꾸했다.
[강자는 많은 시간 단련하여 탄생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이다. 듣자하면 주인님도 그렇게 강해진지 얼마 안 되었다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지만…….”
그때 그들의 뒤로 다가오며 말을 건네는 이가 있었다. 이서희였다.
“시우야, 밥 먹자. 무슨 파티를 한다고 하던데?”
플레이어들은 각기 다른 배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정시우와 이서희는 유람선에 타게 되었다. 아무래도 화물선보다는 환경이 나은 편인지라 다른 플레이어들의 질투를 받는 포지션.
물론 정시우는 초호화 객실이든 짐칸이든 누운 지 3초 만에 잠들 자신이 있기에 별로 따지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말이다.
“파티는 무슨 얼어 죽을…… 그래,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다녀와라. 나는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겠다.]
바다가 무섭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케이나는 바다에서 도저히 눈을 떼질 못했다. 그는 피식 웃어버리곤 수아린과 용세하를 이끌어 이서희의 뒤를 따랐다.
“호, 정시환의 아들이라고.”
“미스터 정의 아들이었어?”
불과 20분 만에 정시우는 선상으로 나온 모든 이의 주목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지닌 타이틀도 타이틀이었거니와, 간을 내놓고 타는 이번 유람에 참가한 사람들 중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환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지. 이것 참, 이리 보니 놀랍군.”
“반가워. 자네가 있어 주어 아주 든든해.”
“시환은 잘 지내나?”
정시우는 맘 편히 먹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 무척 화가 났다. 그러나 아버지를 안다고 하며 티를 내는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어 대충 대꾸해 주며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모든 음식을 입 안으로 쓸어 담았다.
괜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싫어 얌전히 정시우의 뒤에 붙어 있던 수아린은 마찬가지 모습으로 정시우 곁에 있는(선상의 신사들은 지극히 점잖아 정시우의 곁에 있는 여성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단순히 정시우가 무서워서일지도 모른다.) 이서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오빠 아버님 대체 뭐하는 분이세요?”
“아주머니 하는 일도 모르는데 아저씨 하시는 일을 제가 어떻게 알아요. 가끔씩 출석 부르던 노교수님들도 시우 보고 깜짝 놀라고 하던 거 보면 그냥 엄청 유명한 분이긴 한가 봐요.”
그때 배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바다 위의 배가 흔들리는 일 따위는 너무 흔해 굳이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 사람들도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담소를 나누었다.
“시작이네.”
오직 정시우만이 가벼이 중얼거리며 한 손에 쥐고 있던 버튼을 꾹 눌렀다. 그 순간 배 위로 얇은 마나의 막이 둘러쳐지는 것이 보였다. 그 한 명의 마력만으로 결계가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음 순간 잘게 찢겼다.
“1초도 안 가잖아 이거!”
“읏, 지금 온 거야?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이서희가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이미 결계의 근원이 훼손된 탓에 다시 결계가 발동하는 일은 없었다. 그사이 정시우는 한 손에 든 닭다리를 입에 우겨 넣고는 손을 옷깃에 스윽 닦았다.
“아이 더럽게!”
“배에 구멍 뚫리기 전에 가자!”
정시우가 망치를 꺼내어 쥐었다. 허공에 파직파직 튀는 스파크에 선상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오오, 하고 감탄사를 올리는 순간, 그는 사람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뱃전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보였다. 상어를 닮은 매끄러운 몸체의 몬스터 무리가 재차 배를 향해 덤벼드는 모습이. 문제가 있다면, 그보다 더 많은 몬스터가 유람선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대의 화물선에서도 마악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몬스터 무리에 의한 동시 습격! 결코 지성도 없는 몬스터들이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다.
“오빠, 이거…… 작정한 것 같죠?”
“그러게. 바다만은 내어줄 수 없다는 결의가 느껴지는데.”
정시우는 수아린의 말에 농담조로 응수하며 한 손을 들어 크리티컬 불릿을 쏘아 냈다. 이제 막 배에 부딪히기 직전이던 상어떼의 선두가 그것에 꿰뚫려 사망했다.
“이거 뉴질랜드 도착하기 전에 배 몇 척이나 침몰하려나…….”
“그런 재수 없는 복선 깔지 말라니까욧!”
정시우는 팬텀바이크를 꺼내어 탑승했다.
지구 역사에 길이 남을 태평양 전투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