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화.
마리나 비셋은 무수한 이들의 조력으로 서서히 완공되어가는 인공섬의 내부를 둘러보며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1달 만에 어떻게 되네.”
“B&Y의 협조 덕분이죠.”
마리나의 등 뒤로 다가와 말을 건넨 이는, 이번 인공섬 건설의 한 축을 담당한 세계적 대기업 용화의 간부 이청호였다. 공사가 시작되고 그의 감사인사를 족히 수백 번은 들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서는 대꾸했다.
“내가 아니라 에단에게 감사하도록 하세요. 그럼 나는 이만.”
“아, 비셋 양…….”
그러나 마리나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원래 활기차기는 해도 다른 이에게 딱히 무례하게 굴지는 않는 그녀였으나…… 지난 한 달간, 용화와 관련된 이들이 무던히도 마리나를 괴롭힌 탓에 조금 과민반응을 한 감이 있었다.
“귀찮아 죽겠네, 진짜. 왜 저쪽 기업 사람들이 자꾸 친근감을 표시하는 거야, 나한테.”
“그들의 수장이 너를 점찍고 있다는 말이 있다.”
“아이 깜짝이야!”
마리나가 기겁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서자, 세리아 윌슨이 위에서부터 하강하여 그녀 눈앞에 착지하는 것이 보였다. 마리나는 머리털을 곤두세우며 그녀에게 따졌다.
“넌 왜 자꾸 내 사각에서부터 접근해 오는 거야!”
“마리나 비셋, 이제 곧 33단계 던전에 진입해야 해. 농땡이 피우지 말고 따라오도록 해.”
“전화 걸면 되잖아, 전화! 여긴 하늘성도 아니고 인공섬이니까 폰 터지잖아.”
“굳이 전화로까지 네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세리아의 까칠한 태도에 마리나는 이를 갈았다. 비록 과거의 악연이 길긴 했지만 이래저래 일이 있은 후 지금은 완전히 같은 파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늘 그녀는 왜 이렇게 자신을 배척하려 든단 말인가!
“조만간 아주 지긋지긋하게 듣게 될 테니까 미리 적응해 두란 말이야. 자, 어서 사모님이라고 불러 봐.”
“네가 그렇게 나오니까 싫다는 것이다.”
세리아가 흥, 하며 코웃음을 쳤다. 마리나는 으득, 이를 갈면서도 그녀에게 굳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들의 수장이 뭘 점찍었다고?”
“용화 그룹의 수장 이강후. 그가 널 점찍었다고.”
“이강후……? 그 사람은 용화 그룹이 아니라 용성 길드의 마스터잖아?”
참고로 용성 길드란 이번 33단계 던전 도전의 주축으로, 중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길드이기도 했다. 한국에 32단계 첫 클리어를 빼앗긴 것에 이를 갈고 부단히도 노력하여 기어이 이번 이벤트를 성사시킨 주체였다.
“너…… 혹시 모르는 거야?”
깜짝 놀랄 만큼 예리한 구석이 있는 주제에 이상한 데서 상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세리아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용화 그룹과 용성 길드의 수장, 그 둘은 동명이인도 아니고 같은 사람이야.”
“……어쩌다 그런 끔찍한 일이?”
세리아가 보기엔 세계 최고의 용병으로 꼽히는 주제에 B&Y의 영애이기까지 한 마리나 또한 그자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질색하는 마리나에게 차마 태클을 걸 수가 없었다.
“우리가 보기엔 지독한 우연이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엔 필연이겠지. 그렇다면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않겠어?”
용화 그룹은 중국에서 출발한 기업이다. 평범한 의류 산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IT와 방위산업까지 손을 안 대는 곳이 없는 세계적 대기업이 되었는데, 그 3대 수장이 올해 43세가 된 이강후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 사람이 중국에서 가장 큰 플레이어 길드의 마스터이기까지 하다면…… 익히 그의 태도며 말투를 짐작할 수 있게 된 마리나의 표정이 대번에 썩어 들어갔다.
“우와, 나 아직 그 사람 만나 본 적 없는데…… 왜 지금부터 견적이 잡히는 거지. 괜히 김하룡이 생각나. 아으으.”
