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화.
정시우는 수아린, 용세하와 함께 오랜만에 지상으로 나왔다.
통합 던전을 클리어하고 일주일 정도 느긋하게 개미굴 던전을 클리어하며(처음 다짐한 대로 다시 통합 던전을 만들지는 않았다.) 지내던 중, 33단계 던전을 클리어하기가 무섭게 정시우에게 전화를 걸어 댄 마리나의 독촉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시우!”
“뭐야, 그렇게 급하게 전화하기에 어디 다치기라도 한 줄 알았더니 멀쩡하잖아.”
언제나처럼 통 크게 카페 하나를 통째로 빌린 마리나가 한적한 카페 중앙에서 그에게 펄럭펄럭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세리아와 이서희도 있었다.
“시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
“나쁜 소식.”
자리에 앉은 그 앞으로 자연스럽게 카페모카를 밀어 주며 마리나가 하는 말에 정시우가 대꾸하자 세리아가 침착하게 말했다.
“던전에서 라이아의 흔적과 조우했습니다. 그것도 형태가 굳어져 있던 던전에 라이아가 종속을 난입시킨 형태였습니다.”
“난입이라…….”
굉장히 불길한 울림이 아닐 수 없다. 정시우는 최근 일어난 하늘성의 변화를 미루어 생각해 보며 험상궂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성이 변했든 신들의 영향력이 변했든, 아니면 둘 다든 썩 좋은 얘기는 아니네. 앞으로 플레이어들 여럿 죽어 나겠어. ……그런데 라이아라고?”
라이아라면 이전 자신이 소신전을 무너트리고 강림체까지 죽여 버려 영향력을 한껏 낮추었던 신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다시 지구로의 침입을 시도하다니…… 아니, 생각해 보면 그때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르기는 했다. 정시우가 그런 말을 하자 마리나가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이며 덧붙였다.
“물론 내가 보기 좋게 깨부숴 그 영향력을 다시 감소시켜 주긴 했지만 말이야.”
“정확히는 다른 이들의 힘이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무척 아슬아슬했죠.”
마리나나 세리아의 힘이 아주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클리어를 하지 못할 뻔했다는 말에 정시우의 인상도 찌푸려졌다.
신의 힘을 지닌 놈을 모두가 다 같이 물리쳤다. 거기까지만 들으면 옛날 동화 이야기에 나올 법한 미담이지만, 으레 괴물을 해치운 다음에는 그 전리품을 정산하는 문제가 기다리고 있게 마련이다.
“잠깐만, 그러면 혹시…….”
“여기서 좋은 소식.”
마리나가 인벤토리를 열어 제법 크기가 있는 돌조각을 꺼냈다. 그 안에 감돌고 있는 것은 분명한 라이아의 힘. 그것도 상당한 양이었다.
“라이아의 힘은 내가 특수 업적 보상으로 독점하는 데 성공했어. 비드로 화하면 보스전에 기여한 사람들이랑 나눠야 하니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녀석.”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거리며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마리나. 정시우도 절로 웃어 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시우, 이거 혹시 가공 가능할까?”
“세리아 체내의 루이오스의 힘처럼?”
“응!”
라이아의 파편의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마리나에게 있다. 그리고 정시우에겐 신의 힘을 가공해 탈이 없게 만드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아자!”
무척 기뻐하는 마리나에게 정시우가 마찬가지로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걸 네 마력으로 만들어 주는 건 불가능해.”
“왜애!”
역시 마리나는 세리아처럼 신의 힘을 가공하여 자신의 마력을 불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 손 위에 놓인 라이아의 파편을 쥐어 들었다.
[감…… 히이…….]
그 안에 갇힌 라이아의 의사가 전해져 왔으나 이제 그 정도 의지로는 정시우의 마음을 조금도 침범할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여 신의 의지를 축소, 죽여 나가며 말했다.
“세리아는 그때 죽을 뻔했어. 루이오스의 종이 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고.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두 번 다시 그런 외줄 타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만큼 시우가 나를 걱정한다는 뜻이구나, 아얏!”
