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39화.
“오빠, 캐노피 좀 달아 주세요.”
“너도 성장했구나.”
“네?”
“아무것도 아냐.”
여자들이 꺅꺅거리며 타X팰리스…… 2층 규모로 넓어진 휴식처를 구경하는 사이, 방에서 나온 수아린이 정시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드디어 시답잖은 이유로 다른 여자를 질투하는 것은 관둔 것일까.
정시우는 수아린이 성장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같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본 것만으로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압도적인 우위를 구축했다고 멋대로 믿게 된 수아린이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수아린의 침실에 캐노피를 달아 주고 나오자 마리나가 잽싸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시우, 그래서 개틀링은? 저기 주방에서 하는 거야?”
“아니. 그렇게 금방 되는 게 아냐. 거주지역에서 할 거야.”
“거주지역!?”
마리나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어차피 휴식처에 이들을 데려온 시점에서 거주지역에까지 들일 생각을 하고 있던 정시우였기에, 별 고민 없이 그들을 이끌었다.
“넓어!”
“아공간이 아닌가……!? 이렇게 넓은 아공간을 유지하려면 보통 마력으로는 안 될 텐데!”
“이세계…… 이세계군요!”
거주지역의 어마어마한 넓이에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세리아마저 흥분했다. 그는 그들을 이끌고 대장간으로 향했다. 마법으로 고정된 파라솔 아래에서 쉬고 있던 루타가 그들을 발견하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려오라는 이세계 사람은 안 데려오시고 왜 같은 지구인을 데려오신 거죠?”
“우리보다 먼저 데려온 사람이 있었어……?”
정시우는 정말이지 귀찮았지만 오해를 막기 위해 최대한 간단하게 루타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마리나는 설명을 듣자마자 루타에게 거래를 요청했으나 정말 의외롭게도 루타는 딱 잘라 그녀를 거절했다.
“저는 정시우 님을 전담하는 요정상인이랍니다. 요정상인과의 거래를 원하시거든 하늘성에서 만난 요정상인과 해 주세요.”
“있기는 있단 얘기네?”
“물론이죠. 이 이상은 돈을 받습니다!”
마리나가 주저 없이 달러 다발을 꺼내 들자 루타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저희는 그런 종이가 아니라 비드로만 거래한답니다.”
“여기가 던전도 아니고 비드가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바보야.”
“그래서 제가 당신 하고 거래를 안 하는 거랍니다, 무뇌 아가씨.”
“……시우, 얘가 나 괴롭혀!”
정시우는 울며 매달리는 마리나를 적당히 달래 주었다. 그러면서 요정상인의 개념을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엔 개미굴의 관계자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저들은 기본적으로 하늘성, 다른 세계에서 부르는 육성소의 시스템에 개입하여 플레이어, 혹은 저항자를 돕고 그 대가로 비드를 취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금칙사항이랍니다!”
“안 물어봤거든.”
“시우, 안으로 들어가자. 나 쟤 싫어.”
일행은 비밀상점을 칭하는 주제에 정시우 외의 누구와도 거래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요정상인 루타로부터 관심을 거두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복 차림의 케이나와 마주하며 마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또 여자야!”
“얘는 내 부하. 처음엔 데스나이트였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케이나다. 지금은 드래곤나이트다.]
“앗, 주인님 오셨군요!”
“헉, 이번엔 남자애다!”
“귀엽다!”
케이나와 조우했을 땐 인상을 찌푸리던 이들이 그녀의 뒤를 이어 베토가 나오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베토의 매력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정시우는 마리나를 비롯한 이들이 베토에게 접근하려는 것을 대검을 뽑아 들고 막는 케이나의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눈에 담으며 인벤토리에서 개틀링 건을 꺼내어 놓았다.
“베토, 이게 견본이야.”
“와아, 정말 크네요.”
베토는 평소에 케이나에게 시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정시우의 부름에 얼른 누나들로부터 벗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M61 Vulcan의 설계도면까지 프린트해 베토에게 주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굳이 현대의 기술을 따라 할 필요는 없어. 마도공학으로 이것과 비슷한 개념을 구현할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아뇨, 본받을 요소가 많아 보여요. 제아무리 마나로 구동하는 물건이라고 해도 결국 그 물건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니까요. 지구의 인간들은 몬스터와 맞서기 위해 마나 없이 여기까지 기술을 발전시켰군요!”
순수한 베토의 머릿속엔 인간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 공학을 연구했다는 발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한 번 연구해 볼게요! 탐구해 볼 가치는 충분해 보여요!”
“좋아, 내가 기대하던 대답이야.”
베토의 믿음직한 선언에 정시우는 크게 만족했다. 그 뒤에서 (케이나에게 저지되어) 다가오지 못하고 멀뚱히 지켜보기만 하던 마리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그 아이가 총을 만든다는 거야?”
“아린아, 보여 줘라.”
“네.”
그로부터 1분 후, 테일러형 마포의 정보를 확인한 마리나는 다시 한 번 베토에게 달려들려다가 케이나에게 칼등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아얏!”
[내 동생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마라.]
“마리나, 너 정말 학습능력이 없구나…….”
일행은 곧장 안에 처박혀 연구를 시작한 베토를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거주지역을 새삼스레 둘러보며 이서희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완벽하게 조성된 생태계의 거주지역은, 나드는 공기마저 한없이 청정에 가까웠다.
“이런 곳이 있으니 시우가 바깥으로 나오지 않을 만도 하네.”
“여기까지 개방된 건 얼마 안 됐지만 말이야.”
정시우도 여태껏 감추어 오던 것을 드러내니 속이 제법 시원해졌다. 설령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비밀은 공유하는 것만으로 사람 사이의 간격을 좁혀 준다.