“애도를 표한다, 마리나 비셋. 넌 바로 그 사람한테 찍힌 거야. 던전에서도 엄청 귀찮게 굴겠지.”
“아…….”
마리나가 힘없이 늘어지며 세리아의 한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질색했으나 마리나가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왜 이렇게 날 찍는 사람들이 많은 거야, 머리 아프게…… 으아아, 미녀라서 너무 괴로워. 죽을 것 같아.”
“그래, 콱 죽어 버려.”
질투를 담아 말하는 세리아. 그런데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마리나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더 귀찮아지기 전에 시우와 가짜로 약혼식이라도 올리는 게 좋겠어. 그는 내 파트너니까 분명 내 부탁을 들어줄 테고, 그러면 다른 남자들이 날 못 건드리게 되겠지. 그러다가 시우와 내 관계가 발전하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일이고…….”
“요즘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한국의 격언 중 빵이 나오지도 않는데 스프만 마신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을 너에게 해 주고 싶군.”
“어머, 너희 둘 다 아직 안 가고 있었어?”
둘이 제법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급기야는 트리오의 마지막 한 명이 끼어들었다. 고유의 결계 능력을 구사하는 탓에 공사현장 이곳저곳에서 절실히 원하는 에이스로 거듭난 이서희였다.
정작 매번 던전 탐험을 하느라 바빠 별로 인공섬에 올라오지 못했지만, 이제 곧 마리나와 세리아가 던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공사를 돕겠다고 선언하자 인공섬 전체가 환호로 들끓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소문이 있다.
“서희!”
“서희, 쉬는 시간이야?”
“응. 둘의 마나가 느껴져서 와 봤어.”
이서희는 마나의 감각이 누구 못지않게 뛰어나다. 그녀가 결계를 다루는 능력을 각성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설마 타인의 마나를 섬세하게 구분하고 추적할 정도의 능력자였다니…….
인재를 보는 마리나의 눈은 어긋나지 않는다. 세리아는 새삼스레 그 사실에 감탄했다.
“둘 다 서둘러. 사람들이 두 사람을 찾고 있었어.”
“우으, 그래야지. 서희, 나 던전 들어간 동안 잘 지내.”
“혹시 시우 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대신해 그분을 도와줘.”
“그래.”
이서희는 마리나와 가볍게 포옹을 하고는, 세리아의 진지한 부탁에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말했다.
“시우 녀석, 매번 단문으로만 용건을 끝내니까 지금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원래 그런 남자 아냐?”
“그래도 연애할 땐 정말 상냥했는데 말이지…….”
이서희가 어딘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마리나의 표정이 살짝 어색해지더니, 이서희와 포옹을 풀고 서둘러 깃털 날개를 펼쳤다.
“나, 나 그럼 가 볼게. 서희, 잘 지내! 세리아는 빨리 따라와!”
“아.”
남은 두 여자는 꽁지 빠지게 날아가는 마리나의 뒷모습을 보며 쿡 웃어 버렸다.
“도망쳤다.”
“도망쳤네.”
“마리나가 시우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지?”
“그런 주제에 그냥 파트너라느니, 위장약혼이라느니…… 잘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단 말이지.”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34단계 던전은 같이 들어가자.”
“무사히 다녀와야 해, 세리아.”
세리아까지 날개를 펼치고 마리나의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이서희는 잠시 가만히 선 채 그 둘의 남긴 마나의 흔적을 쫓다가는, 이내 자신의 뺨을 두들기며 돌아섰다.
“자, 그럼 후딱 끝내러 가 볼까.”
마리나와 세리아는 금방 합류하여 하늘성으로 향했다. 그곳에 34단계 던전 클리어를 위한 파티가 전원 소집되어 있었다. 총원 50명, 그들이 발견한 아프리카 대륙 상공에 떠 있는 34단계 던전의 입장 최대 인원 제한에 아슬아슬하게 걸리지 않는 숫자다.
“오, 비셋과 윌슨이 왔어!”
“이걸로 전원 모였군.”
“어서 오세요, 마리나 비셋.”