수아린과 세리아가 동시에 마리나의 머리를 때렸다. 정시우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까 체내 주입은 불가능해. 하지만 물건 개조라면 얼추 가능할 것 같다만…… 어쩔래? 맡겨 볼래?”
“역시 시우 님이십니다.”
“끄응, 시우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나…….”
“라이플의 빚을 갚을 겸 공짜로 해 줄 테니 네 권총 내놔 봐.”
“응.”
마리나가 꺼내 든 권총은 과연 세계 최강의 사수인 그녀의 명성에 걸맞게 A++급이었다. A급의 무구도 드문 판에 이런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갖고 다니는 것이 과연 그녀의 명성을 실감케 했다.
“어쩌면 여기서 플러스 하나 더 붙을지도 몰라.”
“정말? 시우, 사랑해!”
“후우.”
마리나의 사랑고백을 코웃음으로 무시한 정시우는 그녀의 권총 위에 라이아의 파편을 얹고는, 용의 감각을 최대로 활성화하여 두 아티팩트를 한 손에 쥐었다.
그 순간 라이아의 파편이 강렬한 스파크를 튀기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섬뜩하리만치 강렬한 두 종류의 마나가 부딪혀, 어느 한쪽이 압도되어 변화하는 모습. 격렬한 전투도 아니고 단지 마나 반응으로 일어나는 빛의 반응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숨죽여 그것을 지켜보았다.
“서희, 잘 봐 둬. 저 마나 테크닉을 우리가 쫓아가야 해.”
“안 그래도…… 열심히 보고 있는걸.”
그것은 단순히 정시우의 타고난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강탈 능력이 없었다면 신의 힘을 이용하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했겠지만, 일단 강탈로 소유권을 확정한 후 그것을 물건에 부여하기까지는 순수하게 고도의 마나 컨트롤을 필요로 하는 단계였다.
“좋아, 됐다.”
“너무 쉽게 하잖아!?”
그런데 그 어려운 것을 정시우는 해내고 말았다. 그것도 턱없이 빠른 시간 안에. 정시우는 라이아의 파편을 완전히 흡수하여 푸른 뇌전을 머금게 된 권총을 마리나에게 밀어 주며 여유롭게 웃었다.
“너희가 모르는 데서 또 신의 힘하고 으르렁댈 일이 있었거든.”
“흐히, 정말 ‘+’ 하나 더 붙었다. 시우, 고마워!”
고개를 쭉 내밀어 그에게 감사의 키스를 해 주려던 마리나가 세리아에게 저지되었다. 정시우는 세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카페모카를 쪼옥 빨아 마셨다.
“너희도 신의 파편 입수할 일 있으면 괜히 혼자 뭐해 보겠다고 용쓰지 말고 나한테 가져와. 그냥 나한테 주면 더 좋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단한 걸 요구하는구나.”
“저는 모두 시우 님께 드리겠습니다. 기꺼이.”
“그래, 그러면 나는 이제…… 어, 음.”
용건이 끝났으니 자리에서 일어나겠다고 말하기에는 세 여성의 눈빛이 모두 지나치게 초롱초롱했다.
“시우야, 너는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맞아. 한 달간 대체 어디에 박혀 있었어?”
원망을 사기 싫었던 정시우는 결국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그녀들의 수다에 어울려 주어야만 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세 여자가 앞다투어 그간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인공섬이 어떻게 완공되어 가는지, 용성 길드의 마스터가 어떤 식으로 마리나와 세리아에게 집적대려 했는지…….
“그러니까 시우, 나랑 위장 약혼하지 않을래?”
“싫어.”
“아, 왜애.”
정시우는 턱도 없는 것을 요구해 오는 마리나에게 오늘 들어 몇 번째인지 모를 코웃음을 쳐주며 고개를 들었다. 그들 외에는 따로 손님도 없는 카페, 벽면에 설치된 TV에서 최소 음량으로 조정된 뉴스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몬스터 습격이네.”
“요즘 자주 일어나니까. 한국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지간히 큰일인가 봐.”