다른 이들이 그에게 보내온 신뢰의 보답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동료의 증표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지만, 어쨌든 다들 좋아하고 있으니 이것으로 되었다.
“앞으로 자주 놀러 와도 돼?”
“나랑 같이 들어오지 않으면 불가능하지만, 그래.”
이들과 한 자리에 모여 있으면 꼭 여유롭게 지내다가도 뭔가 일이 터지곤 했었기에 제법 경계를 했던 정시우였으나 그날은 모두 해산할 때까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복선 마스터의 길은 멀고 험했던 것이다.
그 후로도 당분간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물론 이곳저곳에 몬스터가 나타난다거나 거대 몬스터의 출몰로 레이드 파티가 구성된다거나 하는 일은 제법 있었지만, 불과 몇 달 사이 지구인들은 몬스터라는 비일상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말았다.
정부와 기업에 관계된 중요한 건물들부터 차례대로 몬스터의 부산물이 섞여 강화된 소재들을 섞어 새로이 건물을 올리고 있었고, 유사시에도 통신망은 유지될 수 있게끔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인류의 진화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쌓아 올린 문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그럼에도 막아 내지 못하는 영역이 있어 인류가 밀려나는 일이 있었지만, 인류는 끝내 몬스터로부터 70% 이상의 영역을 사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33단계 던전의 공략도 활발히 지속되었다. 중국의 용성 길드는 몇 번인가의 반복 끝에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던전을 공략하는 데에 성공했고, 다른 길드 또한 유명 랭커들을 초청하여 차례차례 33단계 던전을 클리어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도록 한국의 용오름 길드는 33단계 던전 공략에 성공하지 못했다. 충분한 인원이 모이지도 않았고, 그들이 도전한다고 공표해도 놀라우리만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되자 용오름 길드 멤버들이 길드를 탈퇴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용오름 길드의 해체는 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며, 지극히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김하룡은 끝내 잠적했다. 누구나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의 모든 시도가 정시우 때문에 파멸적으로 실패한 이래 누구나가.
“이제 새로운 신의 힘을 각성해서 스스로를 마왕이라고 칭하며 소국을 점령하고 나타나기만 하면 완벽하군.”
“시나리오 그만 짜요, 오빠.”
“아니면 아예 이세계로 넘어가서 최후에 나와 대면하게 되는 시나리오도 제법…….”
“묘하게 설득력 있으니까 그만하래두욧!”
“실은 유령을 붙여 두고 있어서 그럴 일은 없어.”
“오빠 지금 저 놀리고 있는 거죠?”
정시우 또한 그 두 달간 제법 여유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동안 그의 레벨이 너무 급격히 성장한 만큼 당분간 개미굴 던전을 클리어하기보다는 레벨에 비해 뒤쳐진 스킬 수준을 끌어 올리고 신체를 보다 잘 다루는 데에 집중하기로 한 것.
무엇보다도 용의 감각을 더욱 키우는 것과 전투질주, 스톤 스킨의 유지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성과가 있어 용의 감각을 2레벨로, 전투질주와 스톤 스킨의 레벨은 각각 5 이상 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가 포투포우를 아예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찾아가 다른 강한 몬스터를 물색해 보기도 하고, 군단의 신의 종속들, 화염의 신의 종속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 외 다른 신들의 종속을 죽여 신의 힘의 파편, ‘성물’을 찾아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조만간 일이 벌어질 것 같기는 한데.”
“오빠가 군단의 신의 성물을 가져온 것 때문에 말이죠.”
수아린의 지적대로 그가 테디베어…… 레드 티베이드 무리의 부락을 전멸시키고 군단의 신의 성물을 취한 일로 인해 군단의 신을 따르는 세력의 수장 케나토는 굉장히 열을 받은 상황이었다.
반면 화염의 신의 세력은 왜 먼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시비를 거냐며 그들 나름대로 엄청 빡친 상황. 누구 한 명 불을 붙이기만 하면 성대한 폭발이 일어날 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런 걸 어디에 쓴다고…….”
“그냥 해머에 넣어 버려요.”
“일단 조금만 더 둬 보고.”
군단의 신의 성물, 테디베어의 왕관은 제법 많은 신의 힘이 뭉쳐 탄생한 것이다. 군단의 신의 특성이 상당히 짙게 남아 있는 물건이기도 했고, 해머에 흡수시킨다면 그야 해머의 힘은 강화시킬 수 있겠지만 군단의 신의 개성은 완전히 죽어 버릴 가능성이 있었기에 저어되었다.
“지금은 우선 지구로 돌아가자. 다음에 왔을 땐 전쟁을 하고 있으면 좋겠네.”
“아, 오빠 지금 되게 나쁜 생각하고 있죠.”
“응. 엄청.”
정시우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구로의 귀환을 택했다. 마침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폰이 부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마리나였다.
[시우, 지금 랭커들 다 소집하고 있는데 몰랐어?]
“관심도 없어.”
정시우는 WPC의 명예 회원 취급이기는 하지만 터치를 받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특수한 환경임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나는 정시우의 대꾸에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한 달 전부터 진행되던 얘기인데 얘기 못 들었단 말이야……?]
“그니까 뭔데.”
[항로 개척.]
내가 지금 통화가 아니라 대항해X대 온라인을 하고 있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정시우의 귓가에 마리나의 목소리가 따갑게 꽂혀 들었다.
[해양 몬스터 때문에 완전히 포기했던 항로! 남태평양 항로 개척 때문에 지금 전 세계가 들떠 있는 거 몰라?]
“오.”
정말로 대항해X대 같아졌잖아, 하고 생각하며 정시우는 답했다.
“지금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