그들이 하늘성 출정지에 착지하자, 머리를 포마드로 매끈하게 넘긴 동양계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오며 마리나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중년으로 보이는 나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강한 마나…… 틀림없이 이번 던전 탐사의 주역, 이강후였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래도 일단 처음 만나는 사람인 만큼 오빠에게 배운 사회예절을 필사적으로 동원하여 미소를 지어 보이는 마리나와, 여전히 얼음장 같은 표정을 유지하며 인사하는 세리아. 이강후는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하려다가 그 옆의 세리아를 뒤늦게 인식했다.
“오, 이런.”
그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혹시 세리아 윌슨 양이십니까? 마리나 비셋 양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플레이어 랭킹을 다툰다더니 그 말이 실로 틀리지 않군요. 반갑습니다.”
“…….”
그 말을 듣는 세리아의 인상이 더 차가워졌다. 마리나가 참지 못하고 작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너도 찍은 거 아냐?”
“닥쳐.”
그렇다면 이쪽에서 찍어 줄 뿐이다. 시우 님의 망치를 빌려서라도. 세리아는 대충 그에게 대꾸를 하고는 마리나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메인 타겟에게만 집중하도록 도와줘야지.”
“제발 그러지 마, 우리 같은 파티잖아. 시우한테 얘기 잘 해 줄 테니까, 응?”
그러나 그녀들의 걱정과는 달리, 막상 33단계 던전에 진입하자 이강후는 그녀들을 많이 귀찮게 굴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집적대던 김하룡과는 달리 그에게 있어 최우선은 던전 클리어였기 때문!
“역시 플레이어의 선두에 서 있는 두 분답습니다. 우리 길드가 많이 배웠습니다.”
“아, 네.”
“힘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지요. 우리 길드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기회가 되면 직접 물을 건네준다든가 하며 최대한 많이 말을 붙이려 들었지만 그 태도도 어디까지고 정중했다. 그녀들은 그 모습을 보며 적어도 어이없이 던전 공략 실패를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문제는 33단계 던전 그 자체가 품고 있던 비밀 때문에 일어났다.
[키하!]
“뱀이다.”
“뱀?”
던전의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고위 던전에서 거의 고정적으로 출몰하는 오크와 트롤, 가끔씩 나타나는 원숭이의 진화종 몬스터와 겨룰 뿐이었다.
일정 패턴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비행형 엘리트 몬스터의 존재까지 사전 탐사대의 정보로 파악하고 있어, 그 녀석들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조심해, 이 녀석들 번개를 다룬다!”
“번개……? 잠깐만.”
파티 선두의 보고를 듣던 도중 마리나의 감이 경종을 울렸다. 그녀는 여태껏 던전에서 많은 신의 흔적과 접촉했는데, 그중 뱀과 번개에 관련된 신이라면 하나뿐이었다.
“혹시 이 던전, 라이아의 영향을 받은 건가……?”
“라이아? 아.”
원딜이라는 포지션이 비슷한 만큼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비슷한 위치에서 마탄을 쏘아 내고 있던 세리아가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떻게 된 거야. 탐사대 보고랑 다르잖아. 최대한 쉬운 던전을 고른 결과 신의 힘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는 곳은 제외한 것 아니었어?”
“그들도 던전의 끝까지 탐색하지는 않았을 테니 중간에 다른 계열의 몬스터가 나타난다고 해도…… 아니, 잠깐.”
마리나가 눈에 마나를 부여하여 시각을 강화시켰다. 정시우의 시각 스킬을 보고 본능적으로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효과는 탁월했다.
“우리 앞에 놓인 통로랑, 그 바로 근처에 솟구친 절벽…… 그 부분을 경계로 마나가 나뉘는 것 같지 않아?”
“마나가…… 나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세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마리나의 인상이 그녀 못지않게 일그러졌다.
“이 비슷한 광경 바로 얼마 전에 봤어…… 그랜드캐니언에서.”
그런 그녀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듯, 파티의 선두를 이끌던 이강후가 갑자기 고함을 내질렀다.
“후퇴! 이런 제길…… 모두 후퇴해!”
[라이아 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다!]
곧 그 목소리를 집어삼키듯 울려 퍼지는 괴성이 던전을 가득 채웠다.
[마리나! 그 목을 내밀어라!]