“……음?”
그녀들에게 맞장구를 쳐 주려던 찰나 정시우의 눈에 조금 기묘한 광경이 들어왔다. 처음엔 카메라가 가까이서 관측해서 그런가 했는데, 아무래도 도시 한중간에 나타난 몬스터의 모습이 제법…… 상당히…… 아니, 터무니없이 컸다.
“야, 저거 루이노스 리자드만 하지 않냐?”
“루이노스 리자드? 아, 그때 그 몬스터 말하는 거구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때 다른 건물 추가로 안 무너트리고 그거 끄집어내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어?”
마리나가 투덜거리며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화면 안에 나타난 몬스터의 모습을 포착하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짜 크다…….”
“내가 말했잖아.”
요즘 들어 개미굴 던전 발생도 뜸하다 싶더니 설마 저런 대형 몬스터가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오다니. 과연 저 나라 사람들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정시우가 고민하던 그때 아니나 다를까 일행의 폰이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WPC 조약…….”
“그 나라의 플레이어들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몬스터 발생 사태에 힘을 보태야 하는 게 조건이었지.”
“일어나자. 서둘러.”
물론 그 시간에 하늘성에 있거나 다른 몬스터와 교전 중이거나, 바로 얼마 전에 조약을 수행했다면 얼마든지 불참해도 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든 사항에 해당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 모두 저 거대 몬스터와 싸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야?”
“독일 뷔르츠부르크.”
“음, 완벽히 모르겠어.”
“몰라도 돼. 중요한 건.”
마리나가 곧장 폰을 들어 자신의 오빠에게 연락하며 그들을 이끌었다.
“B&Y 베를린 지사에 게이트가 있어. 일단 거기로 가자!”
일행은 곧장 서울의 B&Y 빌딩으로 향해, 그곳에서부터 다시 베를린의 B&Y 지사로 향했다.
UN과 B&Y의 협력하에 각국 수도에 게이트를 만든다는 계획이 추진되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지라 아직 대다수의 플레이어는 게이트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즉 우리가 어지간하면 일착이라는 뜻이지!”
“날개도 있으면서 왜 자꾸 바이크 뒷좌석에 앉으려는 거야, 대체?”
참고로 케이나는 부르지 않았다. 대장간은 이제 막 완공되었고, 그녀는 지금 베토의 대장간 일을 조금씩 도와주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힘이 필요한 사태라는 판단이 서면 그때 그녀를 불러도 늦지 않을 것이라 정시우는 생각했다.
“느껴져? 마력 파장 한 번 엄청난데.”
“하지만 다행이다.”
어째서 마리나가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지 정시우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신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지?”
“응, 적어도 신의 축복을 받은 놈은 아냐.”
요즈음 뻑하면 신의 축복이니 뭐니 하면서 신의 이름을 찬양하는 몬스터들만 나타나는 바람에 아주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같은 패턴만 반복되면 그 누구라도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이젠 오히려 신의 힘을 지니지 않은 몬스터가 더 참신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기분도 개운해졌으니 평화롭게 싸우고 쉬러 가자.”
“아, 이 사람들 인식은 단체로 글러 먹었어…….”
오직 수아린만이 제정신으로 한탄했다. 일행은 모두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로부터 3분여간 비행을 지속한 끝에 독일의 중소 규모 도시인 뷔르츠부르크에 도착한 일행은 소담하니 예쁜 성당을 박살 내며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거대한 몬스터를 발견했다.
플레이어들을 마구 짓밟고, 사람들의 원한 어린 탄성을 그 거대한 몸에 모두 받아 내는 끔찍한 괴물…….
“테디베어잖아!”
“테디베어처럼 생긴 괴물일 뿐이에요.”
거대 몬스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정시우도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이었으나, 그에게는 그전에 태클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세계…… 통로?’
그 안에 포함된 신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여 순수한 마나로 구성된 것만 같이 보이는 통로.
바로 방금 열려, 어쩌면 5분 안에라도 사라질지 모르는 통